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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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랑을 따사로운 봄날에 꾸는 단꿈이라고 했던가, 그 누가 청춘기의 련정을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고 했던가.

그렇듯 달콤하고 그렇듯 열렬한것이기에 이르는 말이련만 현옥이에게는 그 말이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말로, 지어는 사랑이 아직 어떤것이라는것을 알지 못하는 자기같은 어리숙한 처녀를 파멸시키기 위한 독이 발린 미사려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야속하고 불이라기에는 또 너무나도 순간적인 자기의 사랑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 불이나 꿈이라기는커녕 눈깜박할 사이에 굴러떨어진 천길 아득한 낭떠러지가 아닐수 없었다.

(과연 사랑이 이런것이란 말인가! 이처럼 엄혹하고도 무자비한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그제야 그는 비로소 남들이 그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고 신비롭다고 하는 사랑의 무서운 리면, 즉 아름다운 반면에 가혹하고 고상한 반면에 심각하며 신비로운 반면에 더없이 독선적이기도 한 사랑의 리면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랑이란 자칫 잘못 다치면 산산쪼각이 나고마는 유리그릇과 같은거야. 아니, 물거품과 같은거지.)

진호와 헤여진지 근 한달이 되여오지만 아직도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혼자 더듬어볼수 있는 여유를 가질수가 없었다. 상혈된 눈에 모든 물체가 2중으로 보이듯이 그의 마음속에도 모든것이 2중으로만 헛갈리는것이였다. 자기가 무엇을 겁내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조차 분간할수 없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이를 때마다 그는 어떤 공포에 휩싸여 부랴부랴 그 생각을 머리에서 털어버리는것이였다. 그때면 오직 우울한 표정을 짓고 하던 진호의 마지막말만이 끝없이 머리속에 맴돌이칠뿐이였다.

《난 내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동무를 불안과 모험에 찬 길로 유혹하려고 했소. 하지만 이제라도 동무가 눈을 뜨고 똑바로 볼수 있게 된것을, 그리하여 험한 운명을 피할수 있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오.》

이 말이 상기될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무거운 탄식이 쏟아져나오군 했다.

자기가 그처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상상하던 그 의혹을 확인하여준 진호의 말은 그의 가슴에 혹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통만이 아니라 고통보다 몇배 더한 원한까지 새겨놓았다.

(어쩌면 나한테까지 그 사실을 숨겼을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상대에 대한 기만이 그 사랑을 거품으로 만든다는것을 몰랐단 말인가! 기만당한 상대방이 그 기만을 의식적으로 부정하면서까지 인위적인 감정을 품을수 없다는걸 몰랐단 말인가!)

어느모로 따져봐도 자기는 정당했고 그는 비렬했다. 누가 봐도 순진한 자신에 비해 그는 무례한 인간이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떻든간에 또 누가 옳고그른지간에 리유는 둘째치고 그와의 결렬이 가져다주는 고통만은 피할길이 없었다. 어떤탓으로 생겼던간에 또 누구의 잘못으로 받은 상처라 해도 역시 아픔은 아픔인것이다.

진호와 지낸 잊을수 없는 일들이 가슴을 저미는가 하면 그가 하던 한마디한마디의 말이 새삼스런 의미로 회고됐고 어쩌면 자기들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런 불행은 세상에서 유독 자기들만인것같아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자기 혼자 남게 된 순간에야 그는 자기가 얼마나 진호를 사랑하고있었는가 하는것을 절실히 느낄수 있었다. 요즘에 와서야 그는 자기가 어째서 그때 진호만 제철소에 보내고 자기 혼자 여기에, 그가 없는 여기에 남아있을수 있으며 그때의 자기 심정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랴 하는것을 미처 가늠해보지 못했는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가 옆에 있을 때에는 그에게 사실여부를 따지기도 하고 자신이 취할 태도를 랭정하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진호가 떠나간 지금에 와서는 마치 자기 육체의 한부분이 그대로 뭉청 떨어져나가 자기 혼자로서는 도저히 어떤 사색도 행동도 자유로이 할수 없는 그런 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자길 속인 이상 자기는 결코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할 그 어떤 도덕적인 의무도 없을뿐 아니라 응당 헤여질수밖에 없다고 단정했댔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런 생각대신 오히려 아무리 그가 자길 속였다 해도 어떻게 자기의 처지에서 그런 생각을 품을수 있었을가 하는 의혹까지 금할수 없는것이였다. 하지만 그는 가끔 그런 정신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쳐 놀라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내 잘못이 뭐길래 내가 고민하는거야. 내 잘못은 없어! 없지 않고, 어디까지나 죄를 지은건 내가 아니라 그니까.)

