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제 3 장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흐르는가

9

 

전번주에 계획했던대로 노래경연의 날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노래경연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흥뜨게 하는 속에서도 직장별경쟁열로 끓게 했다. 생산이 끝나기만 하면 노래련습을 하느라 직장들이 떠들썩했다. 어디서나 손풍금소리, 기타소리로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신형일은 자기도 지배인과 2중창련습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어서지 못했다. 방금전에 문짬에 끼여있는 편지를 보고난 타격이 너무나 커서였다. 그것은 수려의 편지였다.

《비서동지,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뵙지도 않은채 몇자 남기고 떠나간 저를 욕하시리라 봅니다. 그러나 달리는 할수 없는 접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속에 쌓인 일도 모르고있다가 이제야 알고나니 얼굴을 들수 없습니다. 얼마 있지 않은 공장에서의 생활은 저에게 많은것을 틔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바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공장을 뜬다고 아주 갔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제 꼭 떳떳한 몸으로 비서동지앞에 나타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강수려 올림. 공장을 떠나면서.》

신형일은 묵묵히 편지의 글발을 내려다보았다.

한 인간이 말년을 떳떳하게 결속하지 못한 일이 너무나 아쉬워서 또 그대로 방임할수가 없어 시작한 일이 이렇게 사방으로 번져지다니.

신형일은 언제인가 달밝은 날 밤에 자전거련습을 하는 천호와 수려를 본적이 있었다. 수려가 공장과 더 가까와지기를 바라는것은 이루기 힘든 욕심으로만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현실로 되여가고있는것을 목격하고 너무 기뻐서 차에서 내려 한동안 그들을 지켜보기까지 했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이미 대학시절에 인연이 있었다고 했다. 하나의 지향을 가지고 가까와지던 그들의 사이는 아버지들의 관계로 버그러지고있다. 활기를 띠며 진행되던 로인네들의 집필조도 이 며칠째 서리맞은 쑥밭이 되고말았다고 한다. 차학선이가 나오지 않아서였다.

차로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 해임철직되고도 꿋꿋이 오리 기르는 일을 변함없이 해온 그가 이번 일에는 주저앉는가?!

아들인 천호가 제일 가슴에 걸릴것이다. 신형일은 수려가 강시연의 딸이라는것을 차학선에게 미리 선통해주지 못한걸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락심하지 않는건데.

신형일은 끝내 노래련습할 생각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여 가슴이 답답할 때면 의례히 오리사로 가군 했다. 밤에도 잠들줄 모르고 먹이를 먹거나 알낳이를 하는 종금사에서 한알한알 알을 거두느라면 막힌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이 쑥 열려지군 했었다. 그러나 오늘 일은 오리사로 간다고 해서 풀려질 문제가 아니였다. 신형일은 누구의 눈길을 피하기라도 할듯 구내길을 벗어나 호동뒤길에 들어서서 고개를 수굿한채 걷기 시작했다.

수려가 썼던 편지글발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떠난것을 알고 천호가 얼마나 실망할텐가. 발효제생산의 공업화를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가림없이 일하고있는 차천호가 손맥을 풀고 나앉을 생각을 하니 자꾸만 다리가 휘친거렸다. 이들의 관계가 부디 좋게 되기를 바랐는데 서로 헤여지는것으로 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들의 문제는 공장의 현대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칠것이다. 이것은 결코 차천호 개인에 한한 일이 아니였다.

저도 모르게 오리사로 향했던 걸음을 되돌려세우던 신형일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맨끝의 호동에서 차학선이가 무거운 걸음으로 나오고있었던것이다. 지금은 그 누구와도 만나고싶지 않았던 신형일이였지만 차학선이만은 례외였다.

《차학선동지!》 신형일은 차학선을 껴안기라도 할듯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루새 폴싹해지고 가늘어진듯한 팔목이 잡혀지자 금시 눈물이 나올것같았다.

