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12
(2)
대다수가 화려한 봄철옷들을 떨쳐입은 처녀들인데 첫눈에도 며칠전에 축하공연을 하러 내려온 중앙극장의 예술인들이라는것이 알렸다.
모두들 제모양대로 고운 얼굴을 쳐들고 참새처럼 재잘거리다가 빙그르르 돌아가는 장입기앞에서는 와 하고 비둘기같이 흩어지기도 했다. 어떤 처녀는 우람찬 동음에 기가 질려 두손을 귀에 갖다대며 몸을 옹송그리기까지 했다.
《허- 봄나비가 날아들었군그래.》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곧 《봄나비라니요? 물찬 제비같소이다. 낄낄…》 하는 괴상한 목소리가 되받았다.
이럴 때면 용해공들은 견학온 사람들이 그들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이기라도 한것처럼 눈살을 꼿꼿이 세우고 견학생들을 마주 바라보는것이였다.
대상에 따라 화제의 내용도 다른데 예술인쯤 되고보면 턱없는 롱담이 오가기마련이였다.
한 친구가 견학생대렬속에 있는 어떤 처녀를 가리키며 뭐라고 하자 모두들 일제히 그쪽을 주시했다. 아마 어느 가극을 주연한 배우라도 찾아낸 모양이였다.
모두들 그를 여겨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불만에 찬 영기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아니, 저 처녀가?》
이런 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견학생들을 마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그는 맨뒤에서 서로 팔을 끼고오는 두 처녀앞을 척 막아서는것이였다.
《동무!》
어느새 한손을 허리에 올린 영기는 제법 엄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눈이 올롱해진 처녀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동무 말이요!》
두 처녀중에서 입에 손수건을 대고있는 처녀를 가리킨 영기는 호령이나 하듯이 소리쳤다.
《여긴 신성한 용해장이란 말이요. 오염되지 않게 랭풍장치가 다 돼있으니 그 손수건을 입에서 떼시오, 당장.》
《녜?》
옆에 있던 처녀가 갑자기 방그레 웃으며 한걸음 나서는것이였다.
《아이참! 그런게 아니예요. 이 동문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예요. 방금 이발을 뽑았거던요. 안정해야 된다는걸 용해공들이 보고싶다고 기어이 따라나선거예요.》
《? …》
그처럼 도고하던 영기의 기세가 삽시에 한풀 꺾인것같았다.
《그러고보니 동무도 용해공이군요. 그렇지요?》
다시 방긋 하고 웃는 처녀의 입귀에 뽀얀 덧이가 드러나자 마음의 탕개가 풀어진 영기는 대번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처녀의 달콤한 미소도 미소였지만 용해공이 보고싶어 왔다는 말이 더욱 태도를 수습할수 없게 만든것이였다.
《그렇소! 내가 바로 용해공이요. 그런데 이발을 뽑았단 말이요? 벌레가 세게 먹었던 모양이구만. 어디 보기요.》
영기가 팔을 쳐들고 다가서자 처녀들은 질겁을 해서 달아났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용해공들은 물론 견학생들까지 배를 그러쥐고 웃어댔다.
《에- 고놈의 처녀가 살짝 웃는통에 고만…》
이러며 뒤더수기를 긁는 영기의 잔등을 용해공들은 서로마다 한대씩 우려댔다.
《메뚜기같은 녀석!》
로장도 시뭇이 웃으며 로쪽으로 돌아섰다.
《사기들이 났군그래!》
처녀들이 사라져간쪽에서 초급당비서 최상범이 흡족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오늘도 그는 언제나처럼 소금기가 내밴 꼬리가 빳빳이 쳐들린 작업복을 입고있었다. 시원시원한 생김새처럼 성격도 활달한 그였으나 롱담을 할 때만은 오히려 무뚝뚝해지군 하는 사람이였다.
《두물째요?》
그는 로앞에 모여있는 용해공들속에 끼여들며 누구에게라없이 물었다.
《웬걸요. 세물쨉니다.》
《벌써?》
《벌써라니요? 이젠〈고기반찬〉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사실 요즘은 어느 로에서나 주는대로 먹어치운다. 먹을뿐 아니라 트림 한번 하는 일없이 깨끗이 소화시켜서는 특강만 쏟아놓는다.
쇠물이 왜 안 나오느냐고 용해장에 대고 삿대질을 하던 조괴공, 남비공들이 도리여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좀 작작 갈길노릇이지 하루 세번이 뭐야!》
《여태〈변비〉에 시달린 봉창일세.》
《그래도 자리야 봐가며 갈겨야지.》
《그럼 밑구멍을 막으라나?》
《틀어막게!》
《헤― 입으루 게우라구?》
이들의 걸죽한 롱에도 여느때없이 쏟아지는 쇠물에 대한 기쁨이 어려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것처럼 좋아해야 할 아니, 누구보다도 더 기뻐해야 할 상범이였으나 그는 요즘 도리여 어떤 불안에 휩싸여있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내지 않으려나 하는 걱정이거나 어느 공정이 제때에 따라서지 못해서 생산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나 하는 위구때문이
아니였다. 어째선지 이번엔 저로서도 첨 느끼는 불안, 언제나 그렇게 되길 바라게 되고 또 그것을 위해
생산을 따질 때면 먼저 로동자들의 열의를 가늠했고 그 열의를 가늠하기에 앞서
한데 최근에는 그 공식에 부합되지 않는 실수치가 나타나는것이였다. 말하자면 자기와 로동자와 생산이라는 세개의 지수에서 자기라는 수가 응당한 크기가 아닌데도 로동자들의 기세는 높고 생산은 오르는것이였다.
