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푸른 하늘 푸른 꿈
4
군데군데 쌓여있는 눈무지들은 쨋쨋한 정오의 해빛을 받아 주변을 흥건히 적시고있었다.
그 주위에서는 한패의 조무래기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눈싸움을 하고있는데 그것은 막대기끝에 묻힌 눈으로 상대를 향해 자기 발바닥을 두드려대는 귀여운 눈싸움이였다. 그래도 식은 제법이다.
《돌-기-역》
《쟌-쨔쟈-》
눈덩이들이 어깨우에까지 마구 뛰여올랐으나 돌아서기라도 하면 혹 어린것들의 즐거움에 방해를 줄것같아 현옥은 내처 걷기만 했다.
《달-매-》
《범달이-》
어느새 눈싸움이 칼싸움으로 변했는지 막대기를 휘두르며 마구 내달리는 어린것들이였다.
해방산의 나지막한 둔덕우에 여러채의 독립가옥들과 함께 나란히 자리잡고있는 오빠의 집을 보느라니 오늘따라 별스레 유정하게 느껴졌다.
멀지 않아 오빠와 헤여지게 되리라는 생각은 갖가지 추억을 불러일으켰고 그 추억의 파도는 모든것을 본래보다 더 아름답게 채색하는것이였다.
있겠노라고 한 오빠는 아침부터 직장에 나가고 없었다. 곧 돌아오리라는 형님의 말이였으나 그것도 두고봐야 알 일이여서 아까운 시간을 무료히 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으로 하여 현옥은 은근히 화가 났다.
이런 현옥이의 눈치를 알아차린 영숙은 어떻게든 그를 붙들어두려고 서둘러댔다.
신간잡지들을 응접탁우에 꺼내놓기도 하고 그새 자기가 수놓은 탁상보도 펼쳐보였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시누이를 붙들어놓기가 미타하다고 여겼던지 다시 웃방으로 올라갔다.
경공업위원회산하 어느 연구소의 산업미술가로 일하고있는 영숙은 섬세한 생김새와 딴판으로 무척 푸접이 좋고 활달한 성미를 지닌 녀자였다. 아무리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도 그는 삽시에 간단하게 해결해버리군 했는데 그 해답들은 하나같이 명백한것이였다.
《그런거야 따져보고말고가 있어? 누가 뭐라든 맘내키는대로 해야지 뭐야!》
이러는가 하면
《그렇게 심각해질건 하나도 없어요. 웃고말아요. 그럼 저절로 머리속에서 사라져버릴테니, 자-어서.》 하고 제 먼저 깔깔 웃어보이기도 했다.
한참동안만 그와 마주하고나면 그의 생기가 자기한테 옮겨진듯 했고 마치 경쾌한 음악을 듣고난 뒤처럼 마음이 개운해지는것이였다.
원다반우에 귤을 담아들고 들어온 그는 현옥이옆에 자리를 잡기 바쁘게 한알을 집어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새 왜 한번도 오지 않았어? 무척 바쁜가보지?》
《하는 일도 없이 바쁜걸요.》
《하는일없이 바쁜거야 나지 뭐. 그래서 밤낮 송이 아버지한테 욕만 먹는걸. 어느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놓는다고, 자-》
껍질을 벗긴 귤속을 내밀며 그는 방긋 웃었는데 그것은 이제야 현옥이를 붙들어놓게 되였다는 안도감에서 짓는 미소였다.
《언제나 그저 이래라저래라 하는 훈시지. 직장에서도 그러면 부서사람들이 어떻게 견딜가?》
오빠에 대한 형님의 이런 불평이 사실이 그래서가 아니라 반대로 행복에 겨운 녀인들이 하게 되는 심정의 토로라는것쯤은 현옥이도 알고있었다. 어째서 가정을 가진 녀자들이 자기의 속심을 다르게 표현하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누구나 의례히 그런다는것만은 그도 모르지 않았다.
집에서는 물론 직장에서도 이래라저래라 하고 훈시할 오빠가 아니였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그런것처럼 오빠는 어떤 일도 여유있게 또 정확하게 수행하군 했다.
