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2 장
나는 증명할것이다
6
《뭐라구요? 내가 사람들을 속인다구요? 쫓겨가면서도 주먹질한단 말입니까? 어디 다시한번…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기에…》
솟구쳐오르는 오열로 하여 진호는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앞에 있는 책상을 산산쪼각이 나게 박산내고만싶었다.
《?…》
너무나도 불시에 들이닥친 일로 하여 명식은 물론 수표를 받으러 왔던 지도원(당시)까지도 질겁한 눈길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무엇때문에 진호가 이처럼 흥분했는지 리해할수 없었던 명식이였으나 곧 짐작이 갔다. 그러나 자기가 결코 없는 사실을 만들거나 과장하지 않았다는것으로 하여, 특히 새로 배치돼온 사람들에게 앞으로 명심해야 할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실례로 지적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무엄해도 분수가 있지. 이건 너무 분별없이 날치는걸!)
하지만 평소에도
《그래서 폭탄을 지고 뛰여들었소?》
그의 표정은 마치 차안에서 굉장한 폭발소리를 듣고 잠을 깬 사람이 무슨 충돌사고가 아닌가 하고 놀랐다가 (음- 다행히도 충돌이 아니라 빵꾸가 난게로군. 그렇지만 꽤 시끄럽게 됐는걸!) 할 때의 기색과 흡사했다.
《물론 사고를 냈습니다. 쫓겨간다고 해도 할말이 없구요.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 남의 진정까지 그렇게 무시합니까. 무슨 권리로 남의 진심을 함부로 모독하나 말입니다. 명백히 말해두지만 난 이미부터 현장에 나갈걸 바랬고 또 그걸 위해…》
실장의 태도가 어떻든간에 진호로서는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울화를 내뿜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이미부터?》
《이미부터지요, 이미부터구 말구요.》
(흠, 이젠 그렇게 둘러치는가?)
대학때부터 연료를 연구해왔다는 말은 들었어도 현지로 갈 결심이였다는건 금시초문인 명식이였다.
아무말없이 뒤로 돌아선 명식은 지도원이 가지고 온 문건들에 수표를 하기 시작했다.
진호는 그가 하는 일을 당장 집어던지고 이건 버릇도 없이 무슨짓이냐고 소리치든가, 아니면 너야 쫓겨나는 놈이지 별다른 놈이냐고 따지고들어주었으면싶었으나 수표를 다 하고난 명식은 그것을 간종그려 지도원에게 내밀며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이기까지 하는것이였다.
《이번 출장이 오래겠는데 일없겠소?》
《괜찮습니다.》
《그래도 기회를 봐서 한번 다녀가오. 어머니될 사람한테야 역시 세대주가 있어야 맘놓이는게 아니겠소.》
실장이 당하는 무안을 목격한것으로 하여 어느 정도 소침해있던 지도원이였으나 명식이가 이런 관심을 돌려주는 바람에 그는 히죽 웃기까지 했다.
문을 나서면서 그는 불만스러운 눈길로 진호의 뒤통수를 한번 찔 흘겨붙였는데 보매 그것으로 실장의 친절에 대한 자기의 례를 표시하려는상싶었다.
그를 바래워준길로 명식은 또 옆방으로 갔다. 급히 전달해야 할것이 아니면 포치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였다.
방안에 우두커니 혼자 남게 되자 진호는 어쩐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허구프기도 했다.
일단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든 무작정 덤비는 그였으나 흔히 그런 사람들이 그런것처럼 그 역시 뒤는 그리 질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다잡고 분노에 박차를 가하며 명식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도대체 자기가 나를 알면 얼마나 알기에!)
다른것이라면 몰라도 그처럼 간절한 소원이였던 그 열렬한 지향, 대학때부터 숱한 친구들의 동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돼오던 그 꿈같은 포부가 짓밟히는데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쫓겨가는 처지에 놓였다 해도 결코 그 진정만은 유린당할수 없었다.
(어째서 사고만 따지는건가? 어째서 마음속에 품은 간절한 지향은 리해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인가!)
원래 상처란 일부러 남들이 자꾸 건드리는것같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것이 각별히 민감하게 느껴지기때문이라는것을, 바로 그런데서부터 자기의 격분이 더 무섭게 폭발되였다는것을 그는 알수도 없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가슴속에는 자기의 량심과 진정을 모독한데 대한 울분과 분노 이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선 명식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권했다.
