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 회)
제 5 장
8
《그게 정말입니까?》
김태호는 말할것도 없고 흥분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허담도 어지간히 격동되여있는것이 알렸다.
《그러니 살아있을수도 있다는거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모스크바대사관에서 보내온 자료입니다.》
허담의 지시에 따라 쏘련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에서는 대일전쟁시기 만주방면으로 진출하였던 쏘련군이 괴뢰 《만주국》의 수도 장춘에서 압수한
위만군경문건들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였다. 자료는 몇차량이나 되게 방대하였지만 1940년 6월부터 연길, 훈춘일대에서 감행한 《토벌》작전에서
항일유격대의 활동자료문건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상급에 보고한 문건을 찾는것으로 조사범위를 한정했으므로 쉽게 찾을수 있었다.
허담이 드리는 문건사본에는 국제당련락원들을 호송하던 항일빨찌산 소부대《소탕》당시 포위에서 더는 빠져나갈수 없게 된 일행이 문건배낭을 품에 안고 자폭하였으나 채 타지 않은 자료들을 적지 않게 《획득》한 경위뿐 아니라 기본대오에서 갈라져 페갱에 숨었다가 나머지 문건들을 소각하고 빠져나간 녀대원을 추격하다가 《공비》를 동조한 중국녀인 구자영의 희생적인 방조로 놓쳐버린 경위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어린 딸자식을 다리밑에 놓아두고 혁명을 위하여 산으로 오른 녀투사의 생을 끝까지 찾아서 빛내주고 수경이한테 어머니가 어떻게 최후를 마쳤는가를 알려주자고 시작한 일인데 결국은 결과가 아니라 실머리를 잡은데 불과하지 않습니까.》
김태호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좀 묘연하기는 해도 방도가 있습니다.》
그 말에
《어떻게 말입니까?》
《그 자료에 빨찌산녀대원이 자기를 구원하고 희생된 중국녀인의 애기를 안고 사라졌다고 되여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허담이 대답드렸다.
《과장동무는 중국 연변의 공안기관과 련계를 가지고 로두구출신의 스물여섯살부터 스물여덟살까지의 사람들을 조사해보자는 안을 제기했습니다.》
《가능할가? 만약…》
말씀을 끊으시고 다시 사색에 잠기시였던
《내 생각에는 말입니다. 중국 신문과 방송들에 딸 수경이의 이름으로 광고를 다시 내보내는것이 어떻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만약 살아서 조국이 한
녀투사의 딸을 어떻게 찾아서 품에 안아키웠는가를 알게 된다면 그 어떤 곡절을 혼자서 묵새기며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그가
허담과 김태호가 환성을 질렀다.
《그게 좋겠습니다.》
이어 허담이 심중한 기색으로 말씀드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보고드릴것이 또 있습니다.》
외무성이 강철숙을 찾는 일에 나서자 국제부의 박용국은 은근히 빗장을 질렀다.
그 녀대원이 살아있다면 왜 지금까지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겠는가, 또 설사 살아있으면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분명 그 무슨 곡절이 있을게 아닌가, 부상당한 몸으로 놈들에게 잡혔다가 변절했을수도 있고. 남자도 아닌 녀성이니 십분 그럴수 있는데 이제 와서 콩이요, 팥이요 하며 계산한다면 공산주의자들로서 너무 야박하지 않는가. …
허담의 보고를 들으신
《사랑하는 딸까지 떼놓고 혁명의 총을 잡았던 녀성을 두고 감히 변절이라는 감투를 씌우는가?! 나는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녀투사를 믿습니다. 나
우리는 단순히 그의 생사여부나 알자는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의 넋으로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가야 할 딸이 있는 녀성,
이어
《당대표자회결정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지금까지 양봉음위하던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고있습니다.
당중앙위원회는 도, 시, 군 및 공장당책임비서 협의회에서 하신
그러시고는 이름할수 없는 감회를 안으시고 백살구꽃이 만발한 정원을 내다보시였다.
