(제 22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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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철은 마침내 그사이 더욱 무르익혀온 강욕취입안을 도면과 함께 제기했다.
대번에 일대 격찬이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것처럼 모두가 쌍수를 들고 지지해나섰다. 바랐던바보다 몇배 더 큰 격려와 찬사여서 그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당장 이 기술안을 구체화하오. 우선 도면부터 완성해야겠소. 다소 자재나 돈이 들더라도 빨리 실현할수 있게만 하오! 알겠소?》
기술부기사장의 전에 없는 고무였다.
(중유절약안은 어떡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곧 새로운 결심에 사로잡혔던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반년동안이나 고심해온, 그래서 이젠 거의 마감단계에 들어선 중유절약안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겠다는것이였다.
(아니, 넘겨주다니? 그게 어떤거라고?)
따져보니 아까왔다. 생각할수록 그 기술안에 바친 노력이, 또 실현을 눈앞에 두었다는 사실이 미련을 품게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기술안인가!
하지만 그는 도리를 저었다.
(우리한테야 누가 어떤걸 만들었는가 하는것보다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쓰이는가가 더 중요한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에게 차례진것이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무상의 혜택이라고만 여겨졌고 그 혜택에 어쩐지 자기를 희생시키고싶기까지 한 심정이였다.
(그래! 인계하자! 인계할바엔 송두리채 깨끗이 넘겨주자! 그 정도의 희생이 아니면 무슨 선행이라고 하랴!)
언제나 자기가 남들보다 확고히 앞섰다고 느낄 때에만 품게 되는 그런 아량이 그에게 작용했던것이다.
일단 이렇게 마음을 먹고나자 그는 자기의 결심이 자기 희생에서 출발된다는것으로 하여 자랑스러웠고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할 사람들의 모습으로 하여 더욱 만족스러웠다.
이리하여 그는 지금 그 무상의 행복자가 될 대상을 고르고있는중이였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불시에 떠오르는 한사람의 모습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렇지!)
어째서 진작 그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알수 없었다.
불같은 열정의 소유자겠다, 또 현실을 감수하는 기민한 판단력은 어떻고? 특히 그가 시도하는 기술안과 중유절약안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것이 아닌가! 언젠가 흥분한 표정으로 중유절약안의 도면을 보여달라고 하던 진호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래,
그도 진호가 시도하는 기술안이 어떤것인가를 모르지 않았다. 이미의 시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 즉 완전히 새로운 첨가제를 만들어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든것인가 하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아무리 대학때부터 해오던 연구라 해도 첨가제에 대한 확정, 부단한 반복시험과 그를 통한 확률적인 지수의 측정, 이 과정만 해도 간단치 않는데 연료를 가공하고 취입해야 할 장치까지 도입하자면 얼마나 오랜 기일이 걸릴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기철은 그의 열정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째서 그처럼 현실에 대한 정확한 리해를 가지고있는 그가 그런 료원한 과제를 잡았는지 알수 없기도 했다.
그때마다 자기가 그랬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현장에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한땐 그런것처럼 진호 역시 간혹 가다 자기의 지혜로 도달한 어떤 결론의 가치에 지나친 흥분과 열정을 앞세운 나머지 이여의 타산이며 경험은 고려에 두지 않은 상태에 있는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진호는 확실히 여느 대학졸업생들과는 달랐다.
흔히 대학시절 학과에 충실했던 수재라 해도 현장의 복잡한 정황에 부딪치면 어안이 벙벙해지거나 왕청같은 질문을 하기마련인데 진호가 처음부터 느끼는것들은 거의 모두가 현실적이고 여태껏 해결하지 못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불균형이 조성된 모순점들이였다. 말하자면 교육실습에서만 생산과 접촉해본 그런 유치한 점이라곤 없었다.
기철은 그를 첫눈에 재능형으로 결론내렸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기술자들인 경우에는 어쩔수없이 두가지 류형으로 구분되는데 첫 부류는 재능형이고 둘째 부류는 노력형이라는것이였다.
재능형은 잉크방울을 빨아들이는 흡인지처럼 어떤 대상에서 야기되는 문제들과 해당한 방도를 재빨리 포착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노력형은 이와는 달리 물방울을 빨아들이는 종이처럼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만큼 폭넓고 진진하게 흡수하는 사람이였다.
이 두 부류는 어느쪽이나 우단점이 있는것으로서 영민한 판단과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진지한 태도가 부족하고 꾸준하고 성실한 사람은 부득불 예민하지 못한 약점을 가지게 된다는것이였다. 물론 이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는 제3부류가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가 제일 질시해마지 않는 무맥형으로서 기술자의 셈에조차 넣지 않았다.
그러나 따져보면 진호를 단순히 한가지 류형에만 국한시킬수는 없었다.
언젠가 로에 취입되는 열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는 현재 로들이 취입되는 열량의 8할도 소모하지 못하고있다고 했다.
《3 500립방의 가스와 4기압의 산소, 거기에 9천카로리의 중유가 취입되면 80톤의 원료를 50분에는 녹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로나 용해시간이 1시간이 넘는군요.》
《형편은 그렇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준수치고 로내의 구체적인 정황이야 다르지 않겠소. 로상태를 고려했소?》
《했지요.》
《열의 파동은?》
《그것도 평균수칩니다.》
《그럼 장입방법도 따져봤소?》
《?》
그제야 그는 생각에 잠기는것이였다. 그쯤으로 리해했으리라고 믿었는데 며칠후에 또다시 그 문제를 들고나오는것이였다.
