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5 장

청주성 해방

8

(4)

 

그는 옥섬이를 데리고 허둥지둥 중문을 나섰다. 마침 그때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 박표와 맞다들었다.

《게 섰거라. 날도 저물고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데 너는 어디에 가느냐? 응?… 음, 알만하다. 하지만 너는 아녀자로서 그런 곳엔 나설 자리가 못된다. 옥섬아, 너는 당장 아씨를 모시고 방안으로 들어가거라. 알았느냐?》

설향이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거역할수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 남몰래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였었다. 그는 사람으로서 못할짓을 한것처럼 내내 불안한 마음을 가실수 없었다. …

설향이는 고스란히 완기의 칼을 받으려고 하였다. 남편앞에 자기를 뉘우치고 남편의 손에 죽으면 죄많은 인생의 마무리를 적으나마 깨끗이 마감하는 길임을 깊이깊이 깨우쳐 안았던것이다.

설향이는 눈을 감았다. 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는 지난날 가끔 남편이 꿈에 나타나 자기를 꾸짖던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대는 시부모님을 공대치 아니하고 시집을 탈가하는것이 녀자의 칠거지악중의 하나라는것을 모르느냐?》, 《아버지가 높이 계시면 그 딸이 녀자의 행실을 그르쳐도 뻐젓이 살수 있느냐?》

당장 하늘땅이라도 들부실것같은 남편의 무서운 호령에 화닥닥 놀라 깨여나면 꿈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꿈이 아니라 생시다. 꿈에 남편한테서 몇번 죽을번 하였는데 오늘은 참말 생시에 죽을 차례가 왔다고 생각되였다.

그는 완기가 남편이기 전에 먼저 생명의 은인임을 다시한번 뼈에 새겨안았다.

(아, 서로 끊지 못할 인연이 미리 정해져있었던가. 왜 이렇게 죽을 고비에 빠져들 때마다 꿈과 같이 나타나 나를 살려낸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는 남편의 칼에 죽으리라. 다만 《여보, 여한이 없소이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게 하여주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소원이였다.

완기는 설향이가 자기의 《죄》를 늘 가슴한쪽에 안고있었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시각에 아버님의 신상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잊지 않고 그때에 저질렀던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다 쏟아놓을수 있겠는가?

만약 본가에서 부모들이 시집에 돌아가라고 그에게 한마디만 했다면 설향이는 옥천으로 돌아와 며느리로서, 안해로서 의리를 지켜갈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표는 오위도총부의 대호군이랍시고 한갖 시골선비에 지나지 않은 조헌이 부복사죄해오기를 기다리며 딸을 붙잡아놓았는지도 또한 모른다.

완기는 설향이가 가엾었다.

《설향이는 일어나오. 제 잘못을 알았으면 죽을 까닭이 없는것이요. 어서 일어나 제 가고싶은대로 가오.》

설향이는 눈물을 씻고 결연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두눈에 무엇인가 끌수 없는 불길이 타올랐다.

《소녀는 남편의 칼을 받든가 아니면 살아서 랑군님을 따라 의병들이 가는 길을 가겠소이다. 이 두 길이 아니면 저는 내 손으로 목을 찔러 죽으리다.》

완기는 불시에 눈굽이 뜨거워졌다. 아 아, 설향이에게 이런 장한 싹이 알게 모르게 묻혀있었던가. 그는 그것이 반갑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참 잘 생각했소. 그래야지. 그래야 해. 의병에 드는것은 아버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 아버님을 뵈오러 가야지.》

완기는 설향이를 손잡아 일으키였다.

시녀 옥섬이는 눈물이 가랑가랑 맺힌 눈에 기쁨을 듬뿍 담고 완기앞에 엎드리였다.

《도련님, 쇤네도 아씨를 따라 의병에 들겠나이다. 저도 데려가 주시오이다.》

《그래, 옳다. 너두 가자. 하지만 의병대에서 네가 견디여낼것같지 않구나. 먹을것도 못먹고 자고싶은 때도 못자고 명령과 규률에 복종해야 하고 하루에 백리를 걸어야 할 때도 많고 또 왜놈과 창과 칼을 맞대고 네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하면서 싸워야 한다. 그래도 의병대에 들어가겠느냐?》

《예, 의병들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쇤네라고 못할리가 없소이다.》

옥섬이는 피나게 입술을 옹쳐물었다.

잠시후에 설향이는 의병장인 시아버님앞에 무릎을 꿇고 그동안 시집에 지은 잘못과 청주에 사로잡혀있었던 이야기를 완기앞에서 하였던것처럼 눈물과 함께 쏟아놓았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권세를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란시에 나라와 백성들이야 어찌 되든 저만 살겠다고 도망하는데 시아버지는 나라의 덕을 입은 사람도 아니지만 임금을 위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의병을 불러일으켜 왜놈과 싸우는것을 보고 이 시아버님이야말로 내가 며느리로서 효성다해 끝까지 모셔야 할분이라고 굳게 마음다지였다.

아버님, 이 못난 며느리를 의병대에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아버님을 따라, 남편을 따라 의병대에서 끝까지 왜놈들과 싸우겠나이다.》

조헌의병장은 기쁘게도 환히 웃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내 잃을번했던 며늘아기를 인제야 찾았고나. 나는 네가 치욕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난것만도 기쁘니라. 사람이 파란곡절을 겪다가도 그것을 뚫고나가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느니라. 나는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노라.》

조헌의병장은 설향이를 손잡아 일으켜주고 대견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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