당중앙위원회의 구내에 늘어선 살구나무에 핀 꽃들이 금시 흰눈송이로 엇갈려
언뜻 모란봉에서 이해 1967년 1월의 무거운 눈을 맞으시던 그밤이 떠오르시였다.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이해 첫 기슭의 그 함박눈…
그러나 그 겨울을 이겨낸 당중앙위원회정원에 백살구꽃이 만발하고있다!
《당중앙위원회에 봄이 왔습니다. 이 봄에 우리 당의 강화발전에서 력사적전환이 일어날것입니다.》
허담과 김태호는
…연길에 온 강철숙은 로두구탄광 합숙식모로 취직하였다. 취사장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대끼니 육체적피로는 심했지만 집에서 홀로 고민보따리를 안고 모지름쓸 때보다는 한결 정신적안정을 찾을수 있었다. 합숙생들의 저녁식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뜻밖에도 심양에서 쇼우가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쇼우는 신문을 한장 내놓았다. 강철숙의 딸 수경이의 이름으로 된 글에는 자기 어머니 강철숙은 혁명을 위해 어린 딸자식을 다리밑에 놓아두고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잡은 녀성이라는것, 유격대에서 싸우던중 1940년 6월말 임무를 받고 국제당으로 가다가 로두구부근에서 적《토벌대》와
맞다들렸을 때 항일유격대의 비밀문건들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희생적으로 소각했다는것, 그후 부상당한 몸으로 적들의 추격을 받는 자기를
산전막에서 희생적으로 구원해준 구자영이라는 중국녀인의 젖먹이를 안고 종적을 감추었다는것, 수경이
《어머니, 어머니에게 친딸이 있었어요? 신문에 난 이 녀선생이 어머니의 딸이예요?》
강철숙에게 친딸이 있었다는것을 모르고 살아온 쇼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다우쳐물었다.
《어머니가 정말 친딸을 다리밑에 놓고 유격대로 갔어요?》
강철숙은 무아몽중의 파도에 떠밀린듯 신문에 실린 수경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닭알형의 단아한 얼굴, 그린듯한 반달형의 눈섭, 알릴듯말듯 미소를 머금은 정기도는 눈빛. …
터져라 입술을 옥물며 고개를 떨구는 강철숙의 두어깨가 무섭게 떨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다리밑에 놓았던 피덩이같은 어린 딸이 살아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조국은 그 딸을 찾아서 품에 안아키웠을뿐 아니라 세월의 갈피를 번지고번지며 누구도 모르는 자기의 마지막투쟁까지도 다 알고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있을수도 있는 자기를 안타까이 찾고있지 않는가. 비오는 밤 다리밑에서 태질하며 울던 어린 딸이 신문에서 금시 《어머니!》하고 부르며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
눈보라가 앙상한 나무가지를 휘여잡으며 기승스레 몰아치던 겨울날 연길감옥에 갇혔던 남편은 족쇄를 끌며 사형장으로 나섰다. 어린 딸 수경이를 업고 정신없이 사형장으로 달려온 강철숙은 남편의 앞길을 막으며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등에 업힌 어린것도 강철숙의 곡성에 여린 목소리를 합치며 태질했다.
왜놈장교옆에 선 통역이 강철숙의 남편을 보며 지껄였다.
《장교님은 이제라도 공산당조직을 내놓으면 용서해주겠다고 한다. 처와 딸이 불쌍하지도 않는가?》
남편은 수갑을 찬 손으로 강철숙의 등을 어루만졌다.
《여보, 내 일공로동하며 사다놓은 보리쌀로 얼마간은 살아갈수 있을게요. 그 쌀을 가지고 삼촌댁을 찾아가오. 가서 내 인사도 전해주구…》
남편이 말한 보리쌀이란 뒤울안 창고에 숨겨둔 권총이였다. 남편이 깊은 밤에 왜놈순사를 곤봉으로 까고 마련한 총이였다. 남편은 그 총을
닦으며
남편은 강철숙에게 믿음이 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며 언덕밑에 세워놓은 교수대를 향하여 걸어나갔다. 이것이 강철숙이가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이였다.
남편이 사형당한 후 강철숙은 모진 결심을 품었다.