특히 자기로선 아무리 빈틈없이 준비한 도면이라 해도 거기에서 쉽사리 미흡한 점을 찾아내는것을 볼 때면 어쩌면 오빠가 이리도 출중한 능력을 소유하고있을가 하는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로서는 며칠을 두고 생각해도 결심할수 없는 문제도 오빠는 그 자리에서 명백한 일가견을 피력하는것이였다.
《그 일엔 비치지 말어라. 왜냐하면 아직 내가 그 일에 대한
마치 도면에서 나타난 결함을 지적할 때처럼 이렇게 말할 때면 약간의 론쟁이 오가기 일쑤이지만 오빠는 대번에 반박할 여지없이 명백한 론거를 가지고 자기를 격파해버리는것이였다. 그때마다 현옥이는 어떤 불가사의한 심정에 사로잡히군 했다. 그러나 이상한것은 감정으로는 잘 납득되지 않지만 랭정하게 따져보면 오빠의 분석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는 그 점이였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를 놀라게 하는 오빠의 기질적특성은 자기의 힘과 정당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였다. 자기에게 일반적인 생각하는바를 그대로 표현할수 없는 안타까움과 자기가 믿는것이 혹시 무의미한것이나 아닐가 하는 의심을 오빠는 한번도 체험하는것같지 않았다.
《참!》
갑자기 영숙은 당장 무슨 기쁜 일이라도 일어날것같은 그런 눈길로 현옥이를 쳐다보았다.
《그 동무 잘있어? 진호라는 동무.》
눈길을 아래로 떨군 현옥은 곧 응접탁우에 있는 화보를 손에 들었다.
형님을 대하는 순간부터 오빠가 자기의 결심을 이미 말했을것이고 그것으로 하여 형님이 더없이 놀라와하리라고 여겼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심중한 오빠니까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맘 한구석으로는 어쩐지 서운하기도 했다.
《오빠가 아무 말도 안했는가보지요?》
《무슨 말?》
《그 동무 얘기랑 또…》
《아니!》
머리를 저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아- 그래그래!》 하고 반색을 지었지만 현옥이는 벌써 그의 대답이 자기가 바라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뭐라더라… 노력과 재능에선 평가하지 않을수 없는 동무라던가. 그런데 또 뭐…》
자기를 돌아보는 형님의 눈길에서 이제 해야 할 말이 그리 유쾌한것이 못된다는것을, 그렇지만 어떤것도 속에 품고있지 못하는 천성으로 하여 털어놓는다는것을 직감했다.
《뭐 너무 열중하기 쉬워서 실수도 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나? 그렇지만 어때? 바로 그런 사람이 일을 해도 큰일을 하니 말야.》
《실은 말예요.》
현옥은 자기의 결심을 형님에게 터놓으리라 맘먹었다.
《진호동무 있잖아요, 전 그 동무하고…》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어떤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것으로 짐작하고 대뜸 심각한 표정을 짓는 형님을 보느라니 현옥은 왈칵 웃음이 솟구쳐올라 까르르 하고 웃었다.
《아니, 아니예요. 아무것도 안예요.》
《?》
영숙이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옥이를 쳐다보았다.
이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외투차림을 한 명식이가 문앞에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니? 일요일인데도 영 사정을 몰라주는 친구들이라니!》
피곤에 지친듯한 기색을 띄운채 방안으로 들어서는 오빠를 현옥이는 말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머니도 같이 오시지 않구!》
《오늘도 동에 나가신걸요, 무슨 큰일이나 하시는것처럼.》
《그래?》
말코지에 건 외투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명식은 껄껄 웃었다.
《송이는 왜 보이지 않소?》
《옆집 경식이하고 썰매를 타느라 야단이예요.》
《계집애가 썰매를 타?》
의자를 가득 채우는 둥글둥글한 몸집이며 어느모로 보나 틀에 잡힌 오빠의 거동은 현옥이에게 이전보다 오빠가 한결 살뜰해진것같기도 하고 또 반대로 딴 사람처럼 엄엄하게 느껴지게도 했다. 하긴 이젠 대학을 졸업한지도 10년이 넘고 큰 부서를 맡고있으니만치 그럴법도 한 일이지만.
