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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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일은 꼭 일주일만에 사무실에 들어섰다. 마치 몇달만에 사무실에 들어선듯한 느낌이였다.
애써 마음을 넓게 가지려고 했지만 마음속의 공허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를 잃은 공백에서 오는 허전감이였다. 아버지는 신형일의 가슴에 늘 차있었다. 집에서는 물론 사무실에서도 그의 곁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왜 아버지의 최후를 예감하지 못했던가? 너무나 평온했던 아버지의 눈빛을 보고 안심했던가, 아니면 강계에로의 길이 바빠서였던가. 눈앞에서 이윽토록 자기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나누었던 마지막말을 조용히 더듬었다.
《
아버지의 마지막 마디마디는 의미심장한것이였다.
신형일은 책상앞에 앉아
두연오리공장의 현대화가 어떻게 되여가는가고 물으신것은 주로 발효제에 대한 말씀이였다. 어떤 때는 제기되는 문제를 풀어주시고 어떤 때는 일군을 파견해주시고.
지금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연구사들의 연구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있다. 이 연구성과를 현장에 도입하고 공장기술자들과 합심하면 목표했던 수준에 도달할수 있다.
아직까지는 한실험실안에 있으면서도 천호와 수려가 거의나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있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들의 연구조에서 변화가 일어날것이였다.
신형일은 천호가 공장에 돌아오자마자 수려를 만났다는걸 이미 알고있었다. 벌써부터 눈앞이 훤해지며 기대감이 앞섰다.
갑자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안해였다.
《약을 들었는가요?》
신형일은 송수화기를 든채로 잠자코있었다. 아버지를 잃었는데 내건강이 뭐라구, 허무감이 오며 몸을 지탱하기 힘들었다.
《여보, 현아 아버지.》
《알겠소.》
《꼭 들어야 해요.
안해의 목소리가 꾹 잠기며 더 이어지지 않았다.
징- 전류소리가 나며 안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것이다.
신형일은 송수화기를 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강계에서 돌아온 후였다. 아버지방에서 혼자 머리를 숙인채 있던 신형일은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해였다. 언뜻 출장갔다와서 안해를 만나겠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버지를 잃고나니 그 생각이 제일 큰 문제처럼 가슴에 콱 마쳐왔다.
《여보, 내 당신한테 할 말이 많소. 먼저…》
신형일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안해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더 말을 말라고, 말을 안해도 다 안다는 의미인지 한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신형일은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하얀 종이를 알아보았다.
《
그러며 안해는 들고있던 흰종이를 내놓았다. 신형일은 흠칫했다. 안해가 아버지의 마지막말을 고스란히 적은것이다.
신형일은 눈에 익은 안해의 글씨를 읽어나갔다.
《현대화를 끝내고 꼭
며늘애야, 네 남편의 건강을 너에게 맡긴다. 나는 너를 믿는다. 고맙다.
나는 한생을 보람있게 살았고 당의 배려를 누구보다 많이 받아왔다. 내 한생에 여한이 없다.
잊지 말고 새기거라. 지금 네 남편이
신형일은 눈앞이 뽀얗게 흐려왔다. 아버지의 마지막당부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안해의 진정이 그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래서 안해는 물론 공장에서도 아버지소식을 알려주지 못했던것이다. 아버지는 일생을 떳떳하게 살아왔지만 마지막길도 그렇게 훌륭히 장식했다.
신형일은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안고 안해에게 다가갔다.
《여보, 당신이 수고하는줄은 알면서도 당신에게만 맡기고… 내가 더 생각을 했어야 하는건데… 안됐소.》
《아니예요, 아니…》 안해는 더 말을 못하고 터지려는 오열을 손으로 막았다. 신형일은 목이 메였다. 녀자들은 남편의 말 한마디면 모든것을 리해하고 그 한마디를 큰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녀인들은 이렇게도 마음이 아름답고 성실한가. 이런 면에서 한가정의 세대주인 내가 더 생각을 했어야 하는건데.
《여보, 고맙소. 나는 아버지에게 효자노릇을 못했는데 당신은 아버지에게 한이 없게 했소그려.》 안해는 끝내 어깨를 떨었다. 신형일은 떨리는 안해의 어깨를 조심히, 그러면서도 따뜻이 감싸안았다. …
안해는 바로 아버지의 그 부탁을 리행하려는것이다. 그것을 지켜주고싶었다. 가방에서 약을 꺼내놓는데 또 전화종소리가 났다. 박순배지배인이였다.
《비서동무, 무슨 말로 위로할지 할 말을 못찾겠소. 정말 안됐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전화나 하니 미안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갈려있었다.
《지배인동지의 심정을 알만합니다.》
《겸사 오늘 자기를 반성합니다.》
박순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신형일은 의아해졌다.
언제든 지배인과 마주앉고싶었지만 큰 수술을 받은 환자이기에 될수록 사업얘기도 피하던중이였다.
《그래 몸은 좀 어떻습니까?》
《지금 어디 내 몸 걱정할 때요? 제발 지금이라도 마음을 좀 푸시구려. 그렇게 병환이 심한 아버지를 안해에게만 맡기고 공장을 떠나지 못한건 전적으로 내가 자기 구실을 못한탓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지배인의 갈린 목소리가 꺽 막혀졌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아직두 내 마음을 서운하게 하는구만. 속시원히 터쳐놓기라도 하시구려. 그렇게도 내가 미덥지 못하시오?》
신형일은 얼굴을 번쩍드는 지배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그는 조만해서는 성내는 일이 없지만 노여움은 많았다.
《지배인동지, 진정하십시오. 정말 건강이 어떻습니까? 사실 강계에서 돌아오면 병원에 가리라고 계획했댔는데 일이 그만…》
《섭섭하구만. 이 지배인이라는 사람이 당비서의 말대상도 안된다는건데…》
진정을 터치며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 그게 아닙니다. 그래 지금 누워서 전화를 합니까?》
《아니, 오늘부터는 일어나앉았소. 편안하오.》
그렇다면 마음을 놓고 전화상으로라도 속을 터놓을수 있었다. 당비서라는 직분에 앞서 사내들끼리 속을 터놓기는 알맞춤한 기회였다.
신형일은 큰숨을 내쉬였다. 무엇보다 말하고싶은것은 지배인이 자기와 마음을 맞추지 않은것이 제일 섭섭했다. 그보다 자기의 그런 마음을 그가 모르고있는게 더 허전했다.
《마침입니다. 그렇잖아도 지배인동지를 만나 속을 털어놓고싶었습니다.》
이 순간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은 방금 출장떠나려고 할 때 찾아냈던 배치도였다. 신형일은 큰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