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6 장

윤선각관찰사의 군령

5

(1)

 

청주성이 탈환된 그날 뜻밖에 완기에 의해 구원된 박설향과 그의 시녀 옥섬이는 영 딴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들은 겉모양부터 삼녀처럼 남복차림을 하였다.

흰 무명바지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푸른 띠를 가뜬히 띠고 발에는 짚신감발을 단단히 하였다. 설향이는 옷을 남복으로 갈아입는 날에 옥섬이를 바라보며 기쁘게 웃었다.

《얘 옥섬아, 네가 남복차림으로 나서니 참말 의젓한 의병이 되였구나. 어떻냐, 나도 그렇게 보이니?》

《아이 아씨, 참말 의젓해보이나이다. 호호…》

《그럼 됐다. 너는 이제부터 나를 아씨라고 부르지도 말고 내가 너의 상전이라고도 생각지 말아라. 이제는 나도 의병이고 너도 의병이니 너와 나는 다 같고같다. 호호…》

《아이참 아씨두, 어찌 그렇게야 하리까?》

《아니야. 의병대에서 아씨라고 부르는건 의병대의 분위기에 맞지 않아. 그러니깐 너는 나를 언니라고 불러라. 알았니?》

설향이는 마음이 즐거워지고 말이 많아졌다. 남편과 함께, 시아버님과 함께 왜놈과 싸우게 된것이 자랑스럽고 스스로도 장히 여겨졌다.

《아씨, 고마워요. 하지만-》

옥섬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너는 또 아씨라고 부르는구나. 너도 보았지. 삼녀가 의병장님을 의병장아버님이라고 부르고 도련님을 선봉장오빠라고 부르는걸. 그러니 너는 나를 언니라고 왜 부르지 못하겠니, 응?》

《그래두 글쎄 량반이야 량반이구 상놈이야 상놈인데… 아씨는 그렇다 해두 량반님네들이 쇤네를 용서치 않소이다.》

《옥섬아, 여기 의병대에선 너를 욕할 량반님네들이 없단다. 의병장아버님이랑 선봉장님은 량반이래도 다른 량반님네다. 왜놈들과 목숨을 내대고 싸우는 량반들이란다. 왜적이 무서워 도망치는 량반들과는 달라.》

설향이는 어느사이 얼굴이 붉어지고 눈빛에 부끄러움을 담았다. 본가집아버지가 군사를 거느리는 대호군벼슬에 있지만 왜적을 피해 어가를 따라간것을 상기한것이다.

그는 시아버님이 평시에 본가집아버지를 어이하여 규탄했었는지 왜란이 터진 오늘에 와서야 잘 알게 되였다. 김공량의 덕으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던 문무관리들은 이 란시에 다 도망하였던것이다.

윤선각이만 보아도 2만의 군사를 가지고있으면서도 왜적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에 들어가있으면서 왜놈과 싸우려하지 않고있다.

의병들처럼 청주성을 치자고 생각했더라면 윤선각은 그 많은 군사로 청주성을 해방할수 있었을것이였다. 그러나 겁을 먹고 청주성을 칠 생각조차 하지 않고있다가 청주성의 북문 하나만이라도 맡아달라는 의병들의 요구까지도 실행하지 못하여 살아남은 왜놈들이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렇게도 비겁한 윤선각이 오히려 망둥이 제 새끼 잡아먹는 격으로 의병들을 해치기만 하였다.

설향은 청주성에 갇혀있다가 의병들의 손에 구원되여 그 모든것을 제눈으로 직접 보았다. 청주성이 해방된 다음 하루이틀이 지나서 전체 의병대를 집결시키라는 윤선각관찰사의 령이 내렸을 때였다.

설향이는 남복을 하고 의병대의 대오속에 서있었다.

