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회)

제 3 장

25

(2)

 

×

 

김형규와 헤여진 신정은 자전거를 달려 인차 남문을 통과하였다. 당위원회청사를 지나 2외래자합숙으로 꺾어들어가던 처녀는 참으로 딱한 경우에 부딪치게 되였다. 길목에 정구철의 승용차가 있었는데 본인은 뒤짐을 지고 차곁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그냥 지나가자니 벌써 이쪽을 보았고 보통때처럼 인사만 하자니 왜 그런지 불편하였다.

원래 정구철이 신정이를 대하는 태도는 정철이 있을 때나 사후에나 변함이 없었다. 처녀는 그것이 고마왔으며 그에게 더욱 존경이 갔다. 동생의 옛 애인을 예나제나 대해준다는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 처녀는 그앞에서는 몸가짐이나 언행에 늘 신경을 쓰군 하였다. 신정은 협의회에서 참다못해 일어나 한 발언이 가뜩이나 리치에 몰리는 정구철이를 곤경에 밀어넣은것과 같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신정이 옳았다 하여도 그가 대단히 언짢아하였을것이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였다.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컴컴해진 얼굴로 일언반구없이 앉아 듣기만 하던 정구철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그리하여 신정은 협의회후 될수록이면 정구철이를 피하게 되였고 그도 마주서는것을 바라지 않는것같았다. 그런데 외통길에서 만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여튼 인사는 해야 했고 만난김에 이왕이면 얼마간의 량해라도 구해야 서로가 속이 편안해질것이다. 자전거에서 내린 신정은 그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였다.

《오- 식사하러? 빨리 가봅소.》

내색없이 인사를 받으며 한손을 들어 갈길을 친절히 재촉하는 정구철이다. 그 행동이 오히려 처녀가 자리를 뜰수 없게 하였다. 신정은 자전거를 고정시키고 그를 불렀다.

《저, 부기사장동지!》

《왜?-》

길게 끌며 외마디로 묻는 그 목소리에는 이전처럼 철부지녀동생의 웅석을 받는듯한 맏오빠의 너그러움이 넉넉히 담겨있었다.

그에 용기를 낸 신정은 두손을 가슴아래에 포개잡고 진심을 터놓았다.

《협의회때…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전 다만 일이 옳게 되길 바래서 그랬던겁니다.》

《뭐라오. 내가 속을 삭이면 되는거지.》

어딘가 퉁명기가 있었으나 시원스레 대답하는 정구철이였다. 허나 그의 말에는 자리를 뜰수 없게 하는 인력 비슷한것이 있었다. 무엇인가 더 잇고싶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포개쥔 두손을 괜히 엇바꿔 주무르며 서있었는데 다행히 그가 따분한 분위기를 날려보내였다.

《신정이, 그럼 내 하나 물어도 되겠소?》

《일없습니다.》

《우리 정철이 한 구형체 그렇게 못쓸건가?》

정구철의 이 물음은 하나의 심리적타격이나 같았다. 가뜩이나 속을 조이고있던 신정은 다리맥이 풀려 주저앉고싶은 심정이였다. 그 말을 하필 이 자리에서 그리고 내 입으로 꼭 말해야 하는가. 부기사장은 어째서 뻔한걸 가지고 나를 괴롭히는것인가. 오늘은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만 생기는것인가. 짧은 사이지만 자문자답은 줄곧 꼬리를 잇는다. 신정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원망감을 누르고 말마디들을 띠염띠염 붙이며 힘겹게 말하였다.

《그 기술은… 부기사장동지… 저로서는 어쩔수 없었습니다.》

한순간 정구철은 상체를 뒤로 제끼며 신정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젠 알겠소, 평양에서 내려온 일군들이 왜 날 다시 만나자고 하는지.》

저 멀리 남석산머리우로 흰구름이 한가롭게 떠가고 문화회관처마밑에서는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떠들고있었다. 점심시간이 어지간히 흘러가서인지 주변을 부지런히 오가던 행인들의 움직임은 거의나 없었다. 이따금 한두대와 자전거가 늦은점심을 하려고 바삐 내달릴뿐이였다.

뒤짐을 지고 천천히 작은 원을 그리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몇걸음씩 거닐던 정구철은 거동을 멈추었다.

《내 솔직한 심정그대로 말해두 일없겠소?》

처녀가 옷자락을 내리끄는것을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인 그는 낮으나 웅글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하였다.