재털이를 응접탁우에 가져다놓은 영숙은 현옥이를 돌아보고는 방금 하던 자기들의 화제를 다시 꺼냈다.
《오늘같은 날 집에 같이 오시면 안돼요? 진호동무하고 말예요.》
《진호?》
무슨 대꾸를 하려던 명식은 쥐고있던 담배대에 불부터 붙였다. 다시 고개를 들려는데 이번에는 눈을 찌르는 담배연기로 하여 미간을 찌프리며 한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현옥이는 물론 영숙이까지도 그의 이런 태도가 그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드문 일, 즉 특별히 난감할 때만 나타내는 습관이라는것을 아직 모르고있었다. 매사를 정확한 판단으로 대하는 명식이에게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결심이 명백치 않거나 거기에 해당한 리유가 석연치 않는적이라고는 한번도 없었으나 때로는 지금처럼 난처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난처해하는 경우란 아무리 정당한것을 가지고 론증한다 해도 상대가 리해하지 못하거나 리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였다. 누구보다도 그는 엄연한 사실과 그 사실에 따르는 론리를 무시하고 무작정 자기 감정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그때마다 그는 은연중 미간을 찌프리게 되는데 지금도 바로 그것을 예감한것으로 해서였다.
사실 그는 이미부터 현옥이에게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것을 털어놓고 얘기해주고싶었으나 지금단계에선 아무리 명백한 사실들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사랑에 들떠있는 현옥이가 그것을 무작정 반박해나서리라는것을 모르지 않았기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어오기만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젠 더는 잠자코 있을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널 찾은건 진호의 일때문이야.》
워낙 에둘러 말하거나 상대의 비위에 맞춰 표현하기를 싫어하는 그는 꼿꼿한 눈길로 현옥이를 마주보았다.
《그래 넌 그가 어째서 현장으로 가는지 그 리유를 알기나 하니?》
《현장이라니요?》
어리둥절해진 영숙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듯 현옥이를 돌아보았으나 더 놀란것은 현옥이였다.
분명 오빠가 진호에 대해, 그의 탄원에 대해 어떤 의혹을 품고있는것같기때문이였고 그것으로 하여 미상불 자기 결심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에서였다. 더우기 일단 내린 결심에 대해서는 그를 안받침하는 론거가 남달리 명백하고 확고한 오빠여서 그것을 철회시키기란 좀처럼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있기에 불안해지는것이였다.
《무엇때문이예요, 갑자기.》
오누이사이에 심상찮은 감정이 교차되고있다는것을 느낀 영숙이가 이번에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긴 그로선 어차피 그렇게밖에 처신할수 없기도 했지.》
《?》
현옥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오빤 의혹이 아니라 그의 탄원을 정면으로 부정하고있는것이 아닌가!
《어차피라니요? 그건 무슨 말이예요?》
속심을 꿰뚫어볼수가 없어 두려운 생각이 드는 오빠의 눈을 현옥은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너의 결심을 단순하게만 보지는 않아. 너도 이젠 스물네살이니까. 그러나 사람이란 일생에서 분별을 가리지 못하는 때도 있거던. 특히 청춘기엔 말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는 맹목적으로 뛰여들기가 쉽지.》
《맹목적이라구요?》
혼란되는 의사를 수습하기 어려웠으나 현옥은 있는 힘을 다해 침착하려고 애썼다. 이런 땔수록 용의주도한 오빠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고집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사리정연한 리치, 청춘에 대한 인생과 생활에 대한 뚜렷한 신념이 있다는것을 보여주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였다.
