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11

(3)

 

점점 낯빛이 창백해지는 진호를 여겨보며 태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언제나 모순된 문제성만 옹호해나서던 그가 이젠 필요한 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신심을 느끼고있을뿐 아니라 거기에 한몸바칠 불같은 각오에 충만돼있는것이 아닌가!

《좋아!》

태수는 그의 어깨를 철썩 갈겼다.

《진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똑똑히 보여주게, 경기때처럼 말이야. 응, 자- 그 소원이 성취되길 바래서!》

태수는 잔을 들어보였다.

《그래, 직장사람들은 마음에 듭데?》

잔을 비운 태수는 화제를 옮길 생각으로 이렇게 물었다.

《누구 말인가, 비서? 좀 무뚝뚝해뵈더군.》

《하긴 그렇기도 해. 바탕이 용해공이였으니까. 로행정도 환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은 그보다 더 잘 들여다본다네. 어떨 땐 너무 속속들이 꿰뚫어봐서 막 화가 날 때도 있지.

그의 버릇이 뭔지 아나? 언제나 자기가 먼저 론증을 해놓고는 반박을 기다리는거야. 만일 자기를 꼼짝 못하게 반박을 가하면 좋아하지만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하면 오히려 성을 내거던.》

진호는 《반갑소. 어디 같이 한번 일해보기요.》 하면서도 도대체 몇푼이나 되는가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듯이 깔끔한 눈길로 훑어보던 비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 누구보다 책임기사가 맘에 들더군! 그 나이에 책임기사라니 보통친구가 아닌 모양이지?》

생선회를 씹느라고 입을 우물거리던 태수는 대답대신 제꺽 세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벌써 세개의 기술안을 현장에 도입했는데 그중 두개는 발명권까지 받았다네. 남다른 재간에 일욕심까지 있어서 제철소에선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지. 거기다가 생기긴 또 얼마나 곱살하게 생겼나? 그래서 숱한 처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군 하지만 그에겐 언제나 시기상조라네.》

《그건 왜?》

태수는 벌쭉 웃었다.

《〈남아 이십 미평국이면 후세수칭 대장부리요〉하는 시조를 알지? 남이의 시 말이야. 그게 그에게는 〈남아 이십 미현국이면 후세수칭 과학도리요〉라고 읊히운다네. 말하자면 이십대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과학자로 인정하겠는가 하는거지. 새색시처럼 얌전해뵈지만 속에는 그런 만만찮은 투지를 품고있는 대장부야. 알겠나? 지금도 무슨 열관리개선에 대한 기술안을 연구하고있는데 뭐 중유를 절약하는 안이라던가?》

《중유를 절약하는 안?》

진호는 저도 모르게 태수의 말을 되받아외웠다.

《하여간 뭘 어떻게 해서 중유소비기준을 떨군다는건데… 아-니, 그러고보니 동무 기술안과 비슷하군그래. 응?》

그제야 태수도 굳어졌다.

커다란 충격이 진호의 온몸을 휩쌌다. 어떤 원리에 의한 기술안일가?

《어디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쨌든 이미부터 그 기술안이 숱한 사람들의 관심속에 있는것만은 사실이네.》

어떤 새로운 흥분에 휘말린 진호는 책임기사에 대한 놀라움을 더욱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입안에 쏟아넣었다.

《어쨌든 첫인상은 괜찮았네. 비서도 그렇고 책임기사도 말이야. 아무렴 동무네 과장같은 사람이겠나?》

《과장이라니?》

《그 뚱뚱보 말이야. 전화를 받으면서 어찌나 을러대는지, 원…》

한참 눈알을 굴리던 태수가 갑자기 방바닥을 내려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그 친군 과장이 아니라 며칠전에 온 햇내기야.》

눈에 고인 눈물을 씻으며 그는 계속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같이 있으면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해서 가슴이 다 답답하지, 그래서 우린 〈송풍기〉라고…》

《송풍기? 하하.》

진호도 고개를 쳐들고 온몸을 들썩거렸다.

안주접시를 들고 들어오던 은심은 너무도 호탕하게 웃어대는 두 사내의 모습에 놀랐으나 저 역시 곧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그런데 이쪽 문젠 어쩔셈인가?》

진호의 표정이 밝아진것을 보고 태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그가 이렇게 우연한 말처럼 물은것은 그만큼 그것이 궁금했고 중요했기때문이며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거니와 진호가 괴로와하리라는 생각으로 하여 묻지 않는다면 그의 맘이 더 괴로우리라는것을 알기때문이였다.

《뭘 말인가?》

태수가 무엇을 묻는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진호는 이렇게 되물었다.

《현옥동무문제 말이야. 말하자면 의문분가 아니면 휴지분가 하는거야.》

태수는 진호의 말을 들으면서 명식이에 대한 불만은 끝이 없었으나 현옥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사이가 이렇게까지 버성겨진게 명식이도 명식이지만 진호의 지나친 과단성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것이다.

대학시절 현옥이에 대해 느끼던 인상때문인지 아니면 진호가 그런 선고는 했지만 맘속으로는 결코 그를 그처럼 타기해마지 않을 처녀로까지는 치부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선지 어쨌든 그는 이들의 관계가 못내 아쉽게만 생각되는것이였다.

