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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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안은 더욱 알뜰했다.

전실을 사이에 두고 아래웃방이 갈라져있는데 웃방은 주로 태수에게 필요한 책상과 책장, 침대가 놓여있고 아래방에는 옷장과 재봉이 있었다. TV와 갖가지 화분들이 놓여있는 전실에는 제도판이며 설계도구까지 설치돼있어 제법 기사가정의 품위가 여실히 느껴졌다.

《뭐 좀 없소? 아무거나 있는대로 가져오오.》

갓 살림을 꾸린 세대주가 흔히 그런것처럼 태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호령하는듯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이런 태도로 미루어보아 진호는 아직 한번도 태수가 안해에게 곰살궂게 군 일이 없으며 또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그리고 은심이의 행복에 겨운 모습, 조용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행동거지는 그가 아련한 녀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 사랑스런 꼬마를 다루듯 그렇듯 수월히 또 재미와 존경을 가지고 남편을 대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진호는 이들의 모습에서 신선하고도 청신한 향기를 풍기며 잎이 피기 시작하는 한쌍의 백양나무를 보는듯한감을 느꼈다.

웃방 태수의 책상에 마주앉은 진호는 무심결 유리판밑에 깔아둔 종이장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자기가 수행해야 할 과제며 계획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무수한 색갈로 그려진 동그라미며 삼각표식을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전기에라도 감전된것같았다.

그처럼 자기가 꿈꾸던 일, 현옥이와 함께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그 생활이 자기한테서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친구의 생활에 꽃피고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자 저절로 가슴이 메여오르는것이였다. 반갑다고 해야 할지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수 없는 심정이였다.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시선이 자꾸만 그리로 쏠리는것같아 그는 아예 방바닥에 내려앉고말았다.

《자- 이젠 좀 차근차근 얘기해봐.》

이제까지 한 말은 모두 가식에 지나지 않고 이제부터야말로 진짜라는듯이 태수는 진호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지금 태수는 그사이 진호가 어떻게 지냈으며 또 어떻게 예고도 없이 불시에 내려오게 되였는가를 알고싶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기가 겪은 생활, 한두마디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벅찬 사건들이 새로운 의미로 회고되는것이여서 그것들을 어떻게 다 펼쳐보일가 하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아니, 눈이 더 나빠진게 안야? 그전보다 더 자주 깜빡이는군!》

《뭐 일없네!》

어느새 상을 차려 든 은심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자개가 박힌 네모난 상우에는 락화생이며 조개따위의 마른 안주와 함께 보기드문 생선회까지 올라있었다.

《이건 또 뭔가?》

《상봉을 축하해서지.》

상을 받아놓은 태수는 두손을 마주 비벼대며 싱글벙글했다.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어 미안해요.》

미리부터 준비한것이 틀림없었으나 은심이는 녀성일반이 그렇듯이 자기 솜씨는 좀더 우월한데 바삐 서두르다나니 이렇게밖에는 차리지 못했다는듯한, 그러면서도 은근히 주부의 능력을 과시한것을 못내 만족해하는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것이였다.

《난 동무가 아무때건 이리로 오리란걸 알았어. 그 따분한 장벽을 뚫고야말리라는걸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강철직장을 택했나?》

은심이가 부엌으로 내려가자 태수는 진호의 잔에 맥주를 부으며 이렇게 물었다.

《왜 내가 거길 내놓고, 그 깡철직장을 내놓고 어딜 간단 말인가?》

진호는 일부러 공장지도원의 흉내를 내여 《깡》이라고 발음해보았다. 그러자 우습긴 하면서도 무척 친숙한감이 드는것이였다.

《아니! 내 말은 호케이선수가 불바다에 뛰여들었으니 하는 말일세. 얼음과 용금을 합쳐보게. 어떻게 되나? 폭발일세. 그것도 굉장한 폭발! 야금이 불과 물의 과학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상극이거던.》

《하하.》

오래간만에 가슴을 터놓고 웃어보느라니 진호는 자기에게 닥쳐온 새 생활에 대한 환희와 함께 이미 지나간 생활의 구슬픈 선률이 한데 엉켜 어쩐지 가슴이 멨다. 그러면서 태수한테야말로 자기가 이제껏 겪은 모든 일들,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들을 다 털어놓을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진호의 얘기를 다 듣고난 태수는 그를 무척 위로해주고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그는 자기가 진호한테서 이런 련민의 정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자 가슴속에 그 어떤 모순된 감정, 이를테면 진호에 대한 동정과 그의 행동에 대한 열렬한 공감은 금할수 없으면서도 그가 자기의 지향을 고집한탓으로 의심받은 부당한 생활에 비하면 자기가 걸어온 길은 너무도 뚜렷하고 줄기찬것이였다는 긍지가 솟구쳐오르는것이였다.

