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10
(2)
《책임기사동무!》
이때 뒤에서 책임기사를 찾는 챙챙한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몇번이나 찾아야 해요. 정말!》
도면말이를 내미는 처녀의 두눈에는 웃음인지 노여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기색이 어려있었다. 보매 무슨 의견이 있어서라기보다 언제나 그런 태도에 습관돼있는 처녀같았다.
《벌써 다 고쳤소?》
《고치지 않구요.》
《주오, 내 인차 볼테니.》
《언제까지요.》
《래일은 설비점검이 있으니까 모레까지 보도록 하지!》
《모레요? 안돼요! 래일까지 꼭 봐줘야 해요.》
《래일?》
응당 자기는 그런 요구를 할수 있다는
《할수 없지.》
그제야 처녀는 방긋 웃었다.
《그럼 부탁하겠어요. 꼭!》
《참! 정아동무!》
뒤로 돌아서는 처녀를 불러세운 책임기사는 진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하오, 우리 직장에 새로 배치돼온 기사동무요.》
《그래요? 전 또…》
무슨 말인가 하려던 처녀였으나 곧 고개를 숙이며 정색을 했다.
《윤정압니다.》
그는 살그머니 진호를 쳐다보다가 눈을 깜빡했는데 그 눈은 마치 스위치를 켰을 때의 전등처럼 반짝하고 빛을 뿜는것이였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책임기사가 말했다.
《작년에 공장대학을 졸업했는데 전기부문을 담당한 공정기사지요. 얼마나 극성인지… 그만하면 능력도 있구요. 잠간 저쪽으로 갑시다.》
그는 갑자기 현장을 가로질러 2호로옆에 세워놓은 커다란 설비앞으로 진호를 이끌었다.
《이게 바로 이번에 새로 만든 투사깁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진호는 그가 아까부터 이 기계를 자기한테 소개하려고 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삽질을 대신하는 기곈데 이 투사기로 해서 이젠 용해장에서 삽이 없어졌지요. 실로 커다란 혁신이 아닐수 없지요. 현실장한테 심사를 의뢰한것이 바로 이 기곕니다.》
(그래서 삽질하는데가 없었구나.)
실상 삽질은 용해공들에게 있어서 그중 힘든 육체로동일뿐 아니라 고열작업이였다. 쇠물에 침식된 로벽을 보강하는것이 무척 까다롭고도 세밀한 작업이여서 여러 차례 기계화를 시도했댔으나 빈번히 성과가 없었다는것을 진호도 이미부터 알고있었다.
(대단한걸?)
평로에 새 력사를 불러온 기계, 언젠가 자기를 그토록 망신시킨 그 삽질을 대신하는 기계를 진호는 놀라운 눈길로 살펴보았다.
원료장입실에서 흘러내리는 보수재가 여러개의 완충장치들과 교반이바퀴의 조절에 의해 압축공기로 투사될수 있게 만들어진 매우 정교한 설비였다. 육중한 설비이긴 했으나 아무때나 손쉽게 이동시킬수 있게 밑에는 고무바퀴까지 달려있어 얼핏 보면 멋진 기동포를 련상시켰다.
《도기술경연에선 1등을 했는데 부에선 뭐라겠는지… 아마 부에서도 괜찮은 평일겝니다. 우선 용해공들이 다 좋아하니까요.》
《그러니 이건 집체작인가요?》
《웬걸요, 태수라고 기술부에 있는 동문데 숱한 고생을 했지요.》
《태수요?》
진호는 대번에 두눈을 흡떴다.
(아니 태수가? 그래! 편지에 분명 1등을 했다고 했댔어! 그럼 정말 이걸 그가?)
《태수동물 압니까?》
진호의 태도에 책임기사도 반색을 지으며 물었다.
《알다마다, 서로 막역한 사이지요. 대학때부터 말입니다. 원래 이리로 같이 오려고 했댔는데 내가 그만 한발 늦었지요. 한데 이게 정말 태수의 창안품이란 말입니까? 편지를 받긴 했지만 이런 훌륭한 설비일줄은 미처…》
《두달을 꼬박 현장에서 밝혔습니다. 밤낮 〈제길, 제길〉 하면서 말입니다.》
진호는 큰소리로 웃지 않을수 없었다.
《제길》이라는건 불만스러울 때는 물론 즐거울 때까지도 태수가 버릇처럼 입에 붙이고다니는 말이였던것이다.
(이 친구가 정말 대단한걸 제꼈는걸… 왜 그처럼 우쭐해하는가 했더니… 하긴 이쯤한것이면 백번이라도 자랑할수 있지. 어쨌든 내가 단단히 한꼴 먹었어.)
내심 더없이 기쁘고 놀라왔으나 책임기사앞에서 환성을 지른다는것이 어딘가 자존심이 꺾이는 노릇같았고 그렇다고 짐짓 입을 다물고있자니 또 친구의 성과에 지내 랭담한것처럼 여겨져 어떤 태도를 취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진호는 투사기의 구조며 작용원리들을 구체적으로 뜯어보기 시작했다.
