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1 장
첫 상면
6
(2)
잠시후에 신형일은 인민대학습당이 바라보이는 시내중심의 분수가로 나왔다. 호듯호듯 내려쪼이는 봄볕은 솟구치는 분수에서 무지개를 피워올렸다.
신형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부근에서 안해와 만나기로 약속했던것이다.
한달이 넘도록 집에 가지 못했다가 오래간만에 안해를 만난다는 생각은 무겁게 드리웠던 마음속그늘을 가셔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쑥색양복차림으로 앉아있는 안해가 보였다.
신형일은 잠시 그자리에 서서 안해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근방 유치원에서 교양원을 하는 안해의 뒤모습은 처녀시절처럼 단정했다. 이렇게 혼자 앉아있을 때 어느 싱거운 사내가 슬그머니 걸채일수도 있을 정도였다. 백화가 만발한 꽃밭에 들어서는것같은 심정으로 안해뒤에 다가갔는데도 기척이 없자 신형일은 슬며시 곁에 앉으며 그의 팔굽을 슬쩍 다치였다. 흠칫 놀라 일어서려던 안해가 가볍게 눈을 흘기다가 눈을 치뜨며 놀랬다.
《어마, 힘이 드는가보군요.》
《그렇게 보이오?》
안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바라보았다.
신형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방금전 시당책임비서의 의견을 새기지 못해서 이렇게 안해의 눈에까지 걸려들었다는것이 적지 않게 자존심을 자극해서 손바닥으로 썩썩 얼굴을 문다지며 중얼거렸다.
《피곤해서 그렇게 보이겠지, 별일 없소.》
《여보, 우리 동무인 장선화 있지요? 그가 역삼으로 운영하는 한증탕에서 일하는데 가보세요. 건강에 아주 좋대요. 그러잖아도 한번 오라고 계속 독촉인데. 어때요, 가지요?》
《허.》 신형일은 웃고말았다. 집에 들리라고 하던 시당책임비서의 말이 생각났다. 안해는 한증탕에 가라니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버지의 건강은 일없소?》 그는 인차 화제를 돌렸다.
《요즘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니 산보시간이 늘었어요. 봄철에 들어서는 시기여서 조심하느라고 하는데…》
안해는 별생각없이 대답했다.
《식사는?》
《정상이예요, 퍽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럼 됐소, 애들은?》 신형일은 아버지의 건강에서 별다른 일이 없다니 우선 안심이 되였다.
《애들은 별일없어요. 학교에도 잘 가고 밥도 잘 먹고, 호호… 현철이 말이예요, 아버지네 공장에 가보겠다고 떼를 써서 혼났어요.》
《허, 그녀석.》 아직 열살도 안된 아들이다. 아버지가 보고싶으니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게지.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싶었다. 맏이인 딸과 철부지 아들, 오늘 이렇게 시내에 나온김에 집에 한번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신의 수고가 많겠소. 아버지건강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걱정마세요.》 갑자기 안해가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빨각거리는 비닐봉지소리가 나더니 눈앞에 먹음직스런 찐빵이 나타났다. 꿀꺽 단침이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능청스러운 소리가 절로 나갔다.
《이거 유치원아이들 간식에 손을 댄게 아니요?》
《아이참, 이건 내가 만든거예요.》
신형일은 빵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는 간식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단지 안해가 빚은 남새빵만은 마다하지 않고 한두개 맛을 보군 했다. 빵안에 어떤 남새를 어떻게 조리해서 만드는가에 따라 그 맛은 달라진다.
안해는 남편의 식성에 아주 예민했다. 손이 자주 가는 음식은 열성을 부렸지만 손이 잘 가지 않으면 두번다시 내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간식에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는것에 대해서 무심하지 않았다. 이런것도 해보고 저런것도 권하면서 맛이 어떤가고 묻군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새빵을 두개째 집는걸 보더니 그 빵을 만드는데 제일 열성을 피웠다. 아마 어제밤에 전화를 받고는 밤늦게까지 이 남새빵을 만드느라 잠도 설치였을지 모른다.
정말 남새빵은 맛이 특별했다. 안에 넣은 속은 분명 일반남새인데 어떻게 가공을 했는지 별맛이였다.
단꺼번에 두개를 먹고난 신형일은 《잘 먹었소.》 하며 입술을 감빨았다. 안해는 기다리기나 한듯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노르무레한 색을 띠는 물은 숭늉인지 보리차인지 가늠이 안 갔으나 어쨌든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안해는 그렇게 다심했다. 그런 안해의 관심과 손길이 떨어진 공장식당에서 어떻게 한달이 넘도록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수 있었던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일에 빠져 일신상의 문제에서는 경황이 없었던것이다.
분수가 뿜어올린 물보라에서 아롱아롱 피여나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마음속에서까지 피여나는듯 했다.
《당신하고 중요한것을 토론하자고 찾았소.》
안해의 눈가에 알릴듯말듯 미소가 찰랑거리였다. 동글납작한 안해의 얼굴에서 제일 드러나는 특징은 저렇게 눈부터 웃는것이다. 말보다 앞서 눈가에 떠도는 미소를 지을 때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군 했다. 신형일은 안해의 손우에 자기의 손을 덧놓았다.
