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푸른 하늘 푸른 꿈
1
누구나 애타게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질 땐 기쁨과 함께 놀라움도 자못 큰 법이다. 바라던 소망이 간절했던것일수록 기쁨보다 놀라움이 크고 그 놀라움으로 하여 모든 사실이 더 의심스럽기만 한것이다.
진호도 바로 그런 심정에 휩싸여있었다.
너무나도 벅찬 환희의 충격으로 하여 그는 지금 자기가 혹시 꿈을 꾸고있거나 지나친 기대로 하여 가지게 된 어떤 착각이 아닌가싶기만했다. 어떻게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이처럼 쉽사리 풀린단 말인가? 어떻게 그처럼 바라마지 않던 숙망이 이렇게 일시에 이루어진단 말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을수가 없었다.
(현옥이가 그런 결심을 다 하다니?)
그는 옆에 있는 처녀를 감히 쳐다보기조차 어려웠다. 자칫 무슨 말을 잘못하거나 고개를 얼핏 들기만 해도 이제까지의 모든 사실이 허황한 꿈으로 흩어질것같아서였다. 발밑에 밟히는 뽀드득뽀드득 하는 눈소리조차 저어스럽기만 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혹시 제가 정말 그런 결심을 했을가 하고 의심하는게 아니예요?》
그랬다. 바로 그 결심에 놀라지 않을수 없는 진호였다. 그는 아직도 현옥이가 자기의 처지를 어떻게 리해하고 이런 용단을 내렸겠는가 하는것이 못내 의문스럽기만 했다.
며칠전 현지로 가게 된것이 확정된 그 순간부터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현옥이가 자기를 어떻게 보며 어떤 태도로 나올것인가 하는 이 한가지 생각뿐이였으나 그때마다(아무렴 현옥이가 무엇때문에 나를, 그것도 사고까지 내고 현장으로 가게 된 나를 따라나선단 말인가!) 하는 서글픈 심정에 젖어들군 했었다.
워낙 처녀들이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이런데서는 나약해지기 쉽다고 하지 않는가! 더우기 이제 겨우 눈뜨기 시작한 자기들의 사랑임에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게 무슨 큰일이겠어요. 일을 하느라면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수도 있는거지요. 저도 제 결심에 대해 곰곰히 따져봤어요. 저의 행동이 어떤 흥분이 아닐가 하고, 그런 행동이 도리여 동무를 괴롭히게 되지나 않을가 하고요. 그렇지만 전 저의 결심이 옳다는걸 또 이런 땔수록 응당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걸 알았어요. 그래서 어머니한테도 벌써 다 말씀드렸는걸요.》
《어머니한테?》
진호는 저도 모르게 굳어지고말았다.
《처음엔 꼭 가야 하느냐, 여기도 공장이 많은데 왜 그리 먼데로 가느냐 하시더니 마침내는 승낙하시더군요. 아마 저의 집요한 공세에 더는 견디기 어려우셨나봐요. 어머니도 이젠 우리 관계를 비슷이 짐작하시거던요.》
《…》
진호는 어떻게 이런 엄청난 결심을 태연한 표정으로 말할수 있는지 처녀의 대담성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현옥이의 결심이 혹시 어떤 단순한 호기심과 일시적인 충동의 발현이 아닐가 하는 의혹을 다시금 금할수 없었다.
《제가 떠나면 오빠네 집에 가계시겠다나요. 그편이 뭐 저의 시중을 들기보다 훨씬 편할거라시면서-》
(오빠?)
그제야 진호는 부의 새 기술심사실장으로 일하는 그의 오빠에 대한 생각에 미쳤다. 한 직장에 같이 있으면서도 어째서 여태껏 그에 대한 생각을 못했는지 알수 없었다. 사람이란 이런 엄연한 사실도 때로는 망각할 때가 있는 모양인지.
그는 자기가 망각이 아니라 현옥이에 대한 생각 하나에만 몰두한 나머지 주위에 대해서는 생각할수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부에 배치받은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서로 다른 부서여서 상종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도 명식에 대해서는, 특히 그의 남다른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들은적이 있었다.
(그렇다-)
지나친 흥분을 느낄 때마다 그런것처럼 한껏 심호흡을 하고난 그는 온몸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는 두손을 외투주머니에 찌른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걷고있는 현옥이를 새삼스런 눈길로 지켜보았다. 언제나 무슨 생각에 젖어있는듯 한 그윽한 눈매, 웃을 때마다 잔잔한 미소가 살풋이 어리는 자그마한 입술, 그러면서도 이런 모습과 대조되여 더욱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경쾌하면서도 발랄한 몸가짐. 과연 이 처녀가 나를 따라 제철소로 간단 말인가!