《그럼 내가 잘못 리해하고있었는가?》
진정인지 조손지 종잡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난 사실 동무가 이미부터 그런 결심을 품고있었다는건 몰랐소. 더우기 지금에야 누구나 현장에 가려 하지 않는게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요. 그리고 동무가 하려는 새 연료에 대한 연구실태를 우린 이미 당에 보고올리지 않았소,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말이요.》
성을 낼래야 낼수 없는 스스럼없는 그의 태도를 보자 진호는 사실이 실장이 어떻게 자기의 희망을 알수 있으랴 하는 느낌이 들면서 어느모로
보나 의심을 받을수밖에 없는
《대학때부터라…》
명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으나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는 실상 진호를 천성적으로 질시해마지 않는 그런 형의 인간, 즉 현실을 추상적으로 대하는 터무니없는 랑만주의자일뿐 아니라 창조사업을 한답시고 자만심만 가득한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간주했다. 때문에 지금도 남들이 자길 어떻게 보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분별없이 날치는것으로밖에는 여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특징은 문제의 본질을 재빨리 포착하는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아무리 자기가 확신하는것도 이모저모 구체적으로 타산해보고 그것이 원칙과 어떻게 되는가를 엄밀히 따져본 다음에야 결론하고 행동한다는데 있었다. 바로 그 드팀없는 타산과 원칙성으로 하여 여태까지 그처럼 까다롭다고 하는 심사사업을 한번의 오유도 없이 정확히 수행해오는 그였던것이다.
《한가지 물어보기요!》
이미 명백한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물음에 대한 답변이 어떤가에 따라 자기의 견해를 확증하리라 마음먹으며 그는 진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결심을 오늘에 와서야 드러냈소? 현장에 가겠다는것 말이요. 그거야 숨길 필요도 없는 훌륭한 결심이 아니요.》
아무 생각없이 한 말처럼 한마디 던졌으나 진호가 다른 기미라도 느낄가봐 그는 얼른 뒤를 달았다.
《내 말은 왜 사고가 있은 다음에야 그 말을 했는가 하는거요. 그러니 모두들 잘못 리해하는수밖에.》
《…》
이 물음에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는 진호였다.
부에 배치될 때부터 특히 태수와 헤여진 순간부터 그것때문에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몰랐다. 처음 부에 왔을 때는 몇해동안 심혈을 바쳐온 자기 사업이 차페된것으로, 더는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것으로 여겨 락망까지 했으나 곧 기술국에서 일하는 과정에 자기 기술안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으려 했고 또 인정되리라 확신했던것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의 결심을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데 버릇되였고 아무 일이나 미리 선포하고 하는것은 말없이 하는것에 비해 그 가치가 백분의 일도 안된다고 믿는터여서 더욱 그는 자기 일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될줄이야…
《어쨌든 내 결심은 확고했지요, 대학때부터 말입니다. 특히 이번 실수를 통해 그 결심이 더욱 굳어졌구요.》
(실수를 통해? 그러니 이젠 또 자기 처지를 그렇게 변명하는가?)
《그래 이번엔
《그거야 해봐야지요.》
(하긴 이젠 그렇게라도 우기는수밖에!)
공감을 표시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인 명식이였으나 그것은 한갖 외양에 불과했고 속으로는 그의 말을 미련하기짝이 없는 변명으로밖에 들을수 없었다.
엄중한 실책을 저지른 사람일수록 자기의 행동을 남들앞에서는 물론
그의 판단에 의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격분은 두가지 경우에 나타나는데 하나는
(진심이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객관들한테는 저절로 나타나기마련일세. 한데 무엇때문에 그처럼 떳떳한것을 숨겨왔단 말인가! 그래서 누구나
량심만은 숨기지 못한다는게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추태를 부려? 그래야 뭐
그는 이처럼 단순한 속임수에 자기가 넘어가지 않는다는것을 진호가 눈치챌가봐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진호의 기색이 어느 정도 풀린것을 확인한 명식은 이제부턴 자기 차례라는것을 느끼며 이 자리에서 결판짓지 않으면 안될 문제 즉 현옥이에 대한 문제를 머리속에 굴려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두부모 자르듯 할수야 없지 않나!)
상대방의 약점이 무엇이라는것을 파악한 로련한 장기수가 어떤 수를 써야 일격에 역장을 안기겠는가를 궁리하듯이 그는 어떻게 해야 이 기회에 현옥이 문제를 원만하게 수습할수 있겠는가를 따져보는것이였다.
