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5 장
청주성 해방
8
(3)
그는 시어머니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앉았다.
《
시어머니 신씨는 한동안 깊은 시름에 잠겨 긴 한숨을 내쉬였다.
《며늘애야, 너무 마음쓰지 말아라. 그 일때문에 혹시 너희부부사이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되느니라.》
《알았나이다.》
설향은 혀아래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옥천시집을 떠나 한성본가로 갔다.
했으나 남편이 성균관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마음이 앵돌아졌다. 인제는 남편의 장원급제도 바랄수 없게 되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좋은 벼슬자리에도 오르지 못할것이였다. 그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부귀영화의 앞날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벼슬도 없는 남편과 함께 어찌 시골에 박혀 두더지처럼 땅을 뚜지며 한생을 농사로 보내겠는가.
설향은 완기를 따라 시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3~4년을 사는 동안에 시름에 싸여 날과 날을 보내였다. 설향이 자기가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본가집에 돌아와 살아간다는 창피스런 말이 나돈다는 소문때문이였다. 떡은 떼고 말은 보탠다고 그런 소문엔 별의별 억측까지 껴묻어 돌아가기마련이다. 이것은 저자보러 나갔다가 옥섬이가 얻어들은 소문이였다. 설향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설향아, 너무 상심말아라. 때가 되면 너의 남편이 제 잘못을 알고 너를 데리러 올 날이 있을게다. 그때 떳떳이 시집에 돌아가도 늦지 않느니라.》
어머니가 이렇게 웃으며 위로해주어서 설향이는 시집에 돌아가기를 한해한해 미루어오다가 급기야 임진왜란을 만난것이다.
왜적이 한성가까이 들이닥칠 때 아버지 박표는 딸과 부인을 북악산 어느 절간의 암자에 피신시켜놓고 김공량과 함께 어가를 따라갔다.
임금이 백성들과 함께 수도를 지키지 않고 피난하도록 부채질을 한 사람은 그때 당시의 령의정 리산해와 좌의정 류성룡이였다.
한성을 타고앉은 고니시와 구로다는 한성의 북악산, 인왕산의 깊은 산속에 조선조정의 문무대신들의 가족들이 피신해있다는 간자들의 말을 듣고 군사들을 내몰아 산속을 훑어내렸다. 조선대신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조선에 여러가지 양보를 받아낼 흉책을 꾸미려는것이였다. 여기에 걸려든것이 박설향과 그의 시녀였다. 고니시는 설향의 월태화용같은 미모에 군침이 돌았지만 애써 음욕을 눌러버리고 그를 도요또미에게 보내서 노리개로 삼도록 해주리라고 작정하였었다. 그것으로 후날 큰상을 받고싶었던것이다.
박설향은 왜놈에게 붙잡히자 자기를 구원할 사람이 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청주성에 압송되여오자마자 조총소리, 화포가 터지는 소리, 아우성소리, 비명소리가 한데 뒤섞여들려왔다. 틀림없이 조선군사들이 성안의 왜적들을 치는 싸움을 벌리는것같았다.
(우리 군사가 이겼으면, 흉악한 왜놈들을 깡그리 몰살시켰으면…)
이 간절한 마음은 갇혀있는 녀인들의 하나같은 소원이였다.
그 소원은 설향의 가슴속에서도 불타올랐다. 하지만 왜놈들이 이제라도 닥쳐들어와 녀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망칠수 있으므로 무섭기도 하였다.
설향은 왜놈들이 녀인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칠수 없다고 여겨져서 죽음을 피할수 없게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값없이 죽게 되여 원통스러웁다. 그런데 뜻밖에 이렇게 살아난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같은 구원자가 나타나서 자물쇠를 까부시고 문을 활짝 열어젖힌것이다!
그는 첫 순간에 구원자가 다름아닌 완기임을 알아보았다. 맑고 시원한 눈, 지혜와 슬기가 빛나는 눈, 한없는 동정이 어린 눈으로 녀자들을 바라보는 그 인정, 성큼한 키, 담벽같은 가슴, 억센 힘과 담력이 넘치는 몸… 저 사나이가 길도적의 자루속에 들번하였던 나를 구원해주었고 이번에는 왜적의 손에서 또다시 나를 구원하여주었구나. 허지만 어찌 뛰쳐나가 그 품에 안길수 있으랴. 내가 남편을 마음속으로 멀리하지 않았던가.
설향은 완기를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된것이 물속에 빠져죽는것보다 더 괴롭고 무서웠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더 창피스럽고 더 수치스러웠다.
완기는 시녀가 《옥천집도련님이시였군요.》 하고 뒤걸음치는 순간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도 놀랐다. 설향의 몸종으로 옥천집에 내려와 살던 옥섬을 어찌 모르랴. 그러니 얼굴을 싸쥐고 등을 돌려대고있는 저 녀자가 설향이란 말인가.
만일 저 설향이가 안해로서, 며느리로서 자기가 할바를 다하였다면 그를 더욱 열렬하게 사랑하였을것이였다. 본가집 아버지가 우리
그러나 설향이는 본가로 간 다음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것은 부부의 인연을 끊는다는 무언의 소식과 같은것이다. 그는 제손으로 밭을 갈아 먹는 집이 싫었던것이요, 본가집아버지를 규탄한 시아버지가 옳았다는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때문에 설향이는 이처럼 불행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되였다고 완기는 생각하였다.
만일 의병대가 청주성을 해방하지 않았다면 왜나라에 끌려가 호색한들의 노리개로 전락되였다가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를 구렁텅이에 빠져들것이였다.
완기는 설향이가 측은하게 여겨지고 불쌍해졌다. 그래도 한때 자기의 사랑하는 안해가 아니였던가. 그는 옥섬을 침착하면서도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시녀는 너의 주인과 함께 가고싶은 곳으로 가게. 사람이 평시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번 란리가 뚜렷이 가르쳐주고있네. 부귀영화만을 바라던 간신무리들은 다 도망가고 무지렁이라고 업심당하던 백성들이 의병을 뭇고 왜적을 치고있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디에 가든 왜적을 치는 백성들을 도와주게. 너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살았으니 삼녀를 잘 알고있지. 그가 남복차림을 하고 왜놈들을 치고있네. 잘 가게. 도움을 바랄것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도 좋고 의병장님을 찾아와도 좋네. 잘 가게.》
그것은 시녀 옥섬에게보다 설향에게 하는 말이였다. 설향이도 이것을 알았다.
그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완기의 발부리앞에 왈칵 무너지듯 부복하였다.
《저는 시부모님과 남편앞에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흑… 으흑… 저를 이 자리에서 죽여주소서. 죽는대도 그 죄를 다 벗지 못할것이지만 어서 죽여주소서. 흑… 흑… 으흑…
시부모님들이 귀양지에 갈 때도 알고있었지만 따라가 고생을 함께 하지도 않았고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상소문을 올리고… 이마를 주추돌에 찧고…
그것은 설향의 진심이였다. 두해전 섣달에 귀양지에서 돌아오던중에 시
아, 이를 어쩐담. 어쩌면 좋담… 그는 너무나 큰 충격에 정신이 아찔하였었다. 시집과는 담을 쌓고있었는데 그 담이 왜 이리도 불시에
무너져내리는지, 왜 이렇게 당황해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