《아니예요. 오빤 뭔가 잘못 리해하고있어요. 하긴 절 그렇게 볼수도 있겠지요. 전 여태 너무나도 응석꾸러기로 자랐으니까요. 그렇지만 오늘에
와선 그렇게 산다는것이 무의미하다는걸 알게 됐고 또 그렇게 살아온
전 이제라도 보답을 하고싶어요. 나를 키워준 당에, 고마운 우리 제도에, 그래서 그걸 실천으로 옮기려는거지요, 진호동무와 함께. 이게 분별없는 처산가요? 맹목적인건가요?》
《…》
영숙은 너무도 심각한 문제여서 더는 끼여들 생각을 못하는듯 숨을 죽인채 앉아있었다.
《난 너의 결심자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없어. 그러나 한가지만은, 즉 리성이 맹목적인 신뢰로 바뀌여 사실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너의 주관만은 깨닫도록 해야겠단 말이다. 알겠니?》
현옥이가 제법 남들을 놀래우는 열정과 두뇌를 가지긴 했지만 순간순간의 인상에 사로잡히기 쉬워서 곧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군 하는 그런 소박한 처녀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명식이였으나 지금은 자못 심중한 기색을 띄운채 말했다.
《보건대 넌 확실히 아직 그의 현장탄원이 어떤 사정에 의한것인지도 모르고있어.》
《제가 왜 몰라요?》
《글쎄 모른다니까…》
담배를 재털이우에 걸쳐놓으며 이제부터 할말에 대한 의의를 부여하려는듯 명식은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그럼 내 얘기하지.》
그는 또다시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나라의 연료를 만들어야 해. 그게 바로 주체야금법을 실현하는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도 작년에 석달이나 현지에 가있지 않았니. 제철소에 말이다. 구체적으로 따져본 결론이 뭔가? 지금단계에선 도저히 대용연료, 즉 우리 나라의 연료를 쓰기는 어렵다는것이였어. 왜냐하면 열량과 연재때문이였지. 우선 그 연료를 쓰면 1 800°의 용해온도를 보장할수 없는데다가 로구조에 막대한 영향까지 미치게 되거던. 물론 이외에도 사소한 결함들이 많지만…
우린 이 연구결과에 대해 당에 보고올리면서 아직 로에만은 중유를 계속 취입할수밖에 없다는데 대해서도 제기했지. 모름지기 이제 거기에 대한 해당한 대책이 취해질거다. 그런데 진호 그 친구는 제 고집대로 자기가 연구해오던 연료를 공장에 시험도입까지 했지. 그것도 부에서 반대하리라는것을 알고 아무 토론도 없이 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됐니? 숱한 자재와 설비가 투하된 다음에야 그게 아무런 의의도 못가진다는걸 알았거던. 나도 그 사고심의에 참가했지만 국가에 적지 않은 손실을 끼쳤단 말이다. 자- 이 책임을 누가 지지? 누구든 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거야 명백한 일이 아니냐.》
《그럼 그 동무가 사고때문에 현장으로 간다는거예요?》
현옥은 경악에 차서 부르짖었다.
《그건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야, 누구나 다 그렇게 인정하고있고. 너도 생각해보렴. 그래 지금 누가 이렇다할 담보도 없는 기술안을 위해 현장으로 간단 말이냐? 더우기 이미 불가능한것으로 당에까지 보고된 기술안인데 말이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물론 그가 사고는 냈어요. 그렇지만 그는 대학때부터 그걸 연구해왔어요. 그 하나를 위해 모든걸 바쳐왔단 말이예요.》
《대학때부터가 아니라 10년을 하나의 과제에 바친 사람도 많아! 문제는 연구를 해왔다는것이 아니라 사고를 냈다는데 있어! 이걸 봐라!》
명식은 한결 나직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회의 매개 성원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맡겨진 특정한 사업을 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있는게 아니냐. 때문에 누구에게나 자기의 궤도가 있고 그 궤도에서만 달려야 하는거야. 바로 그게 사회와 조직의 요구니까. 아무리 다른 길로 가고파도 주어진 궤도를 함부로 벗어나선 안돼!