요즘 현옥이를 대할 때마다 그는 불안을 금할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때면 《그거야 내가 알아요?》, 《좋을대로 하지요 뭐.》 하며 아주 건성으로 대하군 했는데 그는 현옥이의 이런 태도가 마음의 문을 꼭 닫아매고 속으로는 남다른 결심을 품을 때만 나타낸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에게는 마치 아슬한 산꼭대기의 썰매우에 앉은 진호가 출발에 앞서 같이 가자고, 어서 타라고 현옥이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과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눈세계에 매혹돼버린 현옥이가 방정맞게도 벌써 한발을 올려놓은것으로만 여겨졌다. 진호로서야 운명이 가리키는 길이니 할수 없겠지만 무엇때문에 현옥이가 그 썰매를 타야 한단 말인가! 한데도 들뜬 련정에 포로된 현옥이는 다른 발마저 서슴없이 올려놓으려 하고있으니…
그러나 따져보면 썰매정도가 아니였다.
무작정 감정이 내키는대로만 행동하기에 버릇된 진호에게 현옥이를 맡긴다는것은 단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선 마치 날이 선 면도칼이 제일 좋은 장난감이라고 하여 그것을 어린 아이에게 맡기는거나 다름없이 위험천만한 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안돼! 안되구말구!)
명식은 도리를 저었다.
이때 전화종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들기 바쁘게 그는 곧 반색을 지었는데 그것은 기다리던 전화여서도 아니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기때문도 아니였다. 다만 이제부터 치러야 할 어려운 담화를 다시 새겨볼 여유를 얻은것이 기뻐서였다.
《여보시오.》
자기 생각에 옴해있느라고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못했지만 그는 듣기나 한것처럼 《녜, 그렇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어째서 난 이런 의심을 받는걸가?)
창밖을 내다보며 진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문득 한가지 추억이 되살아났다.
무척 오래전 일이긴 했으나 어쩐지 생생한 표상으로 떠오르는것이였다.
…중학교 다닐 때 일이였던가싶다.
그해 겨울 시에서 있은 빙상경기에 참가하느라고 학기말시험을 치지 못했던 그는 미응시과목을 퇴치하기 위해 기하선생을 찾아갔었다.
기하선생은 얼굴에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키다리녀선생이였는데 평시보다 시험으로만 성적을 평가하군 해서 진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별로 미움을 산적은 없었지만 수업때면 한번의 표정변화가 없는것은 물론 마치 록음기를 틀어놓은것처럼 강의안을 그대로 되풀이하는것이여서 진호에게는 그가 꼭 강의실 뒤벽에 세워놓은 대리석조각상처럼 여겨졌었다.
《학급전원이 우등이상의 성적이라는걸 알지요?》
《녜.》
원래 수학과목일반에 흥미를 느끼고있는데다가 며칠밤을 밤패워 준비를 했던지라 진호로서는 선생이 문제를 주기만, 그것도 될수록 어려운 문제를 내주기만 바랐다.
그런데 웬걸, 시험지에 몇자 써준 문제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로도 대답할수 있는 이등변삼각형의 합동조건을 증명하는것이였다.
대뜸 모욕을 당한듯한 분함과 함께 그런 문제를 내주는 선생이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왜요?》
고개를 비틀고 앉아있는 진호를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던 선생은 한숨을 뿜으며 락심천만한듯 중얼거리였다.
《이렇게 쉬운 문제도 못풀다니…》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선생은 다시 책장을 번지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보다 쉬운 문제를 찾고있다는것을 직감한 진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오고말았다.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선생은 진호를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학급의 기하성적은 학년에서 꼴등이예요. 바로 저 진호학생이 락제점수이기때문이예요. 앞으로 학급에선 저 동무에 대한 개별방조를 잘해야겠어요. 알겠어요?》
학급동무들의 불만에 찬 눈길이 쏠릴 때는 물론 성적표에 《6》이라는 수자를 보면서 어머니가 놀랄 때도 그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그처럼 간단한 합동조건은 쉽사리 증명할수 있어도 자기 마음을 증명해보이기는 어려웠던것이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심정이라고 할가, 자긴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았던 일인데 어째서 이런 의심을 받아야 하는지. 그때의 녀선생이 지금앞에 있는 실장이라면 그때의 시험문제는 자기가 원해온 현장탄원이라는 너무나도 단순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한텐 뭔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야 어째서 공정하기로 소문난 이 실장한테서까지 의심을 받는단 말인가!)