모든것이 의심할바없는 사실로 확증된 이제 와선 응당 기뻐하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그만한 고마움이라도 표시해야 하련만 어째선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꿈으로만 여겨지던것이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것이 확증된 이 순간에 와서는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감정이 지배하는것이였다.
(이거야 뭐 사실 응당한 일이 아닌가! 여기에 무슨 기쁘고 고마와 할게 있단 말인가!)
그는 저로서도 이런 감정의 도약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와서 기쁨을 나타낸다는것이 현옥이의 진정을 믿지 않았다는것으로, 그의 헌신을 비속화하는것으로 될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하긴 이만한 담보도 없는 처녀를 내가 사랑했을리 없지! 암, 없고 말고.)
《으흠!》
그는 괜히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힘을 주어했다.
새벽까지 내린 눈으로 하여 거리는 온통 소복단장이였다. 오히려 따뜻한감조차 든다. 유보도는 물론 강기슭에 우쭉삐쭉 어지러이 쌓여있던 성에장들까지도 지금은 한껏 풍만하게 부풀어있었다.
유보도에서 벗어나는 큰길쪽으로 진호가 접어들자 갑자기 걸음을 멈춘 현옥이가 의아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또 그리로 가요?》
《그리로라니?》
현옥이가 가리키는 곳이 어디라는것을 짐작한 진호는 곧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왜 싫소?》
《전 차마 못가겠어요.》
진호는 다시금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인사라도 하고 가야지 그냥 가서야 되겠소? 이젠 진짜 론문을 완성하러 간다고 말이요.》
그들의 산보길은 언제나 이 유보도였었다.
그들은 마치 그동안 하지 못했던 교제를 이제라도 봉창하려는듯 하루도 빠짐없이 유보도로 나왔던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에 불타는 청춘들이라 해도 또 아무리 아름다운 설경과 자연미의 그윽한 정취가 선경같아보이는 유보도라고 해도 한겨울의 혹한속에서 오래 거니기는 어려운 법이다. 한두번의 왕복쯤이면 몰라라 그 이상이면 벌써 몸이 얼어들고 턱이 떨리기마련이다.
(젠장! 사랑하는 처녀하고 같이 있으면 추운줄 모른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군! 우선 몸부터 녹이고봐야지 말도 못하겠는걸.)
어느날 추위에 견디다못해 그가 현옥이를 이끌고 들어간것은 유보도 바로 옆에 있는 민속박물관이였다.
접수구에 있던 안내원이 어찌도 반갑게 맞아주는지 이들은 처음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그의 친절이 어디에 기인되는가를 진호는 박물관을 돌아보면서야 깨달을수 있었다.
4층으로 된 커다란 진렬관을 다 돌아볼 때까지 자기들 두사람외 관람자라고는 단 몇명밖에 없었던것이다.
《좋은데, 이제부턴 내내 여기 오기요.》
뜨뜻한 온기가 언몸을 누긋이 풀어주는데 만족을 느낀 진호는 굴지의 피서지라도 발견한 사람마냥 흐뭇한 기분이였다.
정말 다음날부터 그들은 적당한 산보끝엔 서슴없이 박물관으로 뛰여들군 했다.
《보통열성이 아니군요. 흔히 젊은 사람들은 민속에 관심을 돌리지 않기 십상인데.》
진정으로 감탄해마지 않는 안내원이였으나 또 그만치 진중한 진호의 대꾸였다.
《그럴수밖에요. 우린 고고학과에 다니는걸요. 지금 졸업론문을 준비하느라고…》
《글쎄 어쩐지…》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진호는 자기의 희망, 강철용해를 위한 우리 나라의 새 연료에 대하여, 그 기술안수행에서 나서는 애로에 대해 또 그 타개책에 대해 현옥이에게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언제나 구석기시대의 고인돌이 아니면 원시인들의 토굴집앞에서 벌리는 토론이였지만 내용은 아직 현실에도 없는 미래의것이였다.
《론쟁이 활발한걸 보니 몹시 어려운 문젠가보지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입가에 여느때없는 미소를 머금고있는 안내원앞에서 현옥이는 속이 한줌만 했으나 진호는 이번도 서슴없이 되받았다.