《허, 오리들을 보면… 무슨 일이든지 손을 잡으면 마음이 편할줄 알았는데 생각대로 안되는군요.》

축축해진 눈가를 애써 돌리며 하는 그의 말은 예리한 칼이 되여 신형일의 가슴을 찌르는것같았다.

신형일은 말없이 차학선의 팔을 잡아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었다.

차학선은 아무말도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대로 걸었다. 엄마를 따르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되여 순순히 따라오는 차학선이와 발을 맞추며 신형일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언제인가 신형일은 아버지와 함께 모란봉에 오른적이 있었다.

산길이 점점 경사지자 아버지의 숨결이 가빠졌다. 슬며시 팔굽을 잡아주자 아버지가 어설핀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아직은 일없다. 그런대로 나 혼자 올라가련다.》

아버지와 차학선은 동갑내기다. 둘이 다 전쟁의 불구름속에서 소년시절의 마지막시기를 총총히 마치고 일찌기 뼈를 굳힌 그들이였다. 아직도 우리 혁명의 기틀을 든든히 밑받침하는 로세대인데 오늘 보니 차학선은 다된 로인으로 여겨졌다. 이제껏 그 넓은 공장구내를 오가던 정열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얼마나 타격이 컸으면, 얼마나 마음이 괴로왔으면 그러랴싶어 눈앞이 흐려졌다. 그들은 한동안 걸었다. 신형일이도 말이 없었고 차학선 역시 아무말도 없이 신형일에게 온몸이 실린채 끌려오다싶이 따라왔다.

갑자기 앞이 훤해졌다. 어느새 동뚝이 바라보이는 공장후문이였다. 차학선이 신형일에게서 팔을 빼며 앞을 여겨보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계시던 곳이군. 여기서 수령님께서는 저기 앞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셨다우.》

신형일은 가슴을 젖히고 앞을 바라보았다.

공장의 연혁사를 연구하여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의 력사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수령님 서계시던 자리라니 선뜻 발을 옮길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지요. 우리 오리공장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여기 이 자리에 서시여 우리 지배인에게 저기 앞에 보이는데가 어디인가고 물으시였습니다. 동뚝너머 대동강이 흐르는곳이 어딘지 몰라서 물으시는것이겠습니까. 우리 지배인이 머뭇거리다가 만경대라고 말씀올리였지요.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우. 여기가 만경대 앞동네라고 말입니다.》

신형일은 뭉클해나는 가슴을 안고 앞을 여겨보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뒤에 선 우리들을 정답게 바라보시며 여기에 2층, 3층짜리 아빠트를 짓고 만경대를 바라보면서 문화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신형일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말씀은 정녕 이 고장사람들이 지난날의 락후하던 흔적을 없애며 만경대 앞동네에서 산다는 영예와 긍지를 간직하고 언제나 만경대를 바라보며 더없이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시는 기대와 믿음이 담기신 사랑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우리 저기로 더 나갑시다.》

그리고는 차학선의 팔목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택마을을 지나 그길로 곧장 동뚝으로 올라갔다. 잔잔히 흐르는 대동강너머 솟아있는 만경봉이 반기듯 다가왔다.

푸르청청한 소나무의 기상이 그대로 어린 만경봉을 가까이하고보니 숭엄한 생각으로 가슴이 달아올랐다.

차학선이도 아까와는 달리 가슴을 쭉 펴고 강건너편의 만경봉을 이윽토록 바라보더니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서고보니 저기 만경대쪽에서 우리 수령님 부르신 노래소리가 금시라도 들려오는것같구만요.》

수령님께서 노래를 부르시다니요?》

신형일은 처음 듣는 그 말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수령님께서 우리 두단땅의 오리떼를 보시고 그렇게 기뻐하신 얼마후에 만경대닭공장이 일떠섰다우.