《확실히 이건 열량의 지나친 랑빕니다. 이걸 보십시오.》
그가 내미는 자료들을 보면서 기철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웬만한 경험을 가진 기사가 아니고서는 해명해내지 못할 그런 문제가 정확히 밝혀져있기때문이였다.
흔히 재능이 있는 사람에겐 노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겐 재능이 결핍돼있기 십상이지만 진호에게는 량자가 서로 배합돼있는것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끈덕진 노력이 더 우위를 차지하는것같기도 했다.
(그래, 그 이상 적임자는 없어!)
기철은 그가 중유절약안을 맡으면 틀림없이 지금의 난관을 해결하리라는것을, 또 그것으로 하여 적어도 발명권쯤은 차례지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무수히 써넣은 진호의 이름옆에다 그는 빠짐없이 동그라미를 그려넣었다. 숱한 공정기사들은 다 패배하고 유독 진호 하나만이 승리한 대전표를 내려다보며 그는 또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는 주춤하지 않을수 없었다. 불시에 그 어떤 힘이 자기의 충동을 다잡는것이였다.
(과연 그에게 중유절약안을 맡기는것이 옳은 일일가?)
이런 의혹이 서리면서 아무리 그의 기술안이 실현하기 어려운것이라고 해도 그걸 위해 지금 모든 심혈을 쏟아붓고있는 진호에게 자기의 기술안을 인계한다는것이 혹시 온당치 못한 일이나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며칠전 연도에 들어갔다가 질식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정을 모르는데서 범한 실수라고 했지만 기철은 애초부터 그가 결심하고 단행한 행동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또 그런 결심은 남다른 목적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만 있을수 있는것이여서 그는 진호를 더욱 새삼스런 눈으로 보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정신적희열에 지배되고있는 순간처럼 자기본위가 되는적은 없는것이고 그런 때에는 자기보다 더 아름답고 더 흥미있는것은 세상에 없는듯이 생각되는 법인데 바로 진호가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우에는 오직 그 유혹에 몸을 맡김으로써만 거기에서 빠져나올수 있다는것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맡길수 없어!)
허리를 편 그는 다시 창문쪽으로 다가섰다.
출강장의 불빛이 온 용해장을 감빛노을로 물들이고있었다.
(어떻게 한다?)
《따르릉!》
갑자기 울리는 전화종소리에 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와오는 시간이였다.
송수화기를 드는데 교환수가 부에서 오는 전화라고 일러주는 바람에 그는 대뜸 의자를 당겨놓으며 귀를 강구었다.
《책임기사동무요?》
상대가 누구라는것을 안 그는 곧 반색을 지었다. 명식이였다.
《실장동무군요.》
《역시 밤늦게까지 분투를 하는군. 난 틀림없이 동무가 직장에 있으리라고 믿었소.》
《흠! 실장동무야 뭐 거기 앉아서 축구구경하는 기분일테지만 여긴 어떤줄 압니까? 혀를 빼물고 달리는 선수 맞잡이란 말입니다.》
워낙 롱담이라고는 잘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갔다.
《허허, 하긴 그럴수밖에! 이젠 중유가 풀렸으니까, 그래 쇠물이 좀 나오나― 축구선수?》
《꽝꽝 쏟아지지요, 어느 로나 하루 세차집니다.》
《축하하네, 우리가 제때에 정확한 보고를 올리기 얼마나 잘했나!》
중유를 보장받을수 있게 된것이 자기들때문이라는 일종의 자랑이 그의 목소리에 어려있었다.
《참, 투사기도면을 받았습니까?》
《받았네! 바로 그것때문에 전화를 걸던참이야! 본래는 이달내로 도면을 료해하고 담당심사원을 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긴급과제가 제기돼서…》
《예?》
필경 심사가 늦어지는데 대한 발명이리라는것을 알고 물었으나 명식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것으로 여기고 더 큰소리로 곱씹는것이였다.
《외국에 보낼 설비의 심사가 제기됐단 말이네. 당분간 항에 나가있어야 할것같네. 어쩌겠나? 미안한대로 좀 참아주게.》
그러면서 될수록 최선을 다해 빨리 끝내도록 하겠다는것을 부언했다.
《할수 없지요, 어쨌든 여기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다는것만 잊지 마십시오.》
《암, 잊지 않겠네! 참! 동무가 하던 그 기술안 있지? 중유절약안 말이야. 그것도 추진시키고있겠지!》
《예, 곧 대책을 세우지요.》
《놓치지 말게, 중유가 풀린 이런 땔수록 우린 중유를 더 절약해얄게 아닌가! 응?》
《참, 실장동무!》
진호에 대한 생각에 미친 기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실장동무 신세를 너무 지는게 아닙니까?》
《신세라니?》
《도면만 방조받는게 아니라 이젠 사람까지 보내주니 말입니다.》
《사람? 오― 진호 말인가? 그 친구가 동무네 직장에 있다면서? 공정기사로 있다는걸 나도 들었네. 어쨌든 옆에서 좀 잘 도와주게.》
기철은 송수화기를 놓고도 한동안 얼굴에 피여나는 흐뭇한 기색을 지울길 없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적임자는 정아뿐인데… 정아한테 맡겨?!)
책상우에 널려있는 종이장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밖으로 나서니 벌써 하늘엔 별들이 총총했다.
그 별들을 쳐다보느라니 어째선지 앞으로는 모든 일을 더욱 버젓한 긍지를 가지고 대할수 있도록 곱절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과 할수 있다는
그는 희망이 용솟음치는 씩씩한 기분으로 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