《아닌게아니라 좀 힘이 들군요. 우리가 론증하려는건 아직 학계가 인정하지 않는것이니까요.》
《그렇겠지요. 강철이니 연료니 하는걸 가지고 고고학을 론증한 실례는 아직 없으니 말이예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그 론증이 성공하길 바래요.》
《?!》
안내원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어렸으나 이들은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아무리 추워도 더는 박물관에 들어갈수 없었던 이들이였다.
모란봉을 끼고도는 강변길은 호젓했다.
저녁해빛에 싸인 릉라도일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겁이 나요. 앞으로 어떤 일에 부닥칠지, 그 시련들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전 그런 체험이 너무도 부족하거던요. 현실을 안대야 고작 대학때 실습을 가본것뿐이니까요.》
걱정말라고, 그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내 한몸으로 막아서리라고 말해주고싶고 또 그런 시련도 없이야 무슨 청춘이며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말해주고싶었으나 진호는 그런 말이 앞날에 대한 지나친 과신같아 참을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모든것이 자기한테 달려있다는 생각, 새 연료를 만들어내는가, 못내는가 하는것은 물론 현옥이의 앞날까지도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흠칫하지 않을수 없었다. 틀림없이 어떤 공포라고 해야 할 감정이 일시에 가슴을 쭉 훑어내리는것이였다.
그는 그것이 한 처녀의 운명을 책임지게 되였다는 의무감에서 오는 불안이나 앞으로 자기들이 직면하게 될 난관에 대한 두려움에서보다도 바로 그것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하고 부담을 가증시키는 일,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이미의 쓰라린 실패로 하여 느끼게 되는 일종의 후유증이라는것을 감득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렴! 다시야 그런 일이 있을텐가!)
한번 된타격으로 격파당했던 선수는 자기의 부족점을 퇴치하기 위해 빈틈없는 준비를 한 다음에야 새 경기에 들어가지만 그래도 어차피
기술국에 배치되자마자 그는 대학때부터 연구해오던 자기의 새 연료(중유를 대신할수 있는 우리 나라의 고체연료)를 수도의 한 강철공장에서
시험했는데 그것으로 하여 그만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던것이다. 대학기간 3년동안을 고심해오던것이여서 어느 정도
이 일로 하여 그는 번민에 휩싸였고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저 친구 일이 무사치 못하겠는걸!》
《할수 없지! 응당한 책임을 지는수밖에!》
사람들이 자길 보며 이렇게 수군거린다는것을 모르지 않은 그였지만 속으로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철소에라도 보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고 그런 자기의 심정을 당위원회에 찾아가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었다.
사실 그는 자기의 연구과제로 하여 대학을 졸업하고는 제철소에 가려는것이 소원이였는데다가 이번 사고를 통해 현장에 가야 되겠다는것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던것이다. 그것은 실패의 원인이 현장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그에 근거한 기술적인 료해가 부족한데도 있다는것이 판명되여서였다.
그러나 정작 제철소로 가는것이 결정되자 그는 어떤 불안에 휩싸이지 않을수 없었다. 당초의 희망이고 간절한 소원이긴 했으나 그리로 가게 된것이 애초의 지향때문이라기보다 사고를 낸 책임으로 하여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기때문이였다.
그때마다 속으로는 (뭘, 차라리 잘됐지. 되려 바라던 일을 할수 있게 됐으니까.) 하고 위안하군 했으나 그것이 한갖 자기를 기만하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그
사람들은 흔히 누구나 자기가 기어이 하고야말겠다고 속으로 별렀던 일도 옆에서 누가 그걸 하라고 하면 그 일에 대한 흥미와 의의가 덜해질 때가 있는데 진호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자기의 지향을 리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필경 자기의 처지를 다만 무모한 기술안의 실패로 인한 책임으로밖에 치부하지 않으리라는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화가 터져오르면서 한숨이 새나오군 했다.
특히 현옥이가 자기를 어떻게 여길가 하는 짐작에 부딪칠 때마다 그는 못내 두려움을 금할수 없었다.
실패로 인한 책임과 애초의 희망! 공교롭게도 기쁨과 치욕이 하나로 얽혀있는 이 사태를 그가 과연 어떻게 리해하고 받아들일것인가! 모르긴 해도 현옥이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 이 하나의 결론에 따라 바야흐로 싹이 트기 시작한 자기들의 사랑도 결정되리라고 생각해온 진호였다. 그런데 현옥이는 고맙게도 자기의 진정을 이처럼 깊이 리해하고있는것이 아닌가!