이러면서 자신을 랭철한 리성으로 다잡는것이였으나 일단 기름에 젖었던 물체가 물에 잘 젖지 않는것처럼 좀처럼 그 리성에 익숙되지 않는것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시적인 감정보다 리성에 의해 행동하기마련이지만 그 리성이 리성으로만 있을 때에는 즉 그 리성이 감정과 합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자신을 가지지 못하는것이다. 아무리 리성으로는 옳다고 여기는것도 감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리성은 그 자리에 굳어져버리던가 아니면 사멸되고마는 법인데 바로 지금 현옥의 경우가 그랬다. 아니, 현옥의 경우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동반하지 못해서라기보다 서로 상반돼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리성이 옳다고 고개를 추켜들면 들수록 그의 감정은 리성에 더 반발하는것이였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정신상태로 하여 그는 몇번이고 진호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쓸수가 없었다. 정작 편지지를 펼쳐놓기는 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그의 기만을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런 그를 원망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번민과 고통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미련을 적어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기의 처지가 아무리 정당한것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있을수는 없다는것을 똑똑히 느꼈으며 자기가 찾아낸 결론이외에 그와 못지 않는 아니, 그보다 더 강한 또 하나의 억센 힘이 자기를 조종하고있다는것을, 또 그 힘은 결코 자기가 바라는 안정만을 주지 않으리라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로 육박해오는 그 불가사의한 형체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것이였다.

오늘도 그는 책상에 마주앉아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소설책을 펴놓긴 했지만 그것은 한갖 자기의 고민을 가리우기 위한 위장물에 지나지 않았다. 때없이 방에 들어오군 하는 어머니가 빨래감을 찾는척 하기도 하고 필요도 없는 말을 시키면서 자기의 내면을 투시할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그 은근한 눈길을 마주볼 때면 저으기 당황하게 되는것이였다.

어머니앞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숨기기도 어려웠거니와 자기의 정신적고통을 읽고 괴로와할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언짢았던것이다.

…다음번 출장시에는 저에게 꼭 들려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

그의 눈에는 아까부터 몇번이고 반복해읽은 소설의 이 글줄이 다시금 밟혔다. 그것은 주인공이 누구에겐가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구절이였다.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의심치 않습니다. 도대체 뭘 의심하지 않는다는 소릴가?)

이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들어온 사람이 누구라는것을 곧 알아차린 현옥이였으나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여전히 책에만 시선을 쏟고있었다.

《또 소설책이냐?》

이렇게 묻는 오빠의 목소리가 여느때없는 활기에 넘쳐있다는것을 감촉하자 현옥은 어쩐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실 진호와의 결렬이 있은 후부터 은연중 오빠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수 없었던 현옥이였다. 따져보면 오빠의 말을 부인할 근거가 없는것은 물론 오히려 오빠로 하여 진호의 온당치 못한 새로운 측면을 깨닫게 되긴 했으나 어째선지 오빠를 마주할 때면 저절로 반감이 솟구치고 울화까지 겹치는것이였다. 마치 자기들사이를 이렇게 갈라놓고 서로 원한의 감정을 품게 만든 고통의 장본인이 바로 오빠인것처럼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자기옆으로 다가선 오빠가 소설책의 표지를 보려고 하는것을 한쪽으로 밀어치운 현옥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왔어요?》

《너하고 말좀 하자고 왔다.》

손가방에서 몇권의 신간기술번역잡지를 꺼내 책상우에 놓은 명식은 현옥이의 기색을 살피면서 천천히 전축옆에 있는 포의자에 몸을 실었다.

《무슨 말이예요? 전 별로 할말이 없는걸요.》

《할말이 없어? 그래 네가 요즘 고민하는건 뭐니? 어머닌 네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자지 못한다고 얼마나 걱정이신지 몰라. 바로 그걸 같이 얘기해보자고 왔어, 너도 이젠 모든걸 랭정하게 따져볼 여유가 생겼을테니 말이다.》

《저에겐 고민이라곤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죄다 마뜩지 않게 여길 현옥이라는것을 이미부터 짐작하고있던 명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고. 실상 그는 네가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은 못돼.》

제잡담 본론에 들어가면서 명식은 그런 문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닌것은 물론 론의할 가치조차 없는것이라는듯이 전축옆에 쌓여있는 레코드판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가슴이야 아프겠지, 너로선 진정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진정으로 사랑한 그가 너를 진심으로 대해주기는커녕 도리여 속였는데도 무엇때문에 고민하냐 말이다. 고민한다면 자길 속인 그에게 증오가 아니라 미련을 품고있는 나약한 자신에 대해 고민해야 옳지, 안 그렇니?》

현옥이는 오빠의 말에 점점 더 부아가 솟구쳤지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설사 대꾸를 한다 해도 틀림없이 오빠가 언제나처럼 해당한 론거를 가지고 자기를 옴짝 못하게 하리라는것을, 그러면 자기 맘이 더 고통스러우리라는것을 짐작하지 않을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말로는 음악에 꽤 관심이 있고 조예가 깊은것처럼 하지만 막상 음악을 감상하거나 거기에 쉼취해본적이라고는 없는 오빠라는것을 모르지 않는터여서 지금 오빠가 레코드판을 고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회전판우에는 올려놓지 않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 그 짐작이 옳은가 어떤가를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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