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10
사위가 어두워진 저녁 8시였다. 누군가 동뚝길로 올라오고있었다. 초생달이 구름장사이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동뚝으로 오르는 자태를 비치였다. 수려였다.
반시간전부터 먼저 나와 버드나무밑에서 서성거리던 천호는 빠른 걸음으로 마주 내려갔다. 강계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강시연을 만나 수려에게 련락을 보냈던 천호였다.
수려는 천호를 알아보자 약간 모로 돌아서더니 고개를 숙인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호는 개의치 않고 부랴부랴 웃옷을 벗어 잔디우에 폈다. 자기의 말을 정확히 전달해준 강시연에 대한 고마움과 오래간만에 수려를 보는 반가움이 앞섰다.
《자, 여기 좀 앉읍시다.》
그래도 수려는 앉을념을 않고 그채로 서있었다.
《수려동무, 그동안 동무가 보낸 쪽지를 받았습니다. 또 태인선생에게서 자료도 받았구요. 그리고 내가 없었던 사이에 동무가 분석한 자료를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는 우리의 시험이 성공할수 없습니다.》
《…》
수려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순간 천호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침묵이 마치나 녀자에게서 대단히 값높은 장식품이라도 되는듯이 오인한게 아닌가? 이렇게 말한마디 하지 않을바에야 무엇때문에 여기 나왔는가. 아버지가 전달했기때문에? 아니, 수려는 자기 마음에 없는 걸음을 할 그런 처녀가 아니다. 온몸을 감쌌던 따뜻한 감정이 사라지고 천호의 입에서는 그만에야 반발이 터져나왔다.
《수려동무, 우린 이번에 강계오리공장과 축산촌을 보면서 정말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동무도 같이 갔더라면 더 큰 충격을 받았을거요. 떠날 시각까지 안타까이 기다렸고 또 다리목에서는 우정 차를 세우고 기다리게 한 비서동지의 심정을 안다면 동무가 이렇게 행동하진 않을겁니다. 그런 일은 왜 생겼는가, 바로 동무 혼자서 시험을 하는 일방적인 행동때문에 생긴거요.》
아닐세라 수려가 얼굴을 들었다. 뽀잇한 달빛이 창백한 그의 얼굴을 또렷이 밝혀주었다.
《오늘은 얘기를 좀 합시다. 동무가 공장에서 연구사업을 하고 또 동무네 집이 이 두단땅에 있는데도 이 땅에 대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게 많소. 설마 아직도 동무의 아버지가 그 누구의 제기에 의해서 해임되고 여기 공장마을에 와서 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
《동무는 한 인간에 대해서,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것이 많소.》
수려가 몸을 돌리여 할깃 쳐다보았다. 당장에 부정이라도 할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보자 오히려 마음이 침착해졌다. 천호는 자기의 말을 이어갔다.
《동무도
《…》
《공장을 찾아오셨던
그런데도
《이제 뭐라고 했어요? 할아버지라구요?》
의혹어린 수려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건 수려가 처음으로 터친 목소리였다. 천호는 고개를 쳐들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두단령감>은 저의 친할아버집니다.》
《아니?!》
수려가 눈이 동그래서 굳어졌다.
《할아버지는
뿌리라도 내린듯 까딱않던 수려가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얼굴을 싸쥔 그는 숨도 안쉬는듯했다. 별안간 수려가 벌떡 일어나 동뚝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홀지에 천호는 멍청해졌다.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보면 사랑하는 사이의 청춘남녀들은 처녀가 달리면 총각은 의례히 따라가고 숨박곡질이나 하듯 하는것이 사랑의 한장면이지만 천호는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기네는 엄연히 그런 사이가 되지못한것같았다.
그러나 다음찰나 천호는 수려를 따라뛰였다. 아직 할 말을 다 못했던것이다.
수려를 따라잡은 천호는 들먹이는 가슴을 안은채 그앞을 떡 막아섰다.
수려는 어마지두 뒤로 물러섰다.
《수려동무, 아직 다 말하지 못한게 있소. 자, 이걸 받소.》
천호는 강계에서부터 수려를 생각하며 꼬바기 정리했던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그속에는 강계에서 보고 들은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그걸 보면 강계에로의 일정뿐아니라 그곳 지배인이 하던 말과 자료도 알수 있었다.
《거기에 사진도 있어서 그걸 보면 직접 가본 우리와 못지 않을거요.》
《이건…》
《어서 받소. 비서동지가 사진까지 다 생각해서 이렇게 자료가 구체적으로 될수 있었소.》
수려의 고개가 더 깊이 숙어졌다.
《수려동무, 여기 멀지 않은 곳에서
아무런 대답도 반박도 없이 수려는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천호앞을 물러났다.
천호는 사라지는 수려를 따라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몸을 떨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이인가.
그러나 버드나무밑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웃옷을 집어드는 천호의 가슴은 전에없이 개운했다. 수려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날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의 집도 만경대앞동네에 자리잡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