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회)
제 3 장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흐르는가
6
계획했던 실험을 끝내고 마당에 들어서던 수려는 반짝거리는 새 자전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 이 자전거 웬거나요?》
《오, 아버지가 우정 시내에 나가서 사온거란다. 네가 타라구.》
《?!》 가슴속 금선을 찌르르 울리는 바람에 수려는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수려는 자전거손잡이를 잡아보았다.
매끈한 손맛이 느껴지는 손잡이를 잡으니 놓고싶지 않았다.
손잡이뿐아니라 형태며 색갈까지 다 자기 취미를 헤아린것같았다. 내가 자색을 좋아한다는걸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을가. 아버지가 한없이 고마왔다.
공장의 현대화에서 중요공정을 맡았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다른 반응이 없이 그저 덤덤했었다. 짬시간이거나 주로 밤시간에 자전거를 배운다고 했을 때도 같았다. 단지 누가 배워주는가고 묻기만 했었다.
공장에 있는 현장기사이며 작업조의 조장이라고 하자 아무말없이 눈길을 돌렸을뿐이였다.
바로 며칠전 수려는 혼자서 천호의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가 있는 온실까지 간적이 있었다.
현대화를 하고있는 공장은 그 어디라없이 대낮처럼 밝았지만 온실이 자리잡고있는 농산직장만은 한켠구석의 창고처럼 어둠속에 묻혀있었다. 길도 포장길이 아니라 울툭불툭한 포전길이였다.
그런데도 수려는 넘어지지 않고 용케 온실을 찾아갔다. 전조등이 비치지 않는 어둠속에서 두억시니라도 나올것같은 생각보다 오히려 넘어질가봐 두려운 생각에 무섬증은 뒤전으로 밀려났다.
아닌밤중에 나타난 수려를 보고서도 아버지는 놀라지도 않았고 단 한마디로 《용쿠나!》 했을뿐이였다.
아버지의 칭찬이 너무 린색해서 섭섭했지만 워낙 아버지는 사사롭게 칭찬하는 법을 몰랐다. 수려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응당 하려니 했다.
수려는 처음 시작한 자전거타기를 며칠만에 끝내고 자기 혼자 밤중에 온실까지 온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뻐서 높은 산정에나 오른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젠 시내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나갈
그랬던 아버지가 우정 자전거를 사왔다니 아버지는 이 딸에 대해서 린색하지도 않았고 랭랭하지도 않았다. 자전거를 배운 딸이 기특했고 남의 자전거를 타고온것이 가슴에 걸렸던모양이였다.
(아버지!)
수려는 아버지의 웅심에 고개를 숙였다. 터질것같은 격정을 그대로 안은채 자꾸자꾸 자전거를 쓸어만지기만 했다.
이젠 자전거가 있을뿐아니라 탈줄도 안다. 마음대로 시내와 대학연구소로 갈수 있었다. 문득 자전거를 배우던 날 둘이서 시내로 씽씽 달려보자고 하던 천호의 말이 생각났다.
언제부터 대학연구소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자던 일을 당장 실행하고싶었다.
수려는 손전화기를 꺼내 실험실에 있는 천호를 찾았다.
《천호동무예요? 오늘 계획했던 일은 다했지요? 그럼 연구소에 가자요.… 이제 당장 말이예요. 물론 자전거로 가야지요. 자전거타기도 검열받을겸. 호호… 글쎄, 빨리요. 기다리겠어요.》
그길로 방안에 들어간 수려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가방까지 꺼내서 자전거바구니에 넣고는 간편한 운동신을 갈아신었다.
오늘은 배우는 자세가 아니라 천호와 나란히 달릴수 있었다. 처음으로 나가는 시내길이지만 천호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할수 있었다.
천호와는 함께 일하는 과정에 더 잘 알게 되고 이번에 자전거를 배우는 속에서 가까와졌다. 아직은 더 지내보아야겠지만 천호는 만날수록, 대할수록 가슴에 새겨지는 청년이였다. 그와 같은 지향을 안고산다고 생각했을 때 가슴이 별로 높뛰던 그밤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후부터는 단둘이 실험실에 있어도 스스럼없었고 언제건 같이 있고만싶어졌다.
수려가 자전거를 끌고나가니 벌써 천호가 골목길에 들어서고있었다. 다가오던 천호가 윤나는 새 자전거를 보고 멈춰섰다.
