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3 장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흐르는가
4
(1)
공장에서는 기술혁신의 된바람이 불었다. 우선 기술자들에 대한 대우문제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다름아니라 번듯하게 일어선 종업원식당 첫개업을 공장기술자들과 대학연구사들을 위한 초대식사로 시작한것이다.
새로 꾸린 식당안은 연회라도 할수 있게 널직했다.
벽에 미색타일을 붙인데다 기둥마다 전신을 비치는 거울을 배치해서 마치 거울집에 들어간듯 어디서나 자기의 모습이 비쳐졌다.
줄을 맞춘 식탁엔 벌써 일등료리사가 울고갈 정도의 료리들이 차려져있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오리훈제에 오리알튀기와 떡이며 각종 료리들이 구미를 돋구고있었다.
당비서를 비롯한 공장의 책임일군들과 초급일군들이 기술자들의 좌석 사이사이에 끼여앉자 키가 꺽두룩한 경리과장이 들어와 축하인사를 하는것으로 축배를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활기있는 웃음소리가 났다.
공장적으로 벌어진 이 조치는 기술자들의 가슴을 적지 않게 격동시켰다.
그날밤으로 많은 기술자들이 자기가 일하는 호동이나 연구실로 곧장 들어갔다.
차천호 역시 그랬다.
자기네 연구조가 맡은 복합미생물발효제생산공정을 새로 확립하고 생산을 공업화하는것이 제일 중요하면서도 기본이라는것을 알고있기에 식사가 한창일 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실험실에 들어와서 연구조가 맡은 생산공정을 도표로 그리기 시작했다. 기사장의 도해를 이미 보았던지라 그 방식대로 하나하나 그리기 시작했다.
생산공정은 균접종, 진탕배양, 액체배양, 고체배양, 건조 및 출하공정으로 되여있었다.
도면을 거의다 그려가는데 문소리가 나며 수려가 들어섰다. 그는 가슴에 큼직한 꾸레미를 안고있었다. 식사가 끝나 방금 식당문을 나서는데 기다리고있던 가공직장장이 앞을 막더니 이 꾸레미를 안겨주더라는것이였다.
꾸레미안에는 식당에서 차렸던 료리와 함께 집에서 만든 나물이며 김치가 있었다.
천호는 받을념도 못했다. 고맙다는 한마디 말로는 자기의 마음을 다 표현할것같지 않았다.
조현숙은 차학선이가 기사장사업을 할 때 이 고장에 시집와서 첫일을 시작했다. 그 시절 조현숙은 차학선기사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호에게 왼심을 쓰군 했다.
새로 조직된 발효반성원들은 식사가 끝나자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실험실로 모두 모여들었다. 천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할 일을 하나하나 분담했다.
중요하게 해야 할건 균접종과 진탕배양 그리고 종균액생산이였다.
천호와 원걸은 액체배양공정에 필요한 종자배양탕크를 비롯한 설비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발효반으로 건너가서 종자배양탕크며 강냉이와 콩깨묵과 쌀겨같은 기질을 준비하고 멸균하기 위한 온도를 보장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속에서도 천호는 공장의 실정에 맞는 발효제균그루를 택하는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균그루로는 영양강화균, 익생균, 속성복합균을 리용해야 하지만 자기보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인 수려가 더 잘 알수 있었다.
실험실에서는 수려가 한창 종균액을 생산하고있었다.
눈이 시게 하얀 위생복을 입은 수려가 원균이 들어있는 시험관과 빈시험관을 왼손에 함께 쥐고 오른손으로 화학반응시에 쓰이는 실험기구인 백금이를 알콜등불길에 좌우로, 아래우로 이동시키며 소독하고있었다. 그 동작은 아주 세심하면서도 능숙했다. 두 시험관의 솜마개를 뽑고 백금이로 균옮겨심기를 하는 조작도 역시 숙련된 동작이였다. 수려는 솜마개를 조심히 막고 종이마개까지 막은 다음 정온기에 넣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서 이제 3~5일동안 배양하게 돼요.》
그제야 천호는 조용히 단숨을 내쉬였다. 조장이라는 임무를 받았을 때 정확한 실험작업을 꽤 하겠는지 하고 걱정이 앞섰는데 수려의 숙련된
실험작업을 보니
이윽고 작업을 끝낸 수려는 위생복을 벗으면서 《후에 종균접종만 하면 됩니다.》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계획했던 작업을 다 끝낸셈이다.