언제나 자기의 지수가 크다고 여겨도 생산은 그만큼 오르지 못하는것이 일반적인 실태인데 지금은 반대현상이 나타나고있는것이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것을 만족으로, 지어는 자기 사업의 성과로까지 여길지 몰라도 우연과 요행을 경계하고 오로지 자기 노력의 대가만을 받아들이는데 버릇된 그는 도저히 정상으로 느낄수가 없었다.
중유를 맘대로 쓰기때문에 사기가 높고 생산이 오른다!
그럴수 있고 또 설사 그렇다 해도 이렇게만 리해하고 만족해한다면 자기는 벌써 아무런 가치도, 필요도 없는 일군이 아닐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땐 자기가 훌륭한 금속을 졸이는 유능한 용해공처럼 대중들을
최근 분위기를 통해 이런걸 느낀 그였으나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이런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겠는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일이 안될 때뿐만아니라 잘될 때에도 대중들을 교양해야 하며 그때의 교양이 몇배 더 어렵고 힘들다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어떻소? 〈고기〉맛이.》
로장한테 다가서며 이렇게 한마디 비친 그는 보안경으로 로안을 들여다보다가 제 먼저 환성을 질렀다.
《어이구, 확실히 색갈부터 다르구만. 저 화염을 보지? 아주 막 새하얗군그래. 역시 그놈의〈고기〉가 맥을 쓰긴 쓰는구만.》
《고기》란 중유를 이르는 용해공들의 은어였다.
《그렇잖소?》
그는 자기 생각을 흔히 자기의 견해와는 반대되는쪽을 옹호하는 립장에서 말하군 했다.
《왜 지내 먹을가봐 걱정이요?》
비서의 속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우택은 담배를 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걱정이라니? 난〈고기〉냄새만 맡아도 그저 기운이 부쩍부쩍 솟는단 말이요.》
다시 비서를 흘끔 치떠본 우택은 (허― 이 량반이 몹시 초조했군!) 하고 생각했다.
비서의 이런 태도는 흔히 불만을 느낄 때, 그것도 다른 사람때문이 아니라 자기
《걱정 마우. 지내 먹어〈고혈압〉에 걸리진 않을테니.》
《고혈압?》
과연 이것이 고혈압정도겠는가!
생산이 바쁘면 자재와 원료는 물론 연료까지도 다 국가에서 대준다. 우린 그저 팔짱을 끼고있다가 깡만 뽑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생산의 주인인 우리의 몫은 뭐란 말인가! 이런 맹목적이고 무책임한 관념에 젖어드는데 어떻게 이것을 《고혈압》에 비기겠는가! 이것은 《고혈압》보다 더한 불치의 《암》으로까지 확대될수도 있다.
오직 자기들이 없으면 일이 안되며 어떤 불리한 조건에서도 주인들인 자기가 생산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드팀없는 자각을 가지게 해야 하며 그것만이 참된 로동계급의 자세라는것을 잠시도 잊게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무엇을 통해 깨닫게 할것인가! 어떻게 해야 상승일로로 줄달음칠 이 《고혈압》 아니, 점점 더 커져가는 《종양》을 막을것인가!
《획!》
무슨 징후를 발견했는지 우택은 아래입술을 비틀면서 야무진 휘파람소리를 냈다. 장입기를 부르는 소리였다.
환갑나이에 이른 그가 이런짓을 하는것이 어색할것같았으나 도리여 깊숙이 숨어있던 젊음이 되살아나는것같아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인 그는 얼른 정수리를 꾹꾹 짚어보였다. 생석회를 장입하되 가운데문으로 강욕중심에다 하라는 지시였다.
용해장에서는 일체 작업이 그의 손짓에 의해 진행되는데 주먹을 들어보이면 광석을 넣으라는것이고 손으로 나사를 트는 시늉을 해보이면 용선을 먹이라는것이였다. 손바닥으로 칼질을 하면 시료분석을 보내라는것이고 두주먹을 맞부딪치면 출강구를 막으라는 지시였다.
이런 동작에 습관된 나머지 어떤 친구들은 출근이 늦어졌을 때까지도 말대신 눈을 까뒤집어보이며 늦잠을 잤다는 시늉을 했다.
《왜 신입공이 보이지 않소?》
현장에 진호가 없다는것을 안 상범은 옆에 있는 한 용해공에게 물었다.
《말도 마십시오.》
《왜?》
《글쎄 밤엔 선별장이요, 공업시험소요 저 부두가에 있는 연료적재장까지 메주밟듯 돌아치다가 낮엔 낮대로 꼬박 로에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라 근 한달쨉니다. 어저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무슨 얘길 신이 나서 하던 그가 잠잠하길래 돌아보니 웬걸 졸고있는게 아닙니까. 그러다가 무슨 사고를 낼것같습니다.》
상범은 그를 직장열담당공정기사로 일하게 하면서도 기술안연구는 2호로에서 하도록 했던것이다. 믿음직한 로장밑에 있게 하고싶어서 그렇게 결심한것이였으나 본인도 어째선지 꼭 2호에서 하겠다는것이였다.
새 연료안에 대한 연구를 승낙하긴 했으나 미타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미 숱한 사람들이 내려와 연료연구를 할 때마다 온갖 방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는데 그는 외토리인데다가 더우기 이미 내려와 연구하던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경험도 없는 대학졸업생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상범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더없이 대견하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기웃거려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