그는 처음에 윤선각이 관가마당의 높은 단우에 우뚝 올라설적에 그를 보는 순간 너무도 반가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지난날 아버님과 뜻이 맞아 친근히 서로 오가며 주안상에 마주 앉군 하던 윤선각, 어느때인가는 자기에게 주옥패물을 선물한 잊지 못할분이였던것이다.

이 란시에 믿을만한 사람이 수많은 관군을 거느리고 당도하였으니 어찌 반갑고 기쁘지 않았으랴.

설향이는 이제 관찰사 윤선각님이 청주성을 해방한 의병대를 크게 칭찬하고 큰상을 내리리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순간 깜짝 놀랐다. 항시 너그럽고 덕성스럽게 웃던 얼굴이 승냥이낯짝으로 변하여 의병들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것이였다. 그리고 무슨 죄인들을 다루듯이 수천의 관군들로 의병대를 둘러싸게 하고는 의병들을 하나씩하나씩 끌어내다가 관군에 편입시키는것이였다. 군적에 등록된 사람들이 의병대에 들었다는것이였다.

의병들은 누구나 다 관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항의하였다. 왜적이 두려워 싸우지 않고있는 관군은 소용치 않다는것이다.

설향은 의병들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청주성을 해방하지도 못한 관군이 무슨 체면으로 자기의 한목숨을 돌보지 않고 청주성을 해방한 의병대를 해치려드는것인가.

설향의 가슴에도 의분이 끓어올랐다. 당장 윤선각이 앞으로 나아가 옳고그른것을 따지고싶었다. 그는 자기가 남복차림으로 나타나면 윤선각이 먼저 놀랄것이고 그다음에 자기 말을 모른다고 할수 없을것이라고 여겨졌다.

《선봉장님, 제가 저 윤선각관찰사를 잘 아오이다. 저 사람의 못된짓을 제가 막아보리다.》

설향이는 옆에 서있는 남편 완기에게 이같이 속삭이고 분연히 윤선각의 앞으로 나갔다.

완기는 설향의 팔을 꽉 잡아 멈춰세우고 나직이 일렀다.

《여보, 그만두오. 윤선각이 당신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요. 저 사람은 자기의 리기욕에 따라 그전날 은인이라 해도 차버리는 위인이요. 후에 다 말해주겠으니 지금은 참소.》

설향이는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가슴에 끓어 솟구치는 격분을 가까스로 눌렀다.

윤선각에게 의병들을 참혹하게 빼앗기고 700명밖에 남지 않은 그날 저녁에 설향이는 완기를 통해 윤선각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 알게 되고 부귀속에 파묻혀 세상살이를 몰랐던 자기를 더욱 깊이 알게 되였다.

떡쇠가 불길속에서 정철(강철)로 되듯이 설향이는 왜란의 준엄한 불길속에서 새 사람으로 세상에 다시 태여났다.

그는 청주에서 아산까지 200여리도 제발로 끝끝내 걸어냈다. 먼길을 한번도 걸어보지 못하였던 설향이, 혹 가까운 놀이터로 간다 해도 호강스럽게 하늘소를 타고 견마를 잡히던 그가 산을 넘고 물을 건느며 때로는 길 아닌 숲을 헤쳐야 하는 험난한 길을 가낼가 하고 완기도 의병장도, 삼녀와 해동이까지도 걱정스러워 말잔등에 오르라고 하였지만 설향이는 모두 사양하고 듣지 않았었다.

발은 험상궂게 부르트고 목은 불같은 갈증에 타들고 땀은 소나기와 같이 온몸을 적시고 배는 고프고 기운은 진해 저도모르게 쓰러졌다가도 입술을 피가 나도록 옹쳐물고 일어나 걸었다.

왜땅에 끌려가 노리개로 될번 하였던 나를 구원해준 남편에게 최후의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죄많은 나를 죽이고 가든가 아니면 남편을 따라 끝까지 가게 해달라고. 그는 이 맹세를 지켜 쓰러지면 다시 제힘으로 일어나 이악하게 마지막까지 자신을 이겨냈던것이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