《난 신정이 형규네와 손을 맞춰 일하는걸 보고 그렇겠거니 하고 아무 내색 안했소. 밤늦게까지 일하며 산보도 한다는 소문을 듣고도 그랬지.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어찌겠소. 죽은이를 두고 수절할수는 없질 않소.》

신정이 분해서 발명하려 했으나 그는 한손을 풀어 내저었다.

《노여워하지 맙소. 내 생활을 리해 못해 그러는게 아이라니. 별일 다 있는게 생활이 아니요? 운명이 가리키는 길이라는것두 있는것이고. 난 그걸 탓하지 않소.

내 섭섭한것은 신정이두 처녀시절을 바친 우리네 기술을 아예 부정하는 그게였소. 그걸 성공시키겠다구 신정이 우리 애와 함께 기초재료를 얻으러 저 생기령이랑 경성, 회령걸음을 한두번 했소?

난 여적 잊지 않고있소. 회령에 갔다오다가 부령서 기차가 고장나 고생했다던 일을. 도중식사(말이 도중식사지 사실은 칡과 미역이 더 많이 들어간 강냉이빵이다.)도 다 먹고 변변치 않은 로자마저 떨어져 솜옷, 솜신으로 길량식과 로자를 마련했다는 얘길 말이요. 그래두 자기넨 그 무거운 점토배낭을 메구 부령서부터 제철소까지 걸어왔댔지. 그 험한 동지추위에, 홑옷바람에 꿰진 운동화며 편리화를 신구 말이요. 그날 자기넬 부여잡구 연구소사람들이 그냥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우.》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듣기만 하였다. 그대신 속에서는 원망과 설분이 끓으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구형축열체를 부정했으면 됐지 정철이를 위해서 할수 있는 마지막노력인 내신문제에서까지도 과학을 거들며 무정하게 처신한단 말이우? 아무리 간 사람이라두 뫼잔등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정철이 이녀석이 이제 보니 눈이 먼 놈이요. 더 한심한건 우리 애와 신정이 결합을 승인해준 나요.》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라 이쯤정도까지 들어가니 절로 음성이 올라가고있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훅훅 하는 더운 입김이 신정에게 미쳐오는 정도였다.

《난 모르겠소. 신정이 과학, 과학 하면서 그러는데 우리 막내녀석이 살아있다면 거기가 그런 처신을 할수 있었겠소? 사실말이지 신정이야 우리 정철이만큼 고온공기연소기술을 아는가?》

신정은 눈물이 금시 쏟아지려는것을 강잉히 눌렀다. 너무나 안타까와 애원하다싶이 청하였다.

《부기사장동지, 부탁인데 그건 오햅니다.》

그러건말건 정구철은 감정을 그냥 내치고있었다.

《내 진정으로 말해주오만 사심은 좀 버립소, 예? 새 가열로건설이 마감단계에 이르니까 저 채아바이처럼 제 몫 하나 큼직하게 만들고싶어하는것같은데 덤비지 맙소. 우린 밥가마를 채 만들지 못했고 또 만들었다 해두 그게 쓸모있는 가마인지는 불을 때봐야 아우.

그렇지만 내 지금에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것은 현장지휘부에 내가 더 있으면 안된다는것이요. 그냥 있어야 얼굴을 마주하기가 피차에 괴롭겠는데 아무래도 머리큰 내가 결심을 해야지. 난 이 문제를 이미 초보적으로 주영호부총리동지에게 제기했소.

그러니 걱정맙소. 맘편히 그어진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될거요. 그러나

정구철은 뒤짐을 풀며 커다란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두드리였다.

《정철이이름을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맙소. 구형축열체에 의한 고온공기연소기술은 낡았다고 만천하에 증명하겠으면 하더라도 정철이 그애를, 우리 막내를 다신 모욕하지 말란 말이우.》

눈덕까지 가랑가랑 차올랐던 눈물이 그만에야 왈칵 쏟아져내리였다.

한손으로 입을 막은 신정은 자전거를 내버린채 눈물을 쏟으며 자리를 떠났다. 처녀는 합숙정문을 지나 달음에 호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였다. 어깨를 들먹이며 참고참았던 눈물을 소리내여 터뜨리였다.

 

좌안쪽에서 댕댕거리는 종소리가 랑랑하게 울려퍼진다. 1강철직장에서 출강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신정은 퉁퉁 부은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다가 책상서랍을 열고 애인의 시험일지를 찾아들었다. 원래 이 시험일지는 정철의 생일날에 신정이 기념으로 준 학습장이였다. 처녀는 푸른색뚜껑을 한 두터운 학습장의 내용을 보고나서야 그가 자기의 기념품을 어떤 용도에 썼는가를 알게 되였다. 탐구의 나날 그 어느날엔가 시험일지를 각기 정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던 정철의 심중 역시 이제야 리해되였다.

