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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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니나다를가 명식은 레코드판을 이것저것 뒤적이기는 했으나 표지에 새겨진 사진이며 그림들을 보기만 할뿐 그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차곡차곡 꽂아놓는것이였다.

(그렇겠지 뭘!)

《그러나 미련이나 동정도 애매한 경우나 뜻하지 않는 경우에만 한하는거야. 그런데 그야 어디… 그래 넌 그렇게도 자존심이 없니? 그렇게도 사랑에 눈이 멀었느냐 말이다.》

《?!》

이 말을 듣는 순간 현옥이는 여태껏 자기 맘속에 도사리고있던 울분과 애써 극복하려고 하는 혐오감, 그것이 오빠에 대해선지 아니면 자기자신에 대해선지 알수 없는 그런 혐오감이 일시에 창끝처럼 고개를 추켜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구? 자존심이 없다구?)

《그래요, 전 사랑에 눈이 멀었어요, 자존심도 없구요. 그러니 어쨌단 말이예요, 그게 오빠와 무슨 상관이예요!》

고민이 없노라고 한 현옥이였으나 정작 오빠가 진호를 두고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한 말을 듣자 참을수가 없었다. 더우기 그런 감정을 자존심과 결부시켜 사랑에 눈이 먼 처녀의 미련한짓으로밖에 치부하지 않는데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던것이다.

《?…》

명식은 한동안 의외의 경우에만 나타내는 그런 표정, 량눈섭을 한군데 뫃고 눈살을 한껏 좁힌채 유심히 현옥이를 지켜보았다.

대체로 감정이라는것을 중시하지 않을뿐더러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오로지 합리적인것을 위해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현옥이의 심정을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감정이란 한갖 공정한 사색을 방해하는 불순물로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간들에게만 한하는 소유물이라는것이였다. 때문에 자기처럼 지극히 엄정한 사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불순물에 유혹되거나 희롱당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물론 결코 그런 권리조차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알면서도 잊지 못하겠다는거냐?》

의자를 책상옆에 끌어다붙인 명식은 한결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얘, 이걸 봐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없는 사실을 만들거나 그를 과장해서 나쁘게 보려는건 아니지 않니. 난 언제나 사실에 기초한 공정성, 이것을 사업에서나 생활에서 첫째가는 본분으로 여기고있어. 그가 너를 속인건 둘째로 치자,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니까. 우선 그는 우리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지켜야 할 일반적인 요구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냐. 우린 누구나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사회가 요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뿐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서 정보로만 걸어가야 하는거야. 〈앞으로 갓〉, 〈뒤로 돌앗〉하는 구령에 맞추어 정확히 행동해야 하며 전체의 대오에 지장이 없이 움직여야 한단 말이다. 우리의 대오란 조직이고 집단이니까,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욕망이야 다 있겠지.》

(욕망?)

현옥이의 머리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피뜩 떠올랐다.

(과연 오빠한테도 욕망이 있을가? 그런 충동을 한번만이라도 느껴보았을가?)

《하지만 그런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요구에 순응시켜야 하는거야. 제때에 아무 미련도 없이 말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집단에 비기면 티끌에 지나지 않으니까, 알겠니? 이게 바로 우리의 생활원칙이지. 그런데 그는 이 요구를 제멋대로 무시할뿐 아니라 자기가 대오내 한 성원이라는 자각조차 가지지 못하거던. 그래서 제 맘대로 삐여지는가 하면 남달리 행동하길 바라지. 결국 어떻게 됐니? 집단은 자기의 의사를 무시하는 그런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법이야.》

언제나 오빠의 말을 들을 때면 그런것처럼 이번에도 현옥이는 오빠의 론리앞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왜서인지 무작정 반발하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까보다도 더 야무진 소리로 대꾸했다.

《오빠가 말하는 그 자존심이 저에게 없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아직 그에 대한 미련이 증오로 바꿔질만치 그를 미워할순 없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앞에선 그에 대한 얘길 말아주세요, 더우기 비난만은 말이예요. 글쎄 어떻게 사람이 감정을 오빠가 요구하는것처럼 필요에 따라 가지기도 하고 버리기도 할수 있겠어요.》

《그것 참!》

명식은 다시금 고개를 기웃했다.

