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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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여 처녀는 동정을 베풀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바래주려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들여다보았던것이다.
(흥, 짐들을 이모네 집에 맡겨버리고 저는 홀가분한 몸으로 가겠다는 심보겠지.)
신정은 머리칼을 어루쓸며 태연한 어조로 방도를 대주었다.
《맏형님의 차를 부르면 되잖아요.》
《그게 뭐 아무때나 부르면 척척 오는 자가용인가?》
어지간히 성이 나서 짜증을 내는 정철이였다. 그러건말건 신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가야지 뭐.》
틈없이 대꾸하는 처녀의 차거운 태도에 정철은 어이없는 기색을 지었다. 그는 어딘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는 돌아섰다.
《잘가.》
(날 실컷 골려주었으니 이번엔 제가 어디 한번 혼나보라지.)
뒤틀려있던 속이 이제야 시원하게 풀리는것같았다. 신정은 저녁어스름이 짙게 내리고있는 인도로로 걸어가는 정철이를 바래우며 한참이나 서있었다.
그날 저녁 이모네 집에 잠자리를 편 신정은 여느날과 달리 깊은 잠에 들지 못하였다.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으면 낮에 있었던 일이 얼른거리면서 정철의 모든 일거일동이 색다르게 느껴져 신경이 살아났기때문이였다.
성강사람들이 김철에 왔다는 소리는 듣다 처음이였다. 저녁노을을 응시하며 랑만적으로 하던 소리도 이상하게 들리였다. 그러고보면 무궤도전차로선의 정전이니 자전거고장이니 하는 온갖 구실들도 신빙성있어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늘밤에 시험을?… 아니, 그럴수는 없다. 며칠전에 도입조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한주일후에 시험을 진행하겠다고 정식 선포하지 않았는가.)
이런저런 번거로운 의혹에 시달리던 신정은 끝내 이부자리를 개고말았는데 그때는 깊은 새벽이였다. 자가당착이나 의심이 아니기를 부디 바라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허나 기업소에서 들은 소식은 그야말로 파국적인것이였다.
후에 신정은 이날을 두고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른다. 단독시험을 결심하고 미진된 부분을 퇴치하느라 늦은것도 모르고 행풀이를 해댄것이며 나중에는 새망스럽게 그 무슨 벌칙을 준다고 하면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지워보낸것까지 아프게 후회되였다.
신정은 정철이 남기고간 시험일지를 읽고나서 애인이 지니였던 청춘과 사랑, 과학자의 신념과 량심, 애국이란 어떤것인가를 진실로 알게 되였으며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종주먹을 꽉 부르쥐였다.
(비록
신정은 그의 뒤를 이어 압연가열로에 기어이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도입하리라고 모질게 각오를 새기였다.
항만기중기들의 동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신정은 상념에서 깨여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항구내식당에 들려 대충 끼니를 에우려 해도 오후시간이니 문을 닫았을것이였다. 점심식사를 단념한 처녀는 부두가를 떠나 항접수출입구쪽으로 발길을 떼였다.
지게차며 각종 차량들이 붐비는 야적장사이를 막 빠져나오는 참에 뒤쪽에서 한대의 승용차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온다. 승용차는 바람같이 처녀의 곁을 지나쳐갔는데 갑자기 저앞에서 급정거를 하더니 급하게 후진해오는것이였다. 신정의 가까이에 와 멈춰선 차에는 열관리부기사장 정구철이 타고있었다.
차문이 열리자 정구철의 우둘투둘한 얼굴이 나타났다.
《호명아바이 근심하더니만 여기 있었구만. 오라구.》
구철은 앉은채로 한발을 내려놓으며 큰소리로 불렀다.
《어 이거, 우리 대김철의 철쭉꽃이 왜 이러나? 인상이 왜 그래?》
마치 녀동생을 걱정하는듯한 말투에는 맏오빠다운 념려가 담겨있었다. 그래도 응대가 없자 정구철은 대번에 넘겨짚어들어간다.
《오- 이자 협의회때 있은 일 가지구 그러오? 일없소. 그 협의회라는게 워낙 과학평의회 비슷한 형식을 띠였으니 그렇지 뭐.
하지만 불쾌한건 있더란 말이야. 가만 앉아 듣자니까 우리걸 무슨 농태기처럼 우습게 여기는것같아. 그래 내 밸이 나 일어났지. 우리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 나만큼 금속연구소걸 아는 일군이 어디 있나.》
그의 말은 사실이였다. 정구철이도 연구소의 고온공기연소기술도입의 첫걸음부터 신정이네와 고락을 나눈 사람인데다 다혈질이여서 그런지 협의회때 특별히 어성을 높이였다.
이것이 도를 넘어 김책공업종합대학도입조의 주장을 순 리론적인것으로 몰아붙이였다가 사회측에서 정람내화물공장에서의 김형규네 성과를 언급하자 얼굴이 벌개질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기도 하였다.
《다음주에 있게 될 국가심의준비를 잘하면 돼.》
정구철은 다른 발까지 내려놓으며
《그때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책상물림훈장들을 납작하게 눌러놔야지. 입도 못벌리게 말이요.
사실 우리가 준비를 서투르게 한건 있어. 말은 왜 잘못하나 말이요. 에이, 이런 때 우리 정철이 있었으면 보란듯이 승부를 갈라놓겠는데.
건 그렇고, 빨리 차에 타우. 제김에 화가 나 인사가 안됐구만. 식사랑 건넸겠는데 나랑 같이 기업소에 가 하자구.》
신정이 차에 타자 정구철은 발을 올려놓으며 알려주었다.
《저녁에 일사업총화가 끝난 다음 고온공기도입조가 모이기로 했소. 설계분담을 하고 냅다 밀어봐야지. 신정실장이 기본이요. 이번엔 본때를 보이자구.》
차문이 닫기자 승용차는 올 때처럼 성급하게 달려갔다.
(그래, 보자. 누구네것이 실리가 있는가를.)
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구철의 의지까지 확인되니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국가심의를 받을 준비를 잘해야겠다는 독한 결심을 먹게 되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