밤을 꼬박 밝히며 시험일지를 눈물속에 읽고 또 읽었다. 페지마다 보풀이 일고 군데군데 페유며 타르얼룩, 지어 피방울흔적까지 배여있는 시험일지, 수자와 공식들, 계산식들이 적혀있는 페지들, 거기에는 이뿐만아니라 한주기의 분석시험이나 생활상의 계기때마다 처녀에게 쓴 글이 많았다. 특히 신정이로 하여금 끝내 오열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게 한것은 청년과학자가 마지막시험을 앞두고 처녀앞으로 쓴 글이였다.

이 글을 보자 또다시 아프게 떠오르는것은 그 언젠가 옛 등대에서 정철이와 있었던 일이였다. 그날 위험한 시험인줄 알고 애인을 아끼느라 혼자서 하기로 결심하였던 그이, 시험준비를 위하여 바친 오후 한나절을 약속을 어겼다고 못살게 군 나는 얼마나 철이 없고 속이 비틀어진 녀자인가. 저녁어스름속에 온갖 잡동사니짐을 지고 멀어져가던 정철의 마지막모습이 눈앞에 확 살아나며 태질하고싶을 정도로 괴로왔다.

처녀는 시험일지를 애정겹게 쓸어보다가 가슴에 꼭 안고, 그러다가는 뺨에 대보기도 하였다. 왜 이걸 일찌기 내놓지 못했던가. 후회가 밀물처럼 차오른다.

대학시절에 있었던 일이 뇌리에 떠올랐다. 어느날 신정은 몇몇 학급녀동창생들과 함께 평양국제영화회관에 가서 녀성일군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 나온 영화를 관람한적이 있었다. 돌아오면서 누군가가 단순해보이면서도 꽤 까다로운 화제를 하나 꺼내는 바람에 한참이나 론쟁이 오갔다.

그가 꺼낸 화제란 자기는 어떤 책을 하나 보았는데 필자가 녀성일반의 성격을 론하면서 녀성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바로 녀성이기때문에 맹꽁이 하나는 다 가지고있다고 주장했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자 영화를 보니 녀주인공이 완성된 녀성처럼 안겨와 필자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언하였다.

이를 빌미로 가정생활형상을 놓고 론쟁이 벌어졌는데 물론 마감에는 어쨌든 녀성에게는 남성과는 달리 트이지 못한 점은 분명히 있다는것으로 끝을 맺았다.

(그럼 내가 그런 점에 포로되여있었단 말인가. 공개하기만 하면 만사가 풀릴 이 시험일지를 내 그래서 끌어안고있었단 말인가. 아니, 아니야.)

신정은 추호의 미련도 없이 부정해버리였다. 신정의 사랑관으로 말하면 녀성은 처녀시절에 반드시 두가지 보물을 가지고있어야 하는데 첫째가는 보물은 처녀 그자체이고 두번째는 련인의 일기장인바 이 보물들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내주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했을 때 신정에게 있어서 정철의 시험일지는 일기장이기도 하지만 한생을 두고두고 보면서 거울로 삼아야 할 보물이기도 하였다. 그래, 이것때문이였다. 이것말고 또 있다면 형규네와 일하는 과정에 새 기술을 습득하며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내놓고 방조줄만한것이 없다고 인정했기때문이다.

신청은 시험일지를 무릎우에 내려놓고나서 머리칼이며 옷매무시를 바로하였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조심스럽게 번지였다.

잦아들려던 눈물이 불쑥 또 솟구친다. 이목구비가 사내답게 큼직큼직하고 패기머리를 한 사진속의 애인, 해학을 즐기고 장난기도 있어 자주 신정이를 울고 웃기던 청년과학자가 정차게 마주보며 활짝 웃고있었다.

(용서하세요, 정철동지!)

처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녁을 꼼꼼히 훔치였다.

(이 시험일지는 정철동지가 내게 주려던 결혼지참품이여서 나만이, 오직 신정이라는 처녀의것으로만 되여야 하는것인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공개해야 될것같애요.

김철의 고온공기연소기술도입은 지금 타협과 절충, 방황과 답보를 거듭하며 엉킬대로 엉키고있어요. 이 모진 매듭은 오직 정철동지만이 풀어줄수 있어요. 오직 나의 당신만이! 절 용서해주시겠지요, 네? 정철동지.)

깨끗한 그라프트종이에 시험일지를 정히 싼 신정은 그것을 가슴에 꼭 품어안았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