(흠! 그렇지! 그래! 그 덜렁바우가 이런 기발한 착상을 다하다니?)
《그러니까 그 친구가 이것때문에 현장에 나와있었는가요?》
《…》
고개를 들고보니 책임기사는 벌써 옆에 없었다.
어느새 로앞에 가있는 그가 용해공들과 이쪽을 보며 뭐라고 하는데 분명 자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있는것같았다. 그들에게서 태수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싶었으나 진호는 그리로 다가갈수가 없었다.
온 용해장을 망질하듯 돌아가는 장입기가 불안스러워서였다. 어떤 구간을 왕복하거나 가락맞게 움직이는것이 아니라 방향을 잡을수 없이 마구 휩쓸며 돌아가는것이여서 잠간만 눈을 팔아도 어느새 포신같이 어마어마한 팔이 뒤통수를 겨누고 스르르 다가서는것이였다. 그러나 책임기사나 용해공들은 불안은커녕 자기들 얘기에만 정신이 없다가도 그 육중한 동체가 다가설 때면 보지 않고도 한발씩 옮겨 그 위험을 쉽사리 극복하는것이였다. 마치 그들의 몸에는 예민한 촉수가 뻗어있어 이런 위험을 미리 다 예감하는것같았다.
진호는 책임기사와 마주서서 얘기하는 늙은 용해공에게 시선이 멎었다. 두툼한 보안경이 달린 모자채양을 한껏 제껴쓴 모습이 어딘가 낯익어보여서였다. 이쪽으로 돌아서는 그의 이마에서 깊숙한 상처를 발견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렇지!)
장입기가 멎기 바쁘게 진호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로장아바이.》
장입기운전공에게 무슨 손시늉을 해보이고 돌아서던 로장은 진호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서로 알리 만무라고 여기는 사람의 무관심한 눈길로 일별했다. 그런 태도가 상대방을 무안하게 한다는데 대해서는 전혀 오불관언인듯싶었다.
《절 모르시겠습니까? 실습을 왔다가 로안에 삽을 집어넣던 대학생입니다.》
《?…》
《왜 호케이선수라고…》
《호케이선수?》
그제야 그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는데 틀림없이 삭막한 기억의 갈피속에서 한오리의 실머리가 잡히는 모양이였다.
《그래그래! 호케이선수! 생각나네 생각나!》
삽날처럼 뾰족한 턱을 쳐들고 껄껄 웃던 그는 언제 웃었냐싶게 다시 진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왔나. 왜 또하나 날려볼 생각인가? 그렇지만 이젠 늦었쇠. 저 투사기가 이젠 삽질을 대신한단 말일세.》
《아니, 이번엔 아예 눌러앉자고 온걸요.》
《그-래?》
그는 쇠뭉치같이 꽛꽛한 손을 내밀며 다시금 만족스레 웃었다.
로장이 그때 삽질하던 얘기를 해서 책임기사는 물론 옆에 있던 용해공들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이때였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수 없는 가느다란, 매미같은 목소리가 책임기사를 찾는 바람에 진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철입니다.》
책임기사가 어깨에 메고있는 무선전화기를 입에 갖다댔을 때에야 진호는 그 목소리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는것을 알았다.
《책임기사동무요? 나 태수요. 다른게 아니라 내 친구 하나가 방금 제철소로 왔다는데 혹시 거기 가지 않았나 해서…》
《친구라니?》
그는 진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키는 구척이고 얼굴은 시커먼게 꼭… 어쨌든 스산하게 생긴 친구요. 좀 찾아보구려. 강철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니까 아마 그 어방 어디에서 어스벙댈거요.》
《그래?》
기철은 무선전화기를 벗어주며 한번 놀래워주라고 눈을 끔뻑했다. 그러나 진호는 상대가 태수라는것으로 하여 벌써 제정신이 아니였다.
전화기를 받아들기 바쁘게 그는 그것을 입에 대고 《날세, 나야!》하고 소리쳤으나 웬일인지 태수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책임기사가 옆에 있는 단추를 누르면서 말해야 된다는것을 알려주어서야 그는 자기 말이 통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란데, 진호란 말이야!》
《뭐 누구? 아-니 이게? 원! 이런 제길!》
흥분할 때면 아무말이나 두서없이 내뱉군 하는 그의 습관이 떠올라 진호는 저절로 웃음이 나갔다.
《가만, 가만! 거기 있겠나? 내 당장 그리로 가지.》
《아니, 아직 직장에 들려 인사도 못했네!》
《그래? 그럼 직장에 들려 인사를 하고 그길로 나한테 오게. 나한테 와서도 인사를 해야지. 아무래도 선배를 찾아보는게 도리가 아닌가! 어때? 아니, 근데 진호가 옳긴 옳아?》
《젠장! 이따 실물확인하게나.》
두 친구의 상봉을 지켜보는 책임기사며 로장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