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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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시연은 차학선이 언제 동뚝을 내려갔는지 의식하지 못한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이제껏 부대장동지가 제대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었지만 바로 곁에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입당보증인인 신호준은 정말 잊을수 없는 상관이였다.
강시연이가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일은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했다.
그가 군사복무를 할 때 있은 일이였다.
중학교시절 음악소조에서 손풍금을 배웠던 강시연은 입대후 인차 자기의 재기를 드러냈다. 저녁마다 그를 중심으로 오락회가 벌어지군 했는데 그의 인기가 대단했다. 누구나 다 강시연을 알게 되였다. 그에게 인박혀있는 턱없는 거만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였는지 모른다. 동무들은 그에게서 손풍금을 배우기를 희망했다.
한명으로부터 시작되여 이 사람, 저 사람의 련습으로 손풍금은 분대, 소대를 거쳤다. 그러다나니 어느 사람의 손에서인지 삑삑거리기 시작하더니 손풍금은 고장이 나서 음이 정확치 않았다. 새 손풍금이 오기까지는 그것을 수리해서 리용해야 했다. 련대에서는 손풍금수에게 보내라는 련락이 왔다. 그래서 강시연은 손풍금을 메고 혼자 련대로 떠났다. 련대까지의 거리는 벌판을 지나고 령 하나를 넘어야 했다.
봄볕이 재글거리고 저 멀리 무연하게 뻗어간 들판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거렸다.
방축길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며 재깔거리는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끝없이 뻗어간 방축길을 따라 혼자 걸어가려니 지루해나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가, 그의 앞으로 종이장 하나가 펄럭거리며 날아왔다.
발가우리한 물이 든 고깔모양의 종이였다. 앞서간 학생들이 앵두를 먹고 버린 종이장인 모양이였다. 무심히 펼쳐보던 강시연은 눈이 둥그래졌다. 자기가 제일 애독하던 잡지의 한토막이였다. 소조선생은 손풍금을 배워주기도 했지만 리론강의를 재미나게 하군 했다.
음악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나라의 음악전통과 이름난 음악가들의 생활이 제일 흥미있었다. 사실 음악감각이 예민했던탓에 손풍금을 배우기는 했지만 시연은 전문가적인 재간도 없었고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그가 흥미를 가지는것은 아무 분야이건 리론이였다. 무슨 글이든 력사적으로나 분석적으로 파고드는것이 그의 제일가는 취미였다.
무료하게 혼자 걷던 시연에게 있어서 그 종이장은 온 마음을 쏠리게 하는 유혹장이였다. 다음장을 보고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눈을 드니 벌판으로 날아가는 종이장이 또 보였다. 그리고보니 수로옆으로 날아가는 또하나의 종이장이 보였다. 시연은 어깨가 아파나는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날려가는 종이장들을 주어모았다.
그때부터 시연은 그 종이장을 탐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고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종이장의 글줄에만 팔렸다.
갑자기 《이건 뭐요?》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연은 와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앞에 중대정치지도원이 서있었다. 어떻게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제야 곧장 련대부로 빨리 가야 한다는것, 련대부에서 다른 중대에 가야 할 수리공이 동무를 기다린다고 강조하던 말이 생각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운것은 상관의 손에 와락 쥐여지는 종이장들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였다.
무섭게 질책하는 추궁에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정치지도원의 입에서는 줄곧 군사규률이라는 말이 튀여나왔다. 그의 가슴은 공포로 얼어들었다. 사근사근해보이던 정치지도원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줄은 여태 몰랐다.
그런데 일은 예상치 않게 번져졌다. 갑자기 삑 차가 멎어서는 소리가 나더니 어떤 장령이 내다보는것이였다. 줄욕을 퍼붓던 정치지도원이 뛰여가서 설명을 했다.
장령은 보기만 해도 엄엄했고 웃음기란 하나도 없어보였다.
그 장령의 지시로 시연은 정치지도원과 차에 올랐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이제 내 문제는 어떻게 될가, 군사규률대로 하면 어떤 책벌을 받게 될가, 어떤 처벌일가? 마음은 끝없이 울고싶었지만 웬일인지 눈물 한방을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사이 차는 부대앞마당에서 멎었고 손풍금을 멘 정치지도원은 혼자 떠나갔다.
저녁이 되자 낯모를 군관이 와서 그를 호출하였다.
그가 들어간 곳은 식당이였다. 먹고싶지 않았지만 그 낯모를 군관과 함께 먹는터여서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놀렸다.