수려는 자전거손잡이를 쥔채 가슴을 젖히고 섰다. 그는 이렇다저렇다 아무말도 않고 천호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가 하고.
천호가 유심히 자전거를 내려다보았다. 해사한 얼굴에 능청스러운 빛이 슬쩍 비끼더니 마치 사진사가 한장 찍기나 할듯한 자세로 수려를 바라보았다.
《아, 새 자전거. 이런 색을 좋아하댔군요. 아주 좋습니다.》
새 자전거가 생긴것이 좋다는건지, 자기도 그런 색을 좋아한다는건지 까리까리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뜬 수려는 활짝 웃으며 날렵하게 자전거에 올랐다. 그리고 소리쳤다.
《따르라요.》
자전거달리기는 신바람났다. 밟으면 밟을수록 속도가 났다.
지글거리던 여름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거리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슬슬 머리칼을 날렸다.
동뚝길에 나서니 강바람까지 불어오며 가슴이 부풀어났다. 그렇게 한참 달렸다.
동뚝길엔 사람이 많이 오가지는 않아도 차들이 많았다. 대개가 대형차들이였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온몸이 꼿꼿해지는것같았다. 이제까지 달리던 때와 또 달랐다. 차가 지나칠 때마다 온몸이 오싹해졌다. 육중한 대형차가 금시라도 덮칠듯 가까와지자 수려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천호가 급히 따라왔다.
《일없습니다. 자, 어서 또 달립시다. 그저 곧바로만 달리십시오.》
그렇게 내처 달렸다. 시내에서는 자전거길이 따로 있어서 더 좋았다. 오가는 바람결이 감겨돌아가며 재롱을 부리는것같아 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수려는 혹간 보이는 자전거를 탄 녀자들을 훔쳐보군 했다. 어떤 녀자는 자세가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떤 녀자는 아주 맵시났다. 수려는 허리를 쭉 폈다. 저런 녀자들의 모습이 거리풍경을 돋군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웃음이 피여났다.
연구소에 도착한 수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라도 자전거타는 내 자세를 보아주었으면. 그러나 퇴근시간이 지난 구내는 조용했다.
할수없이 자기가 있던 방에 들려 책이며 자료를 한가방 가지고 총총히 계단을 내렸다. 밖에 있던 천호가 받아서 자기 자전거짐틀에 실었다.
돌아오는 길은 더 사기가 났다. 어느새 둥그런 달이 떠올라 주위를 훤히 비쳐주었다. 저 멀리 집이 있는 두단땅이 보이자 수려는 더 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런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천호가 따라왔다.
《수려동무, 우리 이길로 만경봉으로 가지 않겠소? 화촌10경중 <삼도범월> 경치는 이런 달밤이 제격이요.》
화촌10경? 처음 듣는 말이였다.
《그런 곳두 있어요? 어서 가요.》
천호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밤새껏 달리고싶었다.
《자, 따라오오.》
그들은 곧게 뻗은 포장길로 달렸다. 만경봉까지 달린 거리는 수십리길이 잘되였다. 그런데도 힘든줄 모르고 달렸다. 그길로 만경봉으로 오르느라 숨이 턱에 닿아 잠간이라도 쉬고싶었지만 앞선 천호에게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살아나 이악하게 그를 따라 올라갔다.
드디여 만경봉에 다 올랐다. 은은한 달빛이 은빛비단자락이 되여 누리를 감싸안은 황홀한 신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루도와 두단도사이로는 달빛을 받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있었다. 이 고장이 이렇게 아름다왔던가, 달밤이여서 이렇게도 유정할가. 저 둥근달이 온 세상의 고요와 조화를 다 거느리고와서 이런 경치를 꾸렸을가. 그래서 삼도범월인가? 달밤에 앞에 보이는 두루도와 두단도 그리고 문발도를 바라보는 경치를 삼도범월이라고 일러왔다고 한다니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문뜩 푸들쩍하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내 재기도 알아달라고 물속의 고기가 솟구치는 장난이였다. 그 유혹에 못견디여 금시라도 두팔을 쫙 펴고 아래로 떨어질것같았다. 그러면 강물에 풍덩 빠지는게 아니라 달빛에 실려 맞은켠 두단땅으로 훨훨 날아갈것만 같았다. 정말 천호동무와 그렇게 창공을 함께 날게 된다면.
아니, 이밤이 지새도록 이 봉우리에, 이 정자우에 오래오래 있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