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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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노을이 피여오르는 대동강에서는 처절썩 세찬 물결이 쉬임없이 밀려와 기슭을 때리고 구슬같은 포말들이 황혼빛에 령롱한 무지개를 펼치며 휘뿌려졌다. 강철숙은 자기 생애에서 지금처럼 순간이 몇년처럼 아득히 길어보인 때는 없었다. 또 한초한초의 정적이 온넋을 열파속에 시달리게 하는 곤혹을 느끼게 한적도 없은듯싶었다. 고래마냥 긴 등을 솟구치고 우뚝 선 바위우에 굳어져있는 림춘추를 보는 강철숙의 눈가엔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길 없는 아픔이 슴배여올랐다.

그는 어제 신의주-평양행렬차로 쇼우와 함께 꿈속에서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모성애까지도 짓눌러버렸던 리성의 벽이 그 어떤 충동으로 평양행을 단행케 하였던가.

지금껏 혁명의 총대를 잡았던 자신의 존재를 파묻고 살아온 강철숙. 그가 돌발적인 평양행을 결심하기까지는 참기 어려운 번민의 날과 달이 흘렀다.

쇼우는 강철숙의 평양행을 한사코 막아나섰다. 마음속 애가 다 녹아내리도록 한생에 흘린 눈물로 내를 이룬 강철숙의 비애에 찬 심사를 다 알길 없는 쇼우로서는 자기딴의 인생지론이 있었다. 혁명의 길에 나섰다가 중도에서 주저앉은 사람으로서 이제 평양으로 간다는것은 딸의 운명에 너무도 가혹한 함정을 판다는것이였다. 지금껏 혁명가의 딸로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행복의 노를 젓는 딸을 다리밑에 버렸던 그때처럼 또다시 가혹한 해일로 무참히 수장하는것, 이것이 과연 모성애인가? 지금처럼 혁명을 하다가 희생된 어머니로 남아있는것이 딸을 위해 어머니가 바칠수 있는 마지막모성애가 아닌가!

강철숙은 쇼우가 그처럼 안타까이 웨치는 호소에서 마음속장벽을 산산이 부실 의지를 가다듬었다. 딸의 운명에 던져질 그늘때문에 신성한 혁명렬사들의 이름속에 강철숙이라는 존재가 서있다는것은 죄악이라는 그것이였다. 피어린 항일의 나날 꽃다운 청춘을 바친 유명무명의 전우들을 모독하는 죄악은 대오에서 떨어졌던 과오보다 더 큰 범죄가 아니겠는가.

강철숙은 지금껏 잊고 살았던 자기의 옛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오각별 빛나는 군모에 군복을 입고 총대를 잡았던 녀인, 그날의 강철숙이가 되여 혁명앞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총화받으리라. 그래서 그는 부대를 찾아 떠나듯 평양으로 갈 용단을 내리였다.

쇼우는 처음 보는 조선의 산과 들에 매혹되여 화면처럼 흘러가는 푸른 계곡들과 아담한 농촌문화주택들, 끝없이 펼쳐진 전야에 날아예는 백학떼를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고있었지만 강철숙은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조국의 산과 들이 그윽히 풍겨주는 그 향수를 감수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렬차가 평양역에 도착하자 강철숙의 심장은 터질듯 고동쳤다. 이제 역구내에서 자기를 기다릴 사람은 과연 누구일것인가. 심양총령사관에서는 쇼우도 데리고가라고 하였다. 그때 강철숙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조국에 가면 어떤 운명이 자기를 기다릴지 알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강철숙의 이 주저와 동요를 산산이 밀어버린것은 쇼우였다.

《어머니, 나도 함께 가겠어요.》

강철숙이가 아무리 설복하여도 쇼우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강철숙은 쇼우와 함께 국제렬차에 몸을 실었다.

강철숙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렬차승강대에서 내렸다. 강철숙을 맞아준 사람은 당력사연구소 과장 김태호였다. 신의주에서부터 자기를 안내해온 외무성 지도원(당시)이 김태호를 강철숙에게 소개해주었다.

강철숙은 김태호에게 이번 길에 림춘추를 꼭 만났으면 하는 의향을 비치였다. 그리하여 오늘 여기 대동강가에서 림춘추와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이 꿈같은 상봉에 림춘추는 뿌리채 들리워 쓸모없는 고목이 될번하였던 자신에게 인생의 무성한 새 아지를 펼치도록 해주신 위대한 정의 세계를 강철숙의 운명을 두고도 또다시 가슴뜨겁게 새겨보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을 따라 혁명의 길에 나섰던 한 녀투사의 정치적생명을 두고 천길, 만길 마음쓰시며 기어이 찾으시여 오늘은 조국으로 불러주시였다.