그후엔 그 군관을 따라 어느한 방으로 갔다. 너렁청한 방이였다. 그를 데려다준 군관이 거수경례를 하고는 물러갔다. 누군가 다가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그 장령이였다. 그가 다가오는 바람에 강시연은 금시 숨이 막히는것같았다. 그런데 그 장령은 강시연에게 그 종이장들을 내보이며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고 물었다. 목소리가 조용할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눈길도 부드러웠다. 그제야 강시연은 조심조심 자기가 보았던 내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내용이 깊어지면서 강시연은 자기가 열기를 내서 말한다는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떨 땐 그가 물으면 아는껏 거침없이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퍼그나 철없는 행동이였다.
부대장이 불쑥 음악가가 되는것이 희망인가고 물었다.
《아닙니다. 대학에 가… 아니, 군사복무를 잘하겠습니다!》
강시연은 얼결에 대학말이 튀여나오는걸 꾹 눌러버리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두번다시 과오를 범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부대장은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강시연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며 앞으로 군사복무도 잘하고 대학에도 가자고 하는것이였다. 강시연은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는가 해서 눈이 둥그래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부대장은 잊지 못할분이였다. 자기가 군사복무를 잘할수 있은것도, 그의 보증으로 입당을 한것도, 군사복무를 마치고 대학으로 갈수 있은것도 다 부대 당위원회와 부대장을 비롯한 훌륭한 지휘관들이 걸음걸음 관심했기때문이였다는걸 뒤늦게야 알게 되였다. 강시연은 그런 사연을 그후 정치지도원에게서 듣고 가슴이 뭉클해서 한동안 눈만 슴뻑거리기만 했다. 군사복무의 전기간 강시연은 부대장이 해준 말을 잊지 않았다. 대학으로 떠나오던 날 강시연은 부대장을 찾아갔다. 부대장이 평양에 소환되였을 때까지만 해도 련계가 있었는데 군복을 벗은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런데 그 부대장이 신형일의 아버지라니?!
강시연은 벌떡 일어났다. 더는 그대로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그길로 씽씽 공장으로 들어가 당비서방문을 열었다.
어디에 나가려는지 작업복을 갈아입던 신형일은 거침없이 들어서는 강시연을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강시연은 그 자리에 굳어져서 신형일을 바라보았다. 신통히도 부대장이 바로 앞에 서있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신형일은 아버지를 빼물었다. 그런걸 그전에는 왜 느끼지 못했던가. 왜 이제야 그걸 느낀단 말인가.
강시연은 격하게 부르짖었다.
《이런 법도 있소? 이럴수가 있는가 말이요. 말해주면 안되였소? 한마디라도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하면 안되였던가 말이요. 너무하오. 너무해.》
강시연은 더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앞이 뽀얗게 흐려왔다.
가슴속에 쌓였던 하고싶은 말을 다 터쳤지만 실은 신형일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수 있게 하지 못한건 바로
어이없게도 자기는 부대장과 찍은 사진을 유심히 보며 묻는 신형일에게 바로 일군은 이런 사람이여야 한다고 훈계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때 신형일은 이윽히 사진을 들여다보기만 했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터인가. 내가 그렇게 수양이 없어지다니. 언제인가 온실에 찾아와서 딸의 현실체험지에 대하여 하던 말도 생각났다. 그 고민이 집에서까지 계속되였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결국 그 불티는 아버지에게까지 번져지여
《정말 미안합니다.》
신형일이가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강시연앞으로 다가와서 따뜻이 권했다.
강시연은 물고뿌를 받을 생각도 없이 중얼거렸다.
《너무해, 너무해. …》
《이젠 그만 진정하십시오.》
한참만에 강시연은 신형일을 바라보았다.
《부대장동지의 건강이 그렇게 나빠졌소?》
《입원치료를 받아서 많이 회복되였더구만요.》
《당장이라도 찾아뵙고싶소. 내 마음은 정말 그렇소. 그러나 지금은 나서지 못하오. 내 무슨 면목으로 그분앞에 서겠소. 그러나 비서동무, 내 꼭 떳떳이 나설테요. 믿어주오.》
《믿습니다. 자, 이젠 나하고 좋은걸 구경하러 갑시다.》
신형일이가 작업복단추를 채우고 하는 말이였다.
《구경?! 아니, 언제 한가하게 구경을…》
강시연은 펄쩍 놀래며 손을 흔들었다.
《강동지가 잘 아는 석태인연구사 말입니다. 현대화의 중요공정의 하나가 오리호동의 무인화를 실현하는것인데 먹이운반의 자동화, 콤퓨터화를 실현했습니다. 오늘까지 애를 먹이던 습도조절장치며 온도조절장치도 다 완성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젠 우리 공장 처녀들이 시비를 안들을수 있게 됐습니다.》
《처녀들 시비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강시연은 의아해졌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현장에 가서 말해주지요.》
신형일이가 사뭇 즐거워 벙글거리자 강시연은 일어섰다.
《그거참, 그렇다면 가봅시다.》
강시연은 신형일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