사업을 놓고보나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자기가 행복하다는 의식은 그것을 바랐으면서도 이룩하지 못한 진호에게는 불쾌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기 생활에 대해서는 될수록 비치지 않으려고 맘먹었다.

《그래 이번엔 그 새 연료가 자신이 있나?》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생성물처리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네만 보다 중요한 온도만은 아직도 부족점이 많아. 전번 실패도 바로 열부족에 있었거던. 겨우 1 650°정도니까 아직 150°는 더 올려야 하네.》

《아니, 아직도 150°나?》

태수는 버럭 어성을 높였다. 그런데는 어딘가 락심해하는듯한 진호의 태도가 불만스러웠기때문이였다.

이럴 때 진호의 의기를 돋구어주기 위해선 어떤 양념을 쳐야 한다는것을 알고있고 또 격하기 잘하는 그의 버릇을 오래간만에 즐겨보고싶어진 태수는 이번에도 틀림없이 자기의 계책에 말려들리라는것을 느끼며 곧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긴 하겠지만 아직도 그 정도라면 이제라도 다른 과제를 잡는게 어때?》

《왜?》

《숱한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얼마나 씨름했게? 작년에도 그 연구집단이 반년이나 내려와있지 않았나. 그런데도 결국 허탕이였거던.》

《흠! 그들이 뭐라구!》

진호의 눈이 꼿꼿해지는것을 보며 태수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그들이 동무보다야 훨씬 선생이 아닌가! 그들에 비하면 동문 초학도에 지나지 않지.》

《하긴 그럴수도 있지. 그들이 나보다 아는거야 많겠지. 경험도 있고.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걸 내가 알아낸것도 있단 말일세. 그들은 새 연료자체 그 하나만 가지고 취입하려고 했거던. 말하자면 새 연료에 첨가제를 배합하려 하진 못했단 말이네. 여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내가 대학기간 3년을 괜히 첨가제 하나에 몰두한줄 아나? 그들은 단지 어떤 기성원리가 있으면 그걸 현실에 적용해보려고 할따름이야. 마치 하나의 나무모를 지고 다니면서 여기는 땅이 나빠 안되오, 여긴 물이 없소 하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처럼 말이야. 문젠 나무에 맞는 땅을 찾을게 아니라 그런 땅에 맞는 나무모를 키워야 한다는데 있지. 난 나의 첨가제야말로 아직 부족점이 있긴 하지만 거기에 맞는 그런것이라고 생각하네. 자- 보라구. 여기에 9천카로리의 중유가 있네. 그리고 여기엔 6천카로리밖에 안되는 연료가 있고. 그래 이 연료가 어떻게 중유만한 열량을 담보한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그들이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왜 알기야 하지.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직 그렇게 도입한 실례가 없으니까 시도하지 않는걸세. 그들에겐 기성의 전례와 경험이 활동기준으로 돼있단 말이네. 어쨌든 기본고리는 이 첨가제네. 이 첨가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있지. 이걸 보게. 이게 연료네. 그런데 여기다 이 첨가제를.》

《아니, 가만! 양념이야 쳐얄게 아닌가!》

앞에 놓인 양념접시를 집어옮기려고 하는 진호의 손을 멈추며 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난 중유를 제철소에 먼저 주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는 순간 가슴이 미여지는것같았네. 그 사랑이 너무도 고마와 눈물이 나다가도 어떤 죄책감으로 하여 울수조차 없더란 말일세. 그이께서 그런 걱정을 하시는데도 과학자며 연구사들이 그 무슨 사정이요, 조건이요 하고 손꼽아 렬거하는 리유들에 대해 반감이 치밀어 견딜수가 있어야지. 아니, 그보다 내자신이 여태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또 어떻게 태평스레 하루하루를 살아올수 있었는지 리해할수가 없더란 말일세.

사실 우리야 그이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교육받지 않았나. 교육은 둘째치고 여태껏 받은 사랑에 뭔가 하나라도 해놓은 일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난 그때에야 내 심장이 녹쓴 파철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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