기사장사업을 갓 시작한 나는 그해 봄 만경대닭공장에서 있은 가금부문 기술일군들의 강습에 참가했지요. 3일간의 강습이 끝났지만 강습내용과 현장에서의 도입을 더 구체적으로 보고싶어서 공장에 남아있었다우. 그런데 그 시각 어버이수령님께서 외국수반을 동행하고 공장을 찾으신다는것이 아니겠소. 나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여나갔지요. 공장에 도착한 손님들이 벌써 구내에 들어서서 떠들썩 환성을 올리고있더군요. 봄철이라 신록이 짙고 어디서나 들꽃향기가 풍겨나는 아름다운 풍치속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닭우리들은 정말 볼만했지요. 호동안은 더 훌륭했구요. 기계화, 자동화된 5단닭상자들이 줄을 지어 꽉 들어차고 칸칸마다 앞창살밖으로 숱한 닭들이 목을 빼들고 먹이를 쪼아먹느라고 여념이 없는 광경을 보며 손님들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다우. 그러다가 아래우 기계대차가 동시에 움직이면서 자동적으로 먹이를 나르고 알을 거두고 배설물을 쳐나가는것까지 보고서는 너무나 희한하여 어쩔줄 몰라 사진을 찍으며 돌아가더군요.

이윽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밖으로 나오시였지요.

앞에서도 뒤에서도 고르로운 기계동음과 닭울음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고 닭알을 가득 실은 운반차들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 공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같은 광경이였지요.

그 풍경을 미소속에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용히, 그러면서도 격정에 넘쳐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효성어린 좁쌀 한말… 하는 노래 말입니다.

처음엔 너무나도 기쁘시여 수령님께서 노래까지 부르시누나 하고 벙글써하던 나의 입술이 그만 실그러들었고 그다음엔 걷잡을수없이 눈물이 쏟아졌다우.》

끝내 차학선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비칠거렸다.

《차기사장동지!》 신형일은 얼른 차학선을 받들어주었다. 실은 차학선을 부축하는것이 아니라 자기를 다잡지 못해 그에게 의지하는 심정이였다. 눈앞이 흐려오고 가슴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꼭 그날의 어버이수령님앞에 선듯 마음은 끝없이 경건해졌다.

아, 그처럼 기쁜 날 하많은 노래가운데서 어찌하여 우리 수령님 부디 그 노래를 부르셨으랴.

소사하의 키낮은 초가집에서 앓고계신 어머님께 좁쌀 한말 가지고가신 어버이수령님께 절절히 하신 어머님의 당부를 전하는 그 노래.

시련에 찬 항일의 결전을 헤쳐오시며 우리 수령님께서 어느 하룬들 어머님의 그 당부를 잊은적 있었으랴. 하기에 만경대닭공장에서 닭알이 쏟아지고 맞은켠 두단땅에선 흰오리떼가 구름처럼 흐르는 이 장관을 어머님 살아계시여 보신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안으신 우리 수령님께서 만경봉하늘가를 바라보시며 노래를 부르신것을 생각하니 끓어오르는 가슴을 달래기 힘들었다.

그 순간 신형일은 그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우리 종업원들이 다 알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목격자인 이 차학선을 통해서 다시 듣게 된다면 그 감동은 몇십배로 클것이다. 노래경연이 끝난 다음이 제일 좋은 기회였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우리 종업원들에게 하십시오.》

《우리 종업원들한테요?》 차학선이 눈이 덩둘해서 바라보았다.

《기사장동진 수령님을 모신 회의에 참가할 때면 우리 인민들에게 고기를 먹이지 못하는 문제를 놓고 가슴아파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뵙군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정말, 정말, 그…》 벌써부터 차학선의 입술이 떨려났다.

《그걸 다 말해주잔 말입니다.》

《내가 말이우?》

《그럼 누가 말하겠습니까. 목격자이고 회의참가자인 차학선동지를 밀어놓고 내가 나서겠습니까.》

차학선은 무슨 말을 못하고 어리벙벙해서 바라보기만 했다.

《뭐 따로 준비할게 없습니다. 기사장동지가 겪은것, 들은것들을 다 그대로 말씀하십시오.》

이윽고 신형일은 차학선이와 함께 동뚝을 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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