어릴 때부터 그는 걸핏하면 마른 때를 벗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런 지청구를 했다.
《원, 무슨 애매한 소리를 듣자고 밤낮 그 버릇이냐? 당장 거두지 못하겠니?》
이젠 그 버릇도 없어진지 오랬건만 여전히 애매한 소리만은 듣게 되는 자기였다.
송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에 진호는 다시 실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화기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있는 명식의 기색은 사뭇 심각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는 표정이였다. 그러나 명식이가 받은 전화란 심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심사를 맡았던 ×공장의 기계장치가 정상가동되고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였다.
이 소식이 그에겐 이제 치러야 할 어려운 담화가 락관적이라는것을 암시하는것이였으나 바로 그래서 그는 더욱 과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다가 현옥이 문제야말로 터놓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정, 부득불 천성에도 없는 미사려구를 붙여가며 에둘러 말해야 한다는 난처한 사정이 그의 표정을 긴장하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물 한번 만나려고 했소, 현옥이때문에 말이요.》
일단 마음을 정하고 결심이 옳다는것을 확신할 때마다 그런것처럼 명식은 두손을 맞쥐여 하나의 커다란 주먹을 만들었다.
《?》
현옥이라는 말에 진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으나 그런 행동이 비굴하게 느껴질수 있다는 짐작으로 하여 다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실장을 대하는 순간부터 바로 그가 현옥이 오빠라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그때문에 조금이라도 감정을 속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절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여긴 그였다. 다만 그로선 이 자리에서 현옥이에 대한 말이 없기만을 바랐을뿐이였다.
그런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하는것과 함께 자기와 현옥이 사이에 있는 이 실장의 존재를 새삼스레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난 여태 둘사이를 좋게 생각해왔소.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싶고… 그런데 어떻소? 그 애가 요즘 좀 들뜬게 아니요?》
《?…》
《처음 출판사에 배치받았을 땐 그래도 제딴의 포부가 있었는데 요즘은 영 안착을 못하거던. …》
어떤 일에서나 사실을 피하고 모가 나지 않게 두리뭉실하게 테두리만 만지는것을 싫어하는 명식으로서는 자기가 지금 진호를 그렇게 대하고있다는것으로 하여 저으기 괴로왔다.
《어떻소? 동무 보기엔.》
《?》
진호는 자기의 신경이 악기의 현처럼 어떤 나사에 감겨 점점 팽팽하게 헹기우는것을 느꼈다.
《하긴 아직 철이 없는데도 있겠지. 그렇지만 동무가 옆에서 좀 잘 타일러주오. 안착해서 일하도록 말이요. 동무도 알겠지만 사랑이란 무엇보다 서로의 뜻을 귀중히 여겨주는데 있는게 아니겠소.》
자기가 속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명식은 얼굴이 뜨거웠으나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내가 못할 말을 한건 아니니까. 한데 이 친구가 내 말의 참뜻을 리해하기나 할가? 제발 짐작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옴짝 안하고 책상아래쪽 어딘가를 응시하고있는 진호의 태도로 봐서는 아직 자기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있는것같았다.하지만 아니였다.
진호는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충분히 리해하고있었다. 리해가 아니라 명백히 듣고있었다.
(타일러주라구? 뜻을 귀중히 여겨주라구? 이거야말로 더는 현옥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닌가! 아니, 당장 손을 끊으라는 선고가 아닌가! 그러니 이제 와선 포부는 물론 순정을 기울인 사랑까지도 의심하는것이 아닌가! 아-)
팽팽하게 감겼던 현이 대번에 뚝 하고 끊어진것을 느낀 그는 불시에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아까보다도 몇배 더한 격분이 온몸을 사로잡는것이였다.
저로서도 무슨짓을 저지를지 모를 그런 위험한 정신상태에 빠져든 순간, 그는 갑자기 어떤 힘이 자기를 힘껏 다잡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옥이의 손길이였고 목소리였다.
《무슨 상관이예요, 오빠가 우리 일에 무슨 상관이예요. 제가 동무를 믿고 리해하면 그만이지 오빠가 뭐예요. 참아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 목소리에 쫓기듯 진호는 부랴부랴 복도로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