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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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뜬한 기분으로 두연원을 나서는데 땅에서 솟아난듯 은희가 나타났다.

그는 천호를 보자 뒤에 무엇을 감춘채 도르르 굴러오는것같이 다가와 발을 딱 모으고는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별로 재글재글 끓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거나 할 말이 있는 모양이였다. 원걸이가 슬며시 기웃거리려들자 은희가 할깃 눈을 흘기였다.

발가우리 익어가는 사과알같은 얼굴에 웃음을 함뿍 피우며 쳐다보는 바람에 천호는 《갑자기 무슨 일이야?》하고 벌쭉 웃었다.

은희만 보면 도무지 성을 낼수도 없어 같이 웃음을 피우군 했다.

《좋은 일이지요.》하고 뒤에 감췄던 손을 홀짝 앞으로 내밀었다. 보동보동한 손등만 보이고 손바닥에 있는건 여전히 감춘채였다. 그의 행동은 호기심을 바짝 올리였다.

《뭔데 그래?》

《그러지 말구 어서 내놓으라구.》 원걸이가 참지 못하고 또 참견하려 들었다.

《아이참, 거긴 좀 가만있을게지.》 이번에도 은희는 원걸이에게 할기죽거렸다. 그 모양이 귀엽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해서 천호는 허, 하고 고개를 젖혔다.

《값을 내야 됩니다.》

《값?》 왕청같이 오금을 박는 바람에 천호는 얼떨떨해졌다.

《이번 숙제에 건달오리고르기 일람표를 작성하게 되여있어요.》 은희가 온몸을 살래살래 흔들며 할끔거렸다. 건달오리란 먹이만 축내면서 알을 낳지 않고 밴들거리기만 하는 오리를 말한다.

《작성한걸 봐주지요?》

은희는 수의축산대학 가금과 통신수업을 받는데 아마 과제를 받은 모양이였다.

《그럼, 먼저 혼자서 해보고 그다음 가져오라구. 언제든지 봐주지.》

그제야 은희가 샐쭉 웃더니 손을 펴보였다. 몸집처럼 몽실몽실한 손바닥엔 네모나게 접은 납작한 쪽지편지가 있었다.

《이건?》

《연구사선생이 줬습니다. 아까 대학으로 가면서…》

그러며 은희가 장한 일을 한것같이 또 샐쭉 웃었다.

천호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태인이 편에 연구자료를 보내온건 두번이였다. 그러나 이번 쪽지는 전번것과는 벌써 보기부터 달랐다. 당장에 가슴이 설레였지만 그 자리에서 펴보기가 난처했다. 그렇다고 주머니에 넣기도 별나고. 은희 역시 눈치가 말짱했다. 싱겁게 기웃거리는 원걸을 툭 치더니 《아이, 눈치 없이, 어서 가요.》하고 그를 돌려세웠다.

천호는 더 어색해나서 소리쳤다.

《원걸동무, 같이 가자구.》

이번에도 은희가 대답했다. 《우린 먼저 가요-》

그들은 서로 한쌍이 되여 벌써 저만큼 앞섰다.

수려가 공장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천호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가 언제 나타날가. 하루 또 하루 기다리던 찰나 오늘은 이렇게 그가 보낸 쪽지편지를 받았다. 천호는 줌안에 든 쪽지를 이윽토록 내려다보았다. 네모지게 꼭꼭 접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릿어릿했다. 그의 체취가 어려있는 쪽지편지라고 생각하니 사뭇 가슴이 설레였다.

무슨 말을 썼을가. 선자리에서 쪽지를 펴나가는 천호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났다. 순간 천호는 굳어졌다.

학습장크기만 한 쪽지에는 단 두줄의 글이 씌여있었던것이다.

《털단백시험자료를 보냅니다. 도입해보십시오. 자료는 태인선생편에 보냅니다. 수려.》

천호는 글발을 내려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내용이 극히 간단했고 더우기 인사말조차 없었다. 극히 실무적인 글이였다.

이런 두줄짜리 글인줄도 모르고 은희는 장한 심부름이나 하는줄로 안 모양이였다. 마치 향단이나 되는것처럼.

홀지에 맥이 빠져 그 자리에 팍 주저앉고싶었다.

목욕을 하고 새옷을 갈아입은데다 맥주까지 마시였으나 오수가 배인 작업복을 벗지 못한 기분으로 되돌아갔다.

천호는 혼자 스적스적 자기가 시험사업을 하고있는 비육호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름없이 이제껏 진행한 시험사업일지를 번졌다. 무의식적이였다. 그는 다시 쪽지글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온 글인듯했다.

사실 수려가 돌아온 일을 두고 제일 기뻐한 사람은 천호였다. 그가 돌아왔다고 먼저 소식을 전하는 태인의 말을 듣고 천호는 수려를 기다렸다.

비오는 날에 정류소에서 랭랭히 쳐다보다가 뻐스에 올라 사라지는 수려를 보면서 천호는 아연했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수려인가. 하루하루 수려가 없는 생활을 보내는것은 공허하기 그지없었고 사는것자체가 무의미했다. 공장의 현대화라는 거창한 사업이 아니라면 쓰러진채 일어나지 못했을것이다.

그랬던 수려였다. 공장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밤 천호는 무너져내린 마음을 어루쓸며 그를 기다렸다. 온밤 일손을 잡지 못한채 서성거렸다.

이제 그가 나타나면 어떻게 맞이할가. 밥을 같이 나눠먹고는 둘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공상까지 했다. 그날처럼 곧장 만경봉으로 달리자고 할가. 아니, 그동안 뭘했는지 밤이 지새도록 끝없이 말을 나누고싶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은가.

밤은 점점 깊어갔다. 문소리가 나기만 하면 천호는 훌쩍훌쩍 일어나군 했다.

그러나 수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그제야 천호는 수려가 의도적으로 자기를 피한다는것을 알았다. 공장에 온건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후에야 그는 당비서가 수려가 있는 시험목장에까지 갔댔다는것을 알았다.

수려는 공과 사를 정확히 갈랐다. 자기가 천호네 연구조의 한 성원이라는것을 잊지 않고 사업상의 내용을 보고한것이다. 앞으로도 이런식으로 대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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