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9
(2)
창가에 다가서서 정문어구에 있는 우람찬 강철직장을 흥분된 심정으로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후다닥 뒤로 돌아섰다. 한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다짜고짜 책상우에 있는 송수화기를 움켜쥔 그는 접단기를 두드려댔다.
자기가 왔다는것을 알기만 하면 대번에 그 왕눈을 디룩거리며 어쩔줄 몰라할 태수, 바로 그 막역친구를 통해서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를 새로이 확인해보고싶었던것이다. 지금은 오직 그만이 자기를 납득시킬수 있는 유일한 존재처럼 여겨지는것이였다.
《기술과에 부탁합니다.》
교환수특유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바쁘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과 어느 부서예요?》
(어느 부서?)
태수의 편지구절을 되새겨보았으나 어느 부서에 있다는것은 적혀있지 않은것같았다.
《가만 있자, 야금기계과던가?》하고 중얼거리는데 대번에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여기가 뭐 대학인줄 아세요? 설비면 설비겠지…》
《옳소, 옳소! 거기가 맞겠소.》
교환수의 무랍없는 핀잔도 그에게는 유쾌하기만 했다.
《설비외다.》
대뜸 교환수의 목소리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굵직한 목청이 들려오는 바람에 그는 상대가 틀림없이 주임석에 앉아있는 위풍도도한 과장이 아니면 그쯤되는 사람이라고 짐작하고 한껏 공손한 억양으로 태수의 이름을 댔다.
《태수?》
이렇게 되뇌인 그는 곧 뭐라고 일러주는데 무슨 말인지 통 가려들을수 없었다.
《뭐라는지요?》
《사별 80t 말이요.》
(사별 80t? 이거야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수 있나!)
《아니, 여보십시오, 전 사람을 찾는데요. 태수동물 말입니다.》
《그러게 사별 80t이라잖소.》
(챠! 이거라구야.)
사정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고싶었으나 상대방의 억양이 어찌도 위엄스러운지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구요?》
상대방의 어조에는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대한 로골적인 불만이 어려있었다.
《새로 제철소에 파견돼온 사람입니다. 태수의 동창생이지요. 진호라면 아마…》
《그럼 가보우다나.》
《어델 말입니까.》
《사별 80t 말이요. 용광로뒤에 있으니까 후문으로 가는게 빠를거외다.》
그제야 진호는 그 괴상한 이름으로 불리우는것이 어떤 설비라는것을, 그렇게만 불러도 이곳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설비라는것을 짐작했다.
(꽤나 을러댈 관료주의자겠군!)
송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진호는 방금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필경 불룩한 몸집에 떡떡거리기 잘하리라는것과 그것으로 하여 부서사람들한테서 비난을 받고있을것이며 특히 누구보다도 그런 구속을 싫어하는 태수가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안됐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다시 나타난 지도원의 낯색은 아까보다 한결 밝아져있었다.
《기사장동무가 이미 전화를 받았더군요. 부에서 말입니다. 요구하는 깡철로 기본적인 합의는 봤습니다. 기사장동문 회의가 있기때문에 17시에 만나자고 합디다. 그런걸 제가 오늘은 수요일이기때문에 합숙에서 17시까지밖에 접수하지 않는다는걸 상기시켰더니 그럼 숙소를 정한 다음에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이제부터 해야 할 수속들과 절차에 대해 순서를 꼽아가며 하나하나 대주는데 보매 이런 사무적인 지식에 있어서는 자기가 기사장이나 지배인보다 한등급 우라는것을 시위하려는상싶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짐들을 그의 사무실에 맡겨둔채 진호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다. 수속도 수속이지만 우선 직장부터 돌아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던것이다.
파철장으로 쓰이는 직장앞 공지는 예나 다름없이 어수선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쇠붙이들중에는 자동차운전실뚜껑이며 무쇠바퀴들 그리고 어떻게 날라왔는지 짐작키 어려운 커다란 기계부속들도 있는데 거의나 벌겋게 산화된것들이였다.
파철장사이로 난 좁은 통로로는 잔쇠붙이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겨끔내기로 꽁무니를 들이대고있었고 이미 부리워진 쇠밥부스레기들은 자석기중기의 무쇠흡반에 척척 빨리워 화차우에 있는 장입바가지들에 담겨지고있었다.
왜서인지 포장길로가 아니라 파철장을 가로질러가고싶어진 그는 장애물을 극복하듯 하며 쇠붙이를 타고넘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강철직장의 거창한 위용을 바라보았다.
주런이 서있는 로체들과 로마다에서 내뻗치는 사나운 불길들 그리고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여섯개의 굴뚝들에서 솟구쳐오르는 희고 갈색이 도는 연기들…
저절로 가슴이 후두둑 뛰면서 어쩐지 한발에 들어서기는 못내 아쉬운 그런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실습을 왔던 그때까지만 해도 예비처리장의 벽은 시커먼 박판으로 둘러져있었는데 지금은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아연도금판이다. 그땐 발생로의 배관들로 하여 멀리에선 용해장을 볼수 없었는데 지금은 휑하니 들여다보인다.
그 숱한 로체들과 배관들은 다 어데로 사라졌담! 그러니 발생로를 아예 없애버렸는가. 변했다. 참으로 많이 변했다. 철도인입선이며 그 우로 분주히 오가는 기관차들도 전에 없이 불어난것같았고 로문이 열릴 때마다 뿜어나오는 화광까지도 이전보다 몇배 더 억세게 느껴졌다.
《비켜요! 동무!》
귀청을 찢는 야무진 소리에 와뜰 놀라 돌아보니 한 처녀가 머리에 이고 온 파철덩이를 당장 자기 발등우에 내던지려 하고있었다.
