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서 장
(2)
어디론가 품팔이를 떠난 형의 몫까지 짊어진 아버지가 매일같이 운하를 정리하는 공사장에서 역사질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버지가 불쑥 집에 나타났다. 공사장에서 일하지 않는 대신 물고기를 잡아들이기로 하고 풀려나왔다는것이다. 죽는것보다 까무라치는게 낫다는 식의 차이밖에 안되는 일이였으나 그렇다고 받아물지 않을수도 없었다. 그 다음날 아버지는 묵묵히 바다로 나갈 차비를 했다. 늘 함께 다니던 옆집의 아저씨도 공사장에 나가는 바람에 이번엔 아버지 혼자서 바다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바래우며 학선은 속으로 결심했다. 이젠 내 나이 열살이다, 다음번엔 꼭 아버지를 따라 나도 바다에 나가리라.
그러나 학선의 이 결심은 실현되지 못했다. 바다에 나간 아버지가 풍랑을 만난것이다. 집채같은 파도가 밀려오는통에 배가 파산되고 아버지는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속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것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살아난것이 오히려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학선은 아버지가 앓음소리를 내는 집안에 있다가는 자기마저 숨이 꺼질것만 같아 터벅터벅 집을 나왔다. 그길로 늘 놀러다니던 앞산으로 올라갔다. 산길로 들어선 그는 더 올라갈 기운을 잃고 눈에 보이는 너럭바위우에 털썩 누워버렸다. 눈앞에선 이름모를 새들이 퐁퐁 날아예고 아아하게 비껴간 하늘에서는 하얀 솜같은 구름송이들이 한가롭게 흘러가고있었다. 그지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였다. 아무 걱정없는 산새며 흰구름이 한없이 부러웠다. 학선은 우울해졌다.
이젠 우리 집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가. 배가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수 없는 집이였다. 아버지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기가 막히였다. 돈이 없는탓이다. 돈만 있으면 아버지의 허리는 문제가 아니다. 저 하늘에서 귀인이 나타나 우리 집에 돈을 좀 뿌려주었으면.
그러면 아버지의 허리병을 고칠수 있고 배도 생길수 있겠는데…
나른해지는 속에서 솔곳이 잠이 들었던 학선은 이마가 선뜩해지는 바람에 눈을 떴다. 깜짝 놀랐다. 눈앞엔 웬 낯모를 사나이들이 서있는것이였다.
아니, 그들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였다. 동네를 싸다니는 그놈들을 본듯한 생각도 들었다. 맞았다. 그놈들은 공사장의 왜놈십장놈들이였다. 십장놈들은 채찍을 휘두르면서 애매한 사람들을 후려치기도 하고 허공중을 가르면서 위엄을 돋구기도 했다. 지금도 그놈들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있었다. 학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학선은 고기를 바치지 않는 젓갈집을 찾다가 자기의 뒤를 밟고 예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며 공포에 질렸다. 비실비실 다리를 움츠리는 학선이 앞으로 텁석부리가 다가왔다.
《여기나 왜 있는가, 응?》 그놈이 학선을 노려보았다.
한순간에 식은땀이 쫙 내돋았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입은 얼어붙은듯 무슨 말이든 나오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가 말이다.》 놈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학선은 그 소리에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선 아버지가 앓고있어요. 풍랑을 만났거던요. 그래서 물고기를 잡지 못했어요, 배도 다 깨지구… 거짓말이 아니야요, 정말이예요, 이제 우리 형이 돈을 벌어오면 배를 빌려서라도 고기를 잡아다 바칠수 있어요, 그때까진…》
학선은 설음이 북받쳐서 말끝을 맺을수가 없었다.
멍청히 서서 눈만 데룩거리던 수염쟁이가 제 동료들과 수군거렸다. 왜말이여서 알아들을수는 없어도 한동안이 지나는 사이 놈들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론의한다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학선은 분명 자기 집 일이라는 생각에 숨을 죽이고 그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텁석부리가 돌아섰다.
《돈이나 필요하단 말이지.》
학선은 수염쟁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텁석부리가 웬일인지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주변이 옛날 락랑국, 그 자리지? 거기나 옛토성자리가 있다던데.》하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학선은 퀭해지는 속에서도 가슴이 부풀어났다. 아득한 고조선유민들이 세웠던 나라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락랑국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자연히 호동왕자와 락랑공주의 모습이 보기나 한것처럼 눈앞에 어리군 했다. 언제인가는 제또래들과 같이 락랑공주가 애용했다는 샘터에 가서 배가 똥똥해지도록 물을 마신적도 있었다.
《그곳이나 보고싶다. 그곳을 대주면 오- 돈이나 준다.》
텁석부리가 옷섶을 헤치고 돈을 꺼내 흔들어보였다.
학선의 가슴은 후두둑 뛰놀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돈생각을 했는데 그 돈이 바로 눈앞에서 벌걱거리고있었다. 그런 심부름이야 못해주랴. 그러면 돈이 생기겠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할가.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가. 과묵한 아버지가 실그시 입술을 여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던 학선은 《가자요.》하고 호기있게 소리쳤다.
토성자리는 이 산등을 넘고 숲을 꿰지르며 한참이나 가야 하지만 일없다. 돈이 생기지 않는가.
돈만 있으면 당장 배도 생길수 있지만 그보다 장사밑천을 마련할수 있으니 아버지가 진저리나는 배길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학선은 언제 맥을 놓았더냐싶게 거뿐거뿐 걸었다.
저 멀리에 밋밋한 둔덕이 보이자 《이젠 다 왔어요. 저 둔덕만 넘으면 토성이 보여요.》하고 힝하니 둔덕으로 올리달리였다. 가슴이 마냥 부풀어올라 자꾸자꾸 뛰고만싶었다.
학선이가 돌아온것은 저녁무렵이였다. 그는 연방 어머니를 찾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토방에 누워있는 아버지와 동네의 의원집 할아버지가 앉아있는게 보였다.
《아버지, 이거!》
학선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웬 돈이냐?》
웬일인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날이 선 칼날처럼 선뜩했다.
《내가 번돈이지요, 힝! 이 돈이면 우리 집은 살아갈수 있어요. 아버지 허리도 고치구 또…》
《어디서 난 돈이야?》
어슬어슬 어두워지는 어둠을 쩡 가르는 노성에 학선은 얼떨떨해졌다.
《토성자리까지 길안내…》
미처 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다.
《뭐라구? 그 왜놈들이 그곳에 놀러 간줄 아느냐? 그놈들은 토성자리 떼무덤을 헤쳐서 보물을 훔치러 갔던게야. 아, 로인님, 결국 그놈들이 토성자리를 안건 우리 애가…》
별안간 아버지가 베고 누웠던 목침을 내던졌다.
《자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당가의 장독이 부서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