《여보, 공장에서 우리 집까지 어디요. 지금 많은 종업원들과 그 자녀들은 걸어서 시내의 집으로, 학교로 오가고있소. 그런데 우리 집이 멀다고 공장에서 차를 보내주느라고 마음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찰나 형일은 안해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는것을 느꼈다. 순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말이 뚝 막혀버렸다. 내가 너무 리기적으로 생각하는건 아닐가? 아니, 그런게 아니라고 속으로 머리를 흔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다음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신형일은 잠시 앞에 보이는 분수를 바라보았다. 솟구쳐오른 분수가 간혹 휘뿌려지면서 얼굴에 찬 물방울을 떨구었다.
잠시 그들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신형일은 안해가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줄 생각으로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공장가까이인 통일거리로 이사가야 한다는것을 안해가 리해해주길 바랐다.
안해는 인차 입을 열지 않고 골똘히 물방울이 떨어지는 물면만 내려다보았다.
지금 안해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이제껏 해온 자기의 직업을 생각하고있을가. 안해는 유치원에서 십오년째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하고있다.
그가 키운 아이들이 재능을 꽃피우면서 이젠 성년으로 자랐지만 설날마다 꼭꼭 찾아오는것을 보며 이 세상에서 교육자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군 했었다. 이제 그런 교양원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하는것은 아닌지.
그러나 통일거리에도 유치원이 있어 안해는 자기가 하던 교양원을 계속할수 있다. 단지 정들었던 곳을 떠난다는것인데 그것은 날이 흘러가면 메꾸어질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음순간 신형일은 심각해졌다. 언제인가 이제껏 유치원에서 몇년째 같이 일해온 원장이 년로보장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그 사업을 하게 될것같다던 안해의 말이 생각났던것이였다.
이젠 그도 웃고 떠들며 동심세계에서 사는 애들과 어울리는 교양원에서 벗어나 한 단위의 책임자로 일할수 있게 성장했다.
그제야 안해에게서 너무나 크고도 소중한것을 빼앗는다는것을 느끼고 신형일은 이제껏 잡고있던 안해의 손을 흔들었다.
《여보, 내 다시 생각해보겠소. 이제 생각해보니…》
《아니, 당비서가 종업원들과 다르게 살면 안되지요. 새곳에 가서 교양원을 해도 좋고 안해도 일없어요. 아마 현아 아버진 원장사업에 대하여 생각한것같은데 그건 사회생활에서의 저에 대한 평정으로 또 집단의 믿음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저 당신일만 잘된다면 바랄것이 없어요. 무엇이든 생각했으면 주저없이 앞으로 나가세요.》
《여보!》
사방으로 트인 야외만 아니라면 와락 안해를 부둥켜안고싶었다. 그 심정을 안은채 신형일은 안해의 손을 꼭 싸쥐였다.
따스하면서도 말큰한 안해의 손을 잡고있으니 행복한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10분이상 더 지체할수 없었다. 현대화를 하는 공장에서는 더미로 일감들이 밀려들고있었다.
《그런데 말이예요.》
안해의 느닷없는 목소리에 노그라들던 신형일은 의혹어린 눈길을 돌리였다.
《
(아버지?)
정말 이사문제를 놓고서는 아버지를 전혀 념두에 두지 않았다. 언제한번 자기와 아버지와의 의사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못한탓인가?
신형일의 아버지는 일흔을 넘긴 전쟁로병이다. 방금전에 안해가 아버지의 건강에서 별일이 없다고 하지만 안심할 정도가 못된다. 게다가 아버지는 지금의 아빠트에서 몇년째 정을 붙였는데 가끔 전우들과 모란봉으로 산책하는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아버지의 의향을 들어보아야 할것같구만.》 그러며 신형일은 자기가 들고온 보퉁이를 내놓았다.
그는 안해에게 병원에 갔다가 만나지 못한 황춘영의 이야기를 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가 아직은 잘 움직이지 못할거요, 집에서 안정해야 하니까. 당신이 그의 집에 좀 가보오, 갈수 있지?》
안해가 대답대신 눈가에 미소를 지으며 보퉁이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면회를 가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는 말없는 표현이였다.
처녀시절부터 안해는 언제나 이렇게 신형일이 자기를 말없이 리해하군 했다.
총각때 신형일은 유치원교양원인 리성심을 알기 시작한지 보름만에 세번째로 공원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그때 작은 지방산업기계공장의 현장기사이던 신형일은 처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새로 만든 농기계를 조립하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펼쳐놓은 작도지에 비방울이 떨어져서야 처녀와 만나자고 약속했던 일이 생각났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이 퍼그나 지난 뒤였다. 허둥지둥 우산을 쥐고 달려가니 나무밑에 서있는 처녀가 멀리 보였다.
신형일은 달려가서 우산을 씌워주며 용서를 빌었다. 그때 처녀가 한 말이 무엇이였던가. 《바빴던게지요?》하며 눈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난 동무를 리해해요.》하고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의 인상적인 그 모습과 처녀의 입에서 나온 속삭임이 얼마나 가슴을 울렸던지 신형일은 아무 말도 못했었다.
바로 처녀의 인상적인 그 모습에 반한 신형일이였다. 안해는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남편을 리해하려고 했고 자기의 소중한것을 생각지 않고 남편의 일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당신의 말을
《…》
《걱정마세요, 모든 일이 잘될거예요.》
안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안심시켰다. 신형일은 뜨거워나는 가슴을 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