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6 장

윤선각관찰사의 군령

5

(3)

 

잠시후에 해동이와 덕보는 조헌의병장앞에서 엄한 꾸중을 받았다.

《너희들은 아침에 의논한것을 벌써 잊었느냐. 이 일은 왜놈들의 악랄한 모략이다. 우리가 어찌 왜놈들의 꾀임수에 끌려다니겠느냐. 나도 가슴이 무너지는것같지만 참아낼수밖에 없다. 세상일이 천만가지라 해도 나라를 위한것보다 더한것은 없다. 우리는 이미 의논한대로 촌각이라도 지체말고 화살을 확보하여 싸움준비를 그쯘히 갖추고 임금을 호위하려 북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선봉장 완기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머니의 묘소로 가지 않는다.

내가 해동이와 날랜 의병 두셋을 옥천에 보내는것은 왜적이 거기에 침입했다고 하는데 정암수후위장과 장공인들의 형편이 어떤지, 그들이 무사한지 알아보고 시급히 대책할것과 그들이 만들어놓았을 화살과 마름쇠를 가져오도록 하자는것이다. 덕보는 그리 알고 삼녀와 설향에게도 잘 말해주어라. 해동이는 떠날 준비가 다 되였느냐?》

《예.》

《그렇다면 어서 떠나거라. 부디 몸조심하거라.》

조헌의병장은 그들을 내보내고 저도 모르게 가슴가득 떠오르는 안해를 애틋이 그려보았다.

《여보, 나를 용서하오. 이 조헌이 당신과 일생을 함께 하면서 세월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왔소. 당신은 이 조헌을 위해 귀양지에 함께 가서 고생도 나누고 이 몸의 뒤바라질하면서 한생을 이 사람에게 바치고갔소.

당신은 부모잃고 고아가 된 삼녀, 해동이, 덕보들을 지성껏, 정성껏 대바르게 키워냈소. 지금 그애들이 당신의 묘지를 그러안고 죽을지언정 지켜내겠다고 하오. 여보, 며느리가 돌아왔소. 그 애도 당신의 묘를 그러안고 죽겠다고 하였소.

그러나 내가 엄히 말렸소. 나라를 위한것보다 더 큰일이 없다고 하였소. 여보, 나를 용서하우-》

그는 눈물을 눌러씻고 안해가 누워있는 옥천땅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여보, 우리 의병대는 마천령에서 당신에게 약을 주었던 령규스님의 승병대와 함께 청주성을 해방하였소. 당신이 이것을 안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소.

우리는 이제 임금을 호위하려 북으로 가려고 하오. 간악한 왜적이 당신의 묘를 파헤치지 못할것이요. 누구도 당신이 누워있는 곳을 왜적에게 대주지 않을거요. 부디 고이 잠들기를 바라오.》

조헌은 사랑하는 안해, 그의 혼령을 오래도록 위안하였다.

며칠전에 옥천고을에 기여든 왜적은 50여놈밖에 안되는 작은 무리였다. 놈들은 청주성에서 녹아난 뒤에 한동안 움츠리고있다가 옥천계선에 의병대가 없다는것을 알고 비여있는 고을을 거침없이 들어와 옥천관가를 차지하였다.

왜놈들은 대여섯씩 패를 무어 돌아다니면서 마을을 략탈하고 조헌의 집이 어디냐, 안해의 묘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늙은이건 부녀자이건 아이들이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찔러죽이였다.

조헌의 집은 관가에서 10여리가 넘어되는 옥수동어귀에 있고 야장간은 옥수동과 계곡동의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아직 왜적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다.

정암수후위장은 장공인 여섯과 청룡산싸움후에 데리고온 의병 넷을 합쳐가지고 그동안 화살 6 000대를 만들어냈었다.

그는 옥수동코숭이 산봉우리에 의병 하나를 파수로 세워놓았다. 왜놈들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거기서는 조헌의병장의 집이 멀리 바라보였다.

어느날 정암수는 조헌의병장의 집을 지키고있는 할멈내외분이 걱정되여 그들을 찾아내려갔다.

나많은 할멈내외는 터밭에서 김을 매고있었다.

《할아버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소이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정암수를 바라보더니 주름살 많은 얼굴을 활짝 펴고 반갑게 웃었다.

《아니, 이게 뉘시오. 전라도나리님이시구려. 어서 들어가십시다.》

할아버지가 호미를 놓고 정암수를 대문안으로 이끌었다.

정암수는 집뜨락안팎을 깨끗이 거둔 할멈내외가 장히 여겨졌다.

이런 란시에 주인이 있을 때처럼 집을 알뜰히 거두는것은 평시에나 란시에나 변함없이 주인을 따르고 존경하고 받드는 지성을 말해주는것이다.

할머니는 정암수에게 부채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우리 주인나리님은 잘 계시오이까?》

《예, 중봉선생은 왜놈들과 싸워 크게 이기고있소이다. 그런데 할아버님, 할머님은 우리 야장간이 있는 옥수동골짜기로 빨리 피신해야 하겠소이다. 왜놈들이 지금 조헌의병장의 집과 부인님의 묘소를 찾느라고 날뛰고있소이다. 어느때 이 집에 달려들지 모르오이다.

당장 떠나야 하리다.》

《아니오이다. 우리 두 늙은이는 이 집을 버리고갈수 없소이다.》

할아버지가 도리머리를 하자 할머니는 파뿌리같이 하얀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흔들었다.

《이 집을 버리는건 우리 주인님을 버리는것과 마찬가지오이다. 나리님 말씀이 고맙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집을 죽는대도 지켜야 하오이다.》

《할머님, 왜놈들이 이 집에 달려들면 이 집부인의 묘지를 대라고 무슨짓을 할지 모르오이다. 어서 피신합시다.》

《나리님, 우리 내외가 이 집에서 서른해가 넘도록 살아오고있소이다. 이 령감이 젊어서 한때 뜻하지 않았던 일로 관가에 갇혔었는데 500금을 내지 않으면 래일 아침에 목을 잘리우게 됐소이다.》하고 할멈은 30여년전 조헌나리님께 마님이 시집오던 날 지참금으로 가져가던 500금을 선뜻 내여 자기들을 살려준 이야기와 죽어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잊지 못하여 이 집의 종으로 살려고 제발로 들어온 사연, 조헌나리님과 마님이 오히려 제 집식구처럼 여겨주던 이야기를 다하였다.

할멈은 근심걱정없이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밝게 웃었다.

《이 집 완기도련님이랑 후에 데려온 해동이, 삼녀도 우리 내외를 이 집의 친할아버지, 할머니로 믿었소이다. 우리는 이렇게 혈육의 정을 나누며 한생을 살아왔소이다. 이제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소이까. 이 집을 지키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할머니의 주름많은 눈가에 눈물이 괴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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