다음작업은 하루이틀, 시간적으로는 24~40시간후가 되여야 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이제껏 긴장한 실험을 해서 그런지 밖에 나오니 숨길이 활 열리였다. 서서히 찾아오는 어둠이 서켠하늘에 어렸던 마지막노을을 덮으며 밀려들고있었다. 실험을 끝내고는 자전거를 배우자고 했는데 지금이 아주 맞춤한 시간이였다.
수려가 운동복을 입으러 집으로 간 사이 천호는 보관소에 있는 자전거를 찾아가지고 곧장 학교운동장으로 향했다. 학교운동장은 동뚝 바로 밑에 있었다.
마침 만월이 되여가는 둥그스름한 달이 서서히 올라오고있었다.
천호는 지금 야릇한 기분에 잠겨있었다. 대학생시절 당당하게 1등의 단상에 올라서는 처녀대학생을 보며 호기심을 누를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와 통성하고 한마디라도 나누고싶었었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생명과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알고싶은게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런데 너무 새침한것같아 말도 못붙여보았다. 그런데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우연히도 이렇게 공장에서 만나게 되였다. 그것도 한동네에서 살게 되였다. 수려는 자기 집이 이 두단땅으로 온걸 놓고 섭섭하게 생각하지만 천호는 자기와 수려가 만나게 하려고 그 누가 기회를 마련해준것같아 흡족하기만 했다. 그전날 벼르면서도 성취하지 못했던걸 다 봉창할수 있었다. 자전거를 배워주는 기회야말로 자기들이 가까와질수 있는 천재일우였다.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나는 바람에 천호는 돌아섰다. 간편한 체육복에 사출신을 신은 수려가 탄력있게 걸어나오고있었다. 이마우의 머리카락을 감싼 머리수건이 댕기마냥 길게 늘어져 목가를 스치고있었다.
달빛속에서 그의 날씬한 몸매는 무대우에 선것처럼 눈을 끌었다. 한순간 멈칫했던 천호는 이어 자전거를 끌고 그에게 다가갔다. 초학도를 대하듯 수려에게 자전거 쥐는법부터 익숙시킬 생각으로 혼자서 자전거를 끌고가는 동작을 하게 했더니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바퀴 돌고왔다. 그리고는 어서 타는 련습을 하자고 졸랐다.
《그럼 자전거에 오르십시오, 든든히 잡고. 자, 나갑니다.》
천호는 이렇게 소리를 치며 뒤에서 틀을 잡은채 냅다 밀고나갔다.
자전거가 앞으로 내달렸다.
수려는 예상외로 몸균형을 잘 유지했다.
대학시절 탁구선수였다더니 확실히 운동감각이 있었다. 사기가 난 천호는 숨이 헉헉 차오르는데도 힘이 뻗쳐나서 계속 달렸다. 하늘하늘한 머리수건끝이 천호의 얼굴을 스치며 나풀거렸다. 짜릿하게 가슴을 울리는 감각에 천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에도 용케 자전거는 앞으로 내달렸다. 수려의 목가를 스쳐날리는 머리수건은 천호의 얼굴을 쓸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연연한 향기가 배인 그 수건은 어리광을 부리는듯, 수려와 천호의 사이를 이어주는것이 자기라는것을 알아달라는듯 눈앞에서 하늘거렸다. 속도를 낼수록 머리수건은 더 감질나게 천호의 얼굴을 스치며 돌아갔다.
운동장끝에까지 다 갔는데도 수려의 자세는 유지되였다. 운동장을 세번이나 돌고나서 그들은 잠시 숨을 돌리였다.
《아이, 힘들지 않아요?》
수려가 앉은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힘들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음말은 난 좋기만 한데요 하고 속을 터치고싶은 심정이였다. 사실 그런 정도면 며칠 련습하지 않아도 인차 자기 혼자 탈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실 좋은 일이지만 지금 천호는 수려의 자전거배우기가 늦어졌으면 하는 심정이였다. 이제 달리면 또다시 슬치며 나풀거릴 머리수건의 간지러움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든것이였다. 수려의 살뜰한 손길같기도 한 그 수건의 감촉은 천호에게 이루 말할수 없는 정회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