(누가 뭐라든 이제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옥이가 나를 믿어주는데야.)
발가우리하게 상기된 현옥이의 얼굴을 보느라니 그가 여느때보다 몇곱절이나 더 자기에게는 과만한 존재로 여겨졌고 자기에게 차례진 이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는 불같은 각오가 솟음치는것이였다.
(한데 내가 과연 그 새 연료를 만들어낼수 있을가?)
이전에는 그처럼 성사할 희망이 있는것이라고
《어떻소 현옥동무, 동무생각엔 우리가 거기 가서 새 연료를 만들어낼것같소? 한다하는 사람들도 도중에서 포기한걸 우리같은 햇내기가 만들어낼것 같은가 말이요.》
《왜요?》
눈으로만 웃는 현옥이의 미소는 틀림없이 과묵하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헤덤비기도 잘하는 다정한 사람의 버릇을 감촉한데서 오는것이였다.
《그럼 저의 계획을 말해볼가요?》
마치 미리 말하기는 아까운것을 털어놓는다는듯 한 못내 아쉬워하는 현옥이의 기색이였다.
《우린 우선 무엇보다 단계별목표부터 세워야 한다고 봐요. 새 연료가 열량을 담보하게 하는 첫 단계에 이어 강질과 로구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게 하는 두번째 단계 그리고 그 연료를 공정으로 도입하는 마지막취입단계를 말이예요. 여기에 나서는 구체적인 과업들을 순차별로 책상우에 써놓거던요. 동문 동무대로, 전 저대로.》
《그래서?》
현옥이의 머리속에는 벌써 숱한 계획들이 장만돼있는것같았다. 그는 그 계획들을 진호가 듣기만 해도 환성을 올릴것이라고 미리부터 확신하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그담에야 서로 경쟁이지요 뭐.》
《경쟁?》
《한데 한가지 조건은 수행한 지표를 지울 땐 꼭 파란 색갈로 지워야 한다는거예요.》
《그건 또 왜?》
《푸른 꿈의 실현, 그래서 파란색이지요. 그 지표가 파랗게 물들 땐 우리의 꿈이 실현된 때가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기쁨으로 충만된 현옥이의 얼굴에는 그 어떤
《그렇지만 경쟁은 틀렸소.》
《어째서요?》
《경쟁이야 어디까지나 상대가 되여야 하는게 아니요. 나야 대학때부터 해오던 일이지만 동무야 전혀 생묵이니까.》
《어머- 생묵이라뇨? 제가 야금기계를 전공했다는걸 잊었어요? 무대가 제철소니만치 경쟁조건으로 치면 열공학을 한 동무보다 오히려 제편이 유리할거예요. 지금도 금속편집부에 있고.》
《그래도 그렇지, 아무렴…》
말할 여지 없다는듯이 진호는 손을 내저었다.
흔히 뭔가 기쁘고 즐거울 때면 그는 부러 이런 태도를 취하군 했는데 그것은 그때마다 현옥이를 안타깝게 만들어놓기 위해서였다.
《좋아요. 그럼 어디…》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던 현옥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곧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길 봐요. 저기 눈덮인 돌층계가 있지요? 저기에 어느쪽 발이 먼저 닿는지 걸어봐요. 만약 오른발이면 제가 경쟁에서 이기는거예요. 어때요?》
《좋소! 그렇지만 왼발일 땐?》
《동무라고 해두지요.》
《흠! 내가 왼재기라는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뜻밖에도 매우 심각한 의의를 갖게 된 걸음을 조심스레 한발자국한발자국 내디디며 진호는 《내다, 아니다, 내다, 아니다.》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안예요.》
눈우에 찍혀지는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옆에서 따르던 현옥이가 별안간 진호의 팔을 붙들었다.
《너무 폭을 크게 짚었어요. 봐요.》
《그럼 대신 요다음번은 좁게 내딛지. 이렇게.》
이윽고 이들은 돌층계가까이에 이르렀다.
분명 오른발이 닿아야 할 거리였으나 현옥이를 돌아본 진호는 껑충 몸을 솟구며 두발로 계단에 뛰여올랐다.
이미부터 그러리라는것을 짐작한듯 입을 틀어막고있던 현옥이는 허리를 비틀며 깔깔 웃어댔다.
《좋아요. 그게 더 좋아요.》
현옥이의 맑은 웃음소리에는 앞으로 다가올 생활에 대한 기쁨과 환희가 한껏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