《헛참! 장가를 들더니 의심이 많아졌군그래! 휴지부도 의문부도 아니야. 깨끗한 종지불세.》

《제길! 이렇게도 한심한 친구라구야.》

태수는 대뜸 눈을 흘겨붙였다.

《동무같은 주제에 그런 처녀를 다시 만날것같아?》

태수는 진호의 성격이 남달리 명확하고도 단순한것으로 하여 좋아했으나 어떨 때는 도가 넘어 심중성조차도 소심성으로 치부해버리는 점만은 더없이 안타까왔다. 대학때도 《세상만사가 다 동무뜻대로 된다 해도 처녀 하나만은 안될걸.》하고 자주 놀려대군 했었다.

《그건 왜?》

《동무가 바라는것처럼 그렇게 완전무결한 처녀가 세상에 있어야 말이지.》

그때마다 진호는 자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처녀를 찾아내고야말테니 두고보라고 장담을 했었다. 정말 그런 처녀를 찾아냈는가 했더니 웬걸…

《아무래도 동문 안되겠어, 훌륭한 처녀는 고사하고 곱사등이조차도 동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알고는 당장 뺑소니치고말걸세.》

《아니, 그거야 너무하지 않나!》

《너무하긴 뭐가 너무하다는거야! 이것 보게, 흔히 사랑하느라면 서로의 행동을 지나치게 보고 관계를 첨예하게 만들 때도 있지 않나. 그게 사랑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것조차 리해를 못하니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지나치게? 그래, 동문 그가 날 지나치게 봤다고 생각하나? 있을수 있는 일로 생각해?》

단호히 고개를 젓던 진호는 갑자기 한숨을 내뿜었다.

《나도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좋겠네. 의심에 싸여있을 땐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그러나 그게 아니야. 그는 그이상 더 날 모욕하고 배반할수 없는 행동을 한걸세. 어쨌든 이젠 명백한 일이네. 안개속에 있는 배를 보고 바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중에 배라는것을 안 다음에 어떻게 그걸 다시 바위로 볼수 있겠나 말일세. 난 이번에 진정이란 생활에서는 물론 사랑에서도 필수적인 선결조건이여서 그것을 리해하지 못할 땐 사랑도 그에 반작용하기마련이라는걸 똑똑히 깨달았네.》

확실히 그는 자기자신을 더없는 멸시와 모욕을 받은 인간으로, 나아가서는 그 굴욕을 씻을 가능성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치부했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렇듯 확고하던 자기의 포부와 희망을 졸지에 허망한것으로, 무의미한것으로 일축해버린 현옥이가 괘씸해서 견딜수 없는것이였다.

《그게 탈이야. 그게 바로 동무의 결함이거던. 동문 우리 생활이 자기가 바라는것처럼 순수하기만을 원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니?》

진호의 눈은 대번에 번쩍하는 빛을 뿜었다. 어찌보면 살벌하기까지 했다.

《바로 그거네! 난 바로 그걸, 동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있는 그걸 부정하자는걸세. 그게 틀렸다는걸 증명하고야말겠단 말일세. 지금 일부 사람들속에서 아무리 옳아도 옳은것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곡해되고 비난받는 원인이 바로 동무처럼 생각하기때문이라고 보는거네. 순수하지 못한 오물들이 진리를 가리우고있기때문이라고 말일세. 그래 그것들이 진리를 가리울수 있나? 가리워야 하나 말일세. 난 오직 순수한것만이, 가장 깨끗한 량심만이 승리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고야말테네. 그 진리가 누구한테 있는가 하는걸 똑똑히 실증해보일테란 말이네. 현옥이한테, 그 오빠한테 아니, 온 세상사람들한테. 그래, 내가 그만한 힘도 없을줄 아나? 사실 그만한 힘도 없이야 도대체 내한테 젊음이라는게 있어 무엇하겠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확고한 의지에 넘치다못해 어떤 처절한 비분까지 어려있었다.

그 목소리만 듣고도 태수는 진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또 어떤 결심을 품고있는지 충분한 짐작이 갔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둘 다 자기들이 만나자마자 대학때 하던 버릇대로 또 론쟁에 열을 올리고있다는것을 생각하고는 곧 침묵을 지켰다.

저가락을 집어든 진호는 부지런히 안주를 집었다. 어느새 방금 들여온 생선회 한접시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런 그의 행동이 마음속에서 이는 어떤 격정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것을 태수는 알았다.

《허, 이런 걸구라구야. 닥치는대로 냠냠일세그려!》

《…》

진호는 여전히 저가락만 놀려댔다.

《난 아까 동무를 기다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태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생활은 언제나 3월에 시작된다고 말일세. 우리가 서로 알게 되여 가슴들먹이며 수도의 야경을 바라보던 그때도 3월이였지. 그런데 또다시 이렇게 만나 3월에 새생활을 시작하게 됐으니… 결국 3월은 우리의 달이네. 안 그런가?》

3월! 확실히 그것은 희망을 예고하는 계획과 기쁨의 계절이였다.

진호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리라는 계획들이 머리에 떠오르는듯한감이 들었다.

(그래, 이제부터야말로 새생활이 시작되는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 그는 새삼스런 눈길로 화광에 타오르는 제철소의 밤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