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3 장
불길처럼 타오르라
9
(1)
《이런 경우에는 접수하기 곤난합니다. 부득불 본직장에 다시 수속을 의뢰하기마련이지요. 파견장과 함께 근무이동증과 기사자격증이 첨부되여야만 한단 말입니다. 이 파견장도 그것들이 있을 때만 효력을 나타내니까요.》
곱살하게 생겼으나 겉보기와는 달리 몹시 깔진깔진한 제철소의 지도원은 진호의 미진된 수속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좀처럼 접수할 의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상대가 누구든, 설사 이전 직급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라 해도 자기한테는 마찬가지며 아무리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해도 이 엄격한 절차야 어떻게 어길수 있느냐는듯한 사뭇 근엄한 기색이였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정이 그렇게 된걸. 올 때 단단히 부탁을 해놨으니까 수일내로는 나머지 문건들이 도착할겝니다.》
《그럼 그때 가서 접수해야지요.》
《아니, 지도원동무! 그러지 말고 사정 좀 봐주시오. 그때까지 난 어떡하랍니까? 할일없이 그저 빈둥거리란 말입니까? 접수하고 안하고 하는거야 지도원동무 손에 달린게 아닙니까, 예?》
자기를 흘끔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서 어떤 반응이 있다는것을 느낀 진호는 더욱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없는 비위를 부렸다.
《제발 날 좀 살려주시오. 내같은 햇내기야 지도원동무가 도와주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일수 없지 않습니까. 부탁입니다.》
《…》
아니나다를가 지도원은 더없이 중대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처럼 심각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고보면 속은 그다지 까다로운 사람이 아닌것같았다.
자기 운명은 전적으로 지도원의 결심여하에 달려있으니 그저 불쌍하게 생각하고 관대하게 처분해달라는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진호였으나 속으로는 지금 자기가 정말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새 일터에 와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또 온몸으로 느껴보고싶은 충동에 더 옴해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채 식지 않은 시뻘건 강괴들을 실은 기차가 지나갈 때면 얼른 거기에 정신을 팔았고 멀리에서 쿵쿵 하는 열풍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면 마치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고조되는 선률에 귀를 기울이듯 자못 커다란 흥분을 느끼며 듣고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떻게 믿을수 있단 말인가!
방금전에 수도를 떠난 자기가 어느새 철갑을 두른 로체들이 우뚝우뚝 솟아있고 짙은 갈색연기에 휩싸여있는 제철소에 와있다는것을 아니, 그처럼 중대하게 여겨오던 일신상의 변화가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졌다는것을. 그러고보면 생활의 대하란 얼마나 거창한것인가! 과연 얼마나 광대한 생활이 우리 주위에 펼쳐져있는가!
그는 하늘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으며 또 파도와 같이 장엄한 생활의 대하가 자기를 휩싸고있음을, 그 대하속의 자기란 마치 백사장의 모래알과 같이 미세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느낌은 흡사 기차를 타고 오면서 혼곤히 잠들었던 자기가 어떤 소란스런 정거장에서 깨난듯한 느낌 아니, 그보다 어떤 사나운 일진광풍에 휘몰려 날아온것같은 착각이 일게 하는것이였다.
사실 그는 제철소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맞아줄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저으기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야금기지의 거창한
위용은 대번에 그런 고민을 일축케 해주었을뿐 아니라 한갖 옹졸한 생각에 젖어있는
《그러니 기어이 깡철인가요?》
《예?》
공장정문으로 들어서고있는 견학생대렬을 보느라고 진호는 미처 그의 말을 새겨듣지 못했다.
《꼭 깡철직장으로 가시겠나 말입니다.》
마침내 지도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위기에 처한 한 인간을 구원해주어야겠다는 의로운 결심을 품은 사람마냥 못내 심중한 태도로 대장을 펼치였다.
《그렇습니다, 꼭 강철직장입니다.》
《그렇다-》
히죽이 웃는 그의 미소는 보매 자기에 대한 긍지와 함께 자기 일에 대한 보람을 나타내는상싶었다.