그것은 어린 딸 수경을 남에게 맡기고 유격대로 떠나려는 결심이였다. 그런데 막상 수경이를 맡기자니 가까운 친지들이 없었다.
남편이 희생된 때로부터 6개월이 지난 보슬비 내리는 밤에 강철숙은 집을 판 돈을 애기의 포단속에 종이에 싸서 정히 넣고 나섰다. 종이에 싼 돈속에는 애기의 양육에 보탬해달라는 간절한 소원도 몇글자 적었었다. 어둠속으로 걸음을 옮기던 강철숙은 요란한 울바자를 한 독립가옥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포단에 싼 딸 수경을 철판으로 만든 대문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때 인기척을 알았는지 담너머에서 개가 요란스레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개짖는 소리에 잠에 들었던 애기가 깨여나며 울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철숙은 애기를 안고 황황히 대문가를 떠났다.
강철숙이가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산밑의 강기슭에 있는 반토굴집이였다. 나무껍질로 이영을 한 토굴집은 처마가 어찌도 낮은지 뒤쪽으로는 산탁과 거의 잇닿아있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한길가량 들리워있었다. 몹시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집이라는것이 대뜸 알리였다. 철숙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일수록 인정이 많은 법이라는 생각에 이 집에 애기를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쌔근쌔근 숨을 톺으며 자는 애기를 집문옆에 놓는 순간 안에서 요란한 기침소리에 이어 가래를 톺아올리는 거친 숨소리가 새여나왔다. 신병에 시달리는 로인의 집이 틀림없었다. 환자까지 있는 집이고보면 애기를 양육하기가 어려울것은 분명했다. 철숙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그으며 포단에 싼 애기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젠 어데로 가야 하는가. …
밤하늘에서는 강철숙의 두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처럼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강기슭을 따라 허청걸음을 놓던 강철숙은 다리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애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피덩이같은 자식에게 어머니로서 마지막젖을 먹인다고 생각하니 등골에 얼음덩이가 붙은듯 전률이 일며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량볼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강렬한 모성애가 안아온 동요는 강철숙이가 품었던 결심을 모래성처럼 허물기 시작했다.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는 강철숙의 귀청을 치며 이번엔 남편의 최후의 웨침이 울려왔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항일유격대는 일본침략자들을 쳐부시고 반드시 조국을 독립할것입니다.
강철숙은 터져라 입술을 옥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된다. 떠나야 한다, 항일유격대로!
강철숙은 애기에게 마지막젖을 먹이고 포단을 꽁꽁 여미여준 후 다리밑에 놓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발자욱을 옮겼을 때 잠에서 깬 애기가 울기 시작했다. 애기의 울음소리는 고압전류마냥 강철숙의 온몸을 찔렀다. 순간 강철숙은 저도 모르게 와뜰하며 굳어졌다. 급기야 돌아서며 애기를 안으려던 강철숙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이제 애기를 안으면 더는 품에서 놓지 못한다. 강철숙은 가슴속에 이글거리는 모성애를 이길 리성의 힘이 자기에게는 없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애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두손으로 귀를 싸쥐고 강기슭을 따라 정신없이 달리며 울음섞인 소리로 웨쳤다.
《여보… 보리쌀… 보리쌀을 가지고… 삼촌을 찾아가요. … 아… 흑-》
강철숙은 가슴에 품은 권총을 두손으로 꽉 쥐고 금시 넘어질듯 비청거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사나운 비바람이 강철숙의 온몸을 휘감으며 태질했다.
간난신고로 유격대를 찾아 입대한 강철숙은 그 누구에게도 자식을 버렸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림춘추가 딸애는 누구에게 맡겼는가고 물었을 때에는 참고참아온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난, 난… 녀자가 아니예요. … 어머니가 아니예요!》
림춘추도 억장이 무너지는것같은 아픔에 강철숙의 손을 꼭 잡으며 한마디한마디 씹었다.
《조국을… 해방하고 꼭… 수경이를 찾자구!》
강철숙은 목놓아울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애는 살지 못해요. 누가… 누가… 그 애를…》
그런데 이 세상에 없는줄만 알았던 딸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