림춘추의 이 마음속 격정을 아직은 알리 없는 강철숙은 이 시각 자기나름의 우물을 파고있었다. 자기가 소각한 그 력사기록들을 사령부 비서처가 생사를 판가리하는 혈전장들에서 어떻게 지켜왔는지 잘 알고있었기에 모진 괴로움에 빠져있었던것이다.

대동강기슭으로 물오리들이 떼지어 날아왔다가는 원을 지으며 강복판으로 나래를 퍼덕이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한마리의 물오리가 허공에서 배회하며 구슬프게 울었다.

강철숙은 물기어린 눈길로 주저주저하며 림춘추를 조심히 일별하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숨가쁜 침묵을 깼다.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찾아뵙는것이 모욕으로 된다는걸 잘 알고있어요.》

《그걸 알면서 왜 왔소? 자식도 없고 동지도 없고 조국이라 부를 권리마저 없는 이 땅에 왜 왔는가 말이요?》

《옳아요. 하지만 인생의 판결은 받아야겠기에 왔습니다.》

《판결?》

《죽기보다 살기가 더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사령관동지의 품을 잃은 그때부터 넋잃은 산 송장과 같은 인생이였습니다. 그래서 차마 조국으로 올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딸이 혁명투사의 자식으로 우대를 받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럴수 없었습니다. 혁명의 길에서 생명을 바친 조선혁명가들의 성스런 이름속에, 조국이 잊지 않는 항일혁명렬사들의 명부에 감히 강철숙이라는 이름도 있다고 생각하니

강철숙은 고개를 떨구며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림춘추는 낮으나 준절한 목소리로 쪼아박듯 말했다.

《동문 지금 사령관동지의 품을 떠난 그때부터 오늘까지 당한 마음속고충을 터치고있는데 강철숙이란 녀성보다 몇갑절 더 큰 아픔을 안으시고 밤을 지새신분이 계시오.》

림춘추는 김정일동지께서 젖먹이딸까지 버리고 총을 잡은 한 녀투사의 인생을 지켜주시기 위해 마음쓰시며 여러차례에 걸쳐 광고를 내도록 해주시였다고 목갈린 어조로 웨쳤다.

《어떤 사람들은 동무가 살아있다면 놈들에게 체포되여 변절했을수 있다고, 그 죄로 하여 딸까지 있는 조국으로 오지 못할거라고 했소. 그런데 김정일동지께서는 동무는 변절할수 없다고, 딸까지 다리밑에 두고 울며 유격대로 찾아간 녀성이기에 자신처럼 믿으신다고 하시면서 딸에게도 그가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혈통을 바로 알게 하자면 동무를 꼭 찾아서 조국으로 데려와 백두의 행군길을 계속 이어가게 해야 한다고 하시였소. 그분의 마음속아픔을 생각하면 난 지금도 가슴이 미여지는것같소.》

강철숙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무섭게 어깨를 떨었다.

《동문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전설같은 이야기로 생각할수도 있소. 하지만 이것은 전설이 아니요. 수령님께서는 수십년세월 아동단원 금순이의 혈육을 찾지 못하여 심려에 심려를 거듭하시였소.

찾고찾다 모두가 단념하고 물러섰지만 김정일동지께서 끝끝내 찾아내시였소.》

림춘추는 김정일동지께서 수십년세월이 흐른 오늘 금순이의 혈육인 남동생을 찾으셨다고, 그런데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을 알지 못하시여 또 마음쓰고계신다고 하였다.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던 강철숙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하조직에서 준 과업을 받고 왕우구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 최옥봉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최옥봉의 품에서 젖을 먹는 애기를 보았다.

그 애기의 이름도 분명 들었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였던가?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애기를 품에 안고 능금알같이 발그레한 볼을 도닥여주며 자기도 그 이름을 불렀댔는데

기슭을 치며 주름발을 펼치는 물결에 추억의 노를 젓던 강철숙은 《아!-》하고 부르짖었다. 세월의 망막속에 묻혀버렸던 그 이름이 떠올랐던것이다. 애기의 이름은 량남이였다, 김량남.

감빛노을에 물든 물결이 강기슭의 바위를 휘감으며 쏴- 흐느낌의 포말을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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