《그런데 이걸 보십시오. 흔히 대학을 졸업하거나 연구기관에서 오는 동무들을 보면 첨엔 모두 깡철이요, 용광로요 하고 현장을 택하지만 후에 가선 하나같이 기술부나 연구소로 옮겨앉군 하지요.
물론 사업상필요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럴바하군 아예 첨부터 기술과나 연구소에 적을 붙이는게 어떻습니까. 기사장동무와 토론해볼테니 말입니다.》
배치부서쯤은 자기의 결심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시킬수 있다는 겸손한 우월감을 그의 얼굴에서 읽은 진호는 비로소 이 지도원이 사업을 갓 시작했다는것과 처음 대상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이런 태도를 취하며 거기에서 일종의 만족을 느끼고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런 느낌은 은연중 웃음이 나오게 했다.
《아니, 전 꼭 강철직장에 가야겠습니다. 후에 지도원동물 성가시게 굴지 않을테니 걱정마십시오.》
《그런 말도 누구나 첨엔 다 하지요. 하여간 모두들 신통하다니까. 깡철이라… 그렇게도 깡철이 소원이라면 어디 토론해봅시다.》
거듭 《깡》, 《깡》하고 발음하는데 각별한 재미를 느끼고있는듯한 그의 버릇을 어쩐지 야유해보고싶어진 진호는 《어떻게든 그 강-철로 가게 해주십시오.》하고 부러 《강》이라는 발음을 유연하게 해보였다.
《기어이 깡철이라…》
다시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그 《깡》이라고 발음해보는 만족만은 종내 버리지 않은채 사무실을 나섰다.
진호가 수속들을 마저 끝내지 못하고 오게 된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차마 수속이 다될 때까지 앉아기다릴수가 없었던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난 다음에는 어떻게 자기가 하는 일없이 빈둥거릴수 있었던지 리해할수 없었고 또 그런
얼마전 정무원(당시)에서는 중유를 각 부문들에 배정하게 되였는데 아무리 짜보아도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극히 필요한데만 그것도 적은 량밖에는 차례지지 않았다는것이다.
정무원에서는 이런 실태를 부득불
사정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뜻밖의 물으심에 의아해진 일군이 제철소에서는 본래부터 제기된것이 없었다고 말씀올리자
《동무들, 생각해보시오. 만들어놓은 기계를 돌리기도 힘든 일인데 새로운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겠소. 중유가 긴장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린 그 동무들을 먼저 생각해주어야 하오. 중유가 떨어져가는데도 감히 달라고 제기하지 못하는 그 동무들의 심정이 어떻겠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동무들한테 먼저 줍시다.》
이 말씀을 전달받는 순간 진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수 없었다.
너무도 크나큰 은덕에 목이 메여 저절로 눈굽이 달아올랐다. 우리
그러나 감격만이 아니였다. 감격보다 더한 자책이, 뼈아픈 자책이 곧 페부를 사정없이 찌르는것이였다.
얼마나 간절하시면, 얼마나 바람이 크시면 이런 말씀을 다 하시는것일가? 그는
더우기 새 연료를 연구하기 위해 현지에 내려왔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당분간은 새 연료취입이 불가능하다는것을, 때문에 중유를 계속 공급해줄것을 제기한 명식이네의 처사가 괘씸하고 불만스럽기짝이 없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기 한몸이 쇠를 녹일수 있는 한줌의 연료가 되여 보란듯이 로안으로 뛰여들고싶었다.
남들처럼 아직 몸가까이에서 직접 뵈옵는 영광을 지닌적은 없지만 명절날 광장의
(잘못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새 연료를 만들어 다시는, 다시는
그 즉시 그는 짐을 꾸려들고 기차에 올랐던것이다.
장차 일이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것은 알수 없었으며 또 생각조차 할수 없었다. 다만 제멋대로 흩어지고 분산되여있던 자기의 모든 힘이 하나로 집중되여 무서운 정력으로 줄달음치고있음을 느낄뿐이였다.
(저기가 바로 내 일터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