그건 마치도 하나의 과잉분자가 물질의 규칙적인 운동을 파괴해버리는것처럼 그런 사람은 본의아니게 다른 사람들, 나아가서는 집단까지도 혼란시켜놓기때문이지. 이게 바로 우리 생활방식이고 이것을 어길 땐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것이 또 우리의 생활법칙이야.》
《아니예요, 그런게 안예요. 오빤 아무것도 모르고있어요.》
위급한 정황에 부딪칠 때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정한 한도내에서 견지하던 자제력을 잃어버린 현옥은 벌써 자기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할 능력도 의지도 다 잃어버리고말았다.
《모르고말고요.》
현옥은 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가 현장으로 가는걸 누가 지지해준줄 알아요? 당위원회에서 해주었단 말이예요. 그렇다면 어째서 당위원회에서까지 지지해주었겠어요?》
명식의 입가에는 곧 쓸쓸한 미소가 어렸다.
《거야 지지해주구말구. 그래 앞길이 구만리같은 사람한테 딱지를 붙여 내보낼상싶니? 사람문제를 그렇게 소홀히 취급하지는 않는 법이야. 더우기 그는 자기가 어떻게 되리라는것을 알고 한발 먼저 당위원회에 찾아가 제철소에 보내달라고 했거던. 얼마나 역바른 처사냐. 어떻게 보면 현명하기도 하고. 그러니 당위원회에서야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는수밖에.
그런데 문제는 그가 당조직의 관대한 처사를 악용하여 사람들을 속이는데 있지. 너한테처럼 말이다. 그래 네가 이걸 알기나 하니? 이런걸 알고 한 결심이냐 말이다.》
《?》
현옥이의 두눈은 갑자기 무엇에 질겁한 사람처럼 대번에 휘둥그래졌다.
(설마? 아니야! 진호동문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그처럼 진실한 그가 사람들을 속이고 나를 속인단 말인가! 어떻게 그처럼 비렬하게 자기를 위장한단 말인가! 그럴수 없어! 절대로 그럴수 없어.)
심장이 당장 흉벽을 헤치고 밖으로 터져나올것만 같아 그는 저도모르게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사실 명식은 진호를 헐뜯거나 과장하여 비난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가 진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그의 현장진출을 사고에 대한 책임, 생활공식을 어긴데서 오는 필수불가결의 조치로밖에는 달리 볼래야 볼수 없기때문이였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그에게는 하나같이 다 명백했는데 그것은 그가 세상만사를 대하는 척도가 남달리 명료한데 있었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그는 거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 요소들과 과정들, 특히 그 일에 내포돼있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선 일체 무시하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 할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타산에 기초하여 결론을 도출해내는것이였다. 그 엄밀한 타산이야말로 심사사업을 책임진 자기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필수적이며 또 제일 중요한 무기라고 여기고있었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한테서는 왕왕 《절대치》라는 비난을 듣는 경우가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사소한 결함도 나타낸적이 없은것으로 하여 언제나 남다른 평가를 받아오는 그였다.
《…》
현옥이는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무작정 오빠에 대한 불만이 솟구칠뿐이고 그만치 진호를 옹호하고싶기만 했다. 당장 눈물이 쏟아질것같아 그냥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좋아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현옥은 단호한 눈길로 오빠를 쏘아보았다.
《오빠가 그 동물 어떻게 본대두 좋아요. 전 결심대로 하겠어요. 이젠 저도 자기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것쯤은 알고있으니까요.》
《누이!》
총총걸음으로 나서는 현옥이를 따라가며 영숙이가 소리쳤으나 명식이가 만류했다.
《놔두오.》
《그럼 어째요?》
《그만큼 얘기했으니 저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남들이 엄두도 못낼 일을 곧잘 결심할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하는 현옥이지만 그런 처녀들이 흔히 그런것처럼 인차 또 자기에 대해 뉘우치기도 한다는것을 알고있는 명식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불안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는 현옥이같이 현실을 공식처럼 받아들이는 단순한 초학도들일수록 일시적인 충동에 못이겨 엉뚱한짓을 저지르기 십상이기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