《이크!》
덴겁을 하며 물러선 진호였으나 뒤에 있는 삐죽한 쇠붙이에 걸려 넘어질것처럼 두팔을 허우적거렸다. 그 바람에 처녀는 물론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배를 그러쥐고 웃어댔다.
다만 진호만이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는데 다시 다가선 처녀가 이번에는 팔을 자기쪽으로 힘껏 잡아당기는것이였다.
《아이! 좀 정신을 차리세요.》
돌아보니 웬걸 장입바가지를 가득 담은 화차가 기척도 없이 뒤걸음질치고있는것이 아닌가!
(정말 단단히 정신을 차려얄가보군.)
불시에 어떤 격렬한 운동의 필요를 느낀 그는 처녀에게 씩 웃어보이고나서 산화철가루가 융단처럼 깔려있는 무쇠계단을 두세층씩 마구 올려짚으며 용해장으로 뛰여올랐다.
출격하는 땅크의 서렬처럼 진을 치고 으렁으렁 동음을 울리는 로체들이며 로문짬으로 한발씩 내뻗치는 사나운 불길 그리고 이 장엄한 철의 군단의 지휘자야 내가 아니고 누구냐는듯이 긴팔을 휘저으며 돌아가는 장입기를 보느라니 저절로 장쾌해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용해장을 뒤흔드는 동음은 금시 무엇을 와지끈 부서뜨릴듯싶은 위구를 촉발케 했으나 온몸에서는 알지 못할 쾌감이, 사나이다운 쾌감이 못견디게 꿈틀거리는것이였다.
(흠! 여기가 바로 내 일터란 말이지!)
그는 벅차게 끓어번지는 생활의 률조를 새삼스레 온몸으로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단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생활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태까지는 이런 생활에 매혹되여 이 생활을 누리고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만 품어왔지만 오늘부터는 바로 자기
그의 가슴속에는 말로써는 표현하지 못할 환희와 함께 행동하고 투쟁하고싶은 열망이 견딜수 없이 끓어올랐고 행복이라고 할수 있는 감정이 그득히 차올랐다.
지령실의 지시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가 하면 아스라니 높은 천정기중기에서는 무선기를 입에 댄 운전공들이 연방 뭐라고 중얼거린다. 로의 계기실마다에는 빨갛고 파란 구슬전등들이 쉼없이 반짝이는데 산업TV화면에는 로안의 사품치는 용금성분들이 또렷이 찍혀있었다.
이젠 자기도 이 거창한 철의 군단의 당당한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이것저것들을 바라보던 그는 자기 눈에 비치는 모든것이 쇠로만 되여있는데 대한 새삼스러움에 저절로 미소가 피여올랐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구호판은 물론 로상으로 오르는 사다리며 계기실에 있는 책상과 의자도 다 철판으로 무어진것이였고 지어는 작업일지의 뚜껑이며 구석에 세워놓은 비자루까지도 철사로 엮어진것이였다.
견학을 왔던 그때에도 모든것이 쇠로만 되여있는걸 두고 얼마나 신기해했던가. 어릴 때 선생님이 《명사에 무엇이 속합니까?》하고 물으면 《의자》, 《책상》, 《못》하고 떠들어대듯이 자기들도 누가 쇠로 된것을 먼저 찾아내는가에 열을 올렸었다.
진호도 그때 한창 신이 나서 떠들어댔는데 갑자기 그보다 몇배 더 신기한것을 발견하고는 무춤 걸음을 멈추고말았었다. 그것은 로앞에서 빙빙 돌아가며 신명나게 해대는 용해공들의 삽질이였다. 그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호케이 슛동작과 흡사한지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던것이다. 삽자루를 거머쥐고 휘친휘친 로앞으로 다가서서 두팔을 힘껏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팍을 몰고 들어가다가 문대를 향해 채를 후리는 바로 그 동작이였다.
삽시에 얼음판을 질주하던 때의 흥분이 되살아오른 그는 어망결에 용해장복판으로 뛰여들었었다.
《삽질을 한번 해볼수 없을가요?》
《삽질?》
이마에 깊숙한 상처자리가 있어 얼핏 보기에도 몹시 험상궂게 생긴 로장은 대번에 마뜩잖아했지만 그 정도에 물러설 진호가 아니였다.
《걱정마십시오, 전 대학 호케이선숩니다.》
《호케이선수?》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는듯이 더욱 얼떠름해하는 로장이였으나 진호는 얼른 삽자루를 움켜쥐고 보수재를 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용해공들짬에 끼여든 그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앞자리들의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기어이 자기도 용해공들처럼 삽을 휘두르는 순간엔 뒤다리까지 보기 좋게 흔들어보이리라고 벼르면서…
이윽고 불길이 널름거리는 로문앞에 이른 그는 온몸에 힘을 주면서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말았다. 그담부턴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조차 할수 없었다. 다만 눈섭이 끄슬리지 않았나 해서 조심히 쓸어보는데 뒤에서 굉장한 폭소가 터져올랐던것이다.
《여-호케이!》
히죽이 웃으며 다가선 로장이 《삽자루가 뭐 불살구갠줄 아나?》하고 말했을 때에야 그는 자기 손에 있어야 할 삽이 없음을, 너무도 뜨거운 바람에 그것을 그만 로안에 던져버렸다는것을 알았다.
(아이구! 이게 무슨 망신이람!)
이 일로 하여 그는 대학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뒤문출입만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추억도 오늘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어디서 삽질하는데가 없는가싶어 두리번거렸으나 어느 로도 투사작업을 하는데는 없었다.
그는 다시금 유쾌한 기분으로 출강장이며 용해장의 설비들을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