사업을 설계할 때나 도면을 분석할 때에는 그 과정에 있을수 있는 사소한 요소까지도 다 예견하고 해당한 대책을 세우는 명식이였으나 지금 현옥이를 대함에 있어서는 자기가 진호에 대해 면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즉 그런 사람을 두고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것을 증명하면 할수록 현옥이의 가슴에 도리여 진호에 대한 그리움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애달프게 여기게 만든다는것을 모르는것이였다.

《넌 바로 그런 하찮은 감정에 자신을 얽어매는게 탈이야. 그럼 도대체 네가 바라는건 뭐니?》

《바라는거라구요? 그래요, 전 지금도 그의 일이, 그의 연구사업이 잘되기만 바랄뿐이예요. 단지 그것뿐이예요.》

《연구사업?》

대뜸 아연한 눈길로 현옥이를 지켜보던 명식은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듯이 허구픈 웃음을 터뜨렸다.

《얘, 넌 그가 거기서 연구사로 일하는줄 아니? 아직도 새 연료를 연구하는줄 알아? 넌 어째서 아직도 그 새 연료안이 가망이 없다는걸 모르니? 그러니까 제철소에서도 그를 현장에 배치하지 않았겠니. 생산을 위한 공정기사로 말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지금 제철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알기나 하니? 이젠 그전보다 더 많은 중유가 공급되고있어. 말하자면 우리가 제기한대로 지금단계에선 새 연료의 취입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우에서도 시인했단 말이다.》

《?》

현옥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더 많은 중유라니?)

이 소식은 실로 현옥이에게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럼 그의 기술안이 지금 단계에선 정말 무리한것이란 말인가!)

저로서도 의심을 품고 이미부터 그 가능성에 대해 따지긴 했지만 정작 국가적인 조치까지 취해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다 더 가슴을 찌르는것은 그가 그처럼 대학때부터 고심해오던 일이 이젠 영영 막혀버렸다는 절망감이였다.

(그러니 그의 기술안이 아직은 한갖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이 아닌가!)

《이것만 놓고봐도 그의 기술안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것인지 명백하지 않니. 그러니까 너도 이젠 마음을 다잡고 자기 일에나 전념해라, 알겠지?》

명식의 얼굴에는 다시금 아까 방안에 들어설 때의 활기와 미소가 어리였다.

사실 그가 오늘따라 여느때없이 흡족해하는데는 여태껏 질질 끌어오던 ××설비의 심사를 무난히 끝내 위원회에 통과시켰다는데도 있지만 보다는 제철소에 중유가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데 있었다.

까다로운 설비의 심사를 맡아 끝낸것이 자기의 실무를 과시한것이라면 또 자신이 책임지고 한 연구사업의 결과를 당에 보고올려 중유를 공급받을수 있게 한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안목을 평가받는것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실무능력과 랭철한 안목, 심사일군에게서 가장 중요한 이 두가지를 최대의 수준에서 겸비하고있다는것이 이번 기회에 여실히 증명된것으로 하여 그는 특별히 만족스러운것이였다. 그런 기분으로 해서 그는 지금 현옥이가 겪고있는 고민도 별로 대수롭지 않는것으로만 여기는것이였다.

(일없어! 그런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니까. 상처란 첨엔 아프지만 아물기마련이거던. 한데 그건 상처라고도 할수 없지, 손톱이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은것이나 같으니까.)

그러나 소설책에 시선을 뫃고있는 현옥이의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활랑거렸다. 도무지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있을가? 희망을 잃고 절망에 잠겨있을가? 아니면 이젠 모든것을 단념하고 맡은 일이나 하고있을가? 후회하고있을가 아니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을가?)

그의 눈에는 또다시 아까부터 반복해읽던 그 대목, 《다음번 출장시에는 저에게 꼭 들려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하는 그 글줄이 안겨왔다.

그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 글줄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곱씹어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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