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 회)

제 5 장

6

(2)

 

눈발이 뽀얗게 흩날리며 앞을 가리는 등판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강철숙이 눈살을 쪼프리며 바라보니 림춘추였다. 강철숙은 너무도 기뻐 배낭을 흔들며 림춘추를 불렀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는 입안에서 맴돌뿐 터지지 않았다. 림춘추를 향해 죽기내기로 달리려 해도 발목에 돌덩이를 달아매놓았는지 걸음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등판에 서있는 림춘추 역시 조각인듯 무표정해서 굳어져있다. 강철숙은 너무도 안타까와 달리려다가 나무등걸에 걸채여 넘어지며 《악-》 비명을 터쳤다. 온몸이 칼로 찌르는듯하는 아픔에 입새로 신음을 터치며 힘겹게 눈을 뜨는 강철숙의 시야에 불그레한 가는 빛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움막속의 등잔불이였다. 의식을 회복한 강철숙이 가까스로 몸을 뒤채기며 일어나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자기 어깨에 닿는것을 알고 와뜰 놀랐다. 애기를 업은 30대의 녀성이 그를 부축하는것이 아닌가. 방금 꿈속에서 림춘추를 보았는데 의식을 회복한 지금 낯모를 녀성이 눈앞에 나타나자 강철숙은 저도 모르게 와뜰했다. 녀인은 정어린 미소로 강철숙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강철숙의 앞에 미음그릇을 내놓았다.

강철숙은 녀인의 눈길에서 적의가 아닌 동정의 빛을 감수했다. 연길에서 살면서 익힌 어설픈 중국말로 배낭부터 찾았다.

구자영이라는 이 녀인은 남편이 포수였는데 한해전 동북항일련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어린 딸 쇼우를 데리고 산속에서 산나물도 뜯고 때로는 사냥도 하면서 남편의 소식만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던 그는 사냥을 나왔다가 서너명의 《토벌대》놈들이 쓰러진 강철숙을 묶으려고 할 때 두놈을 쏴갈기고 강철숙을 구원해주었다. 살아남은 두어놈은 도망쳐버렸다.

《배낭은 건지지 못했소, 다 타버리구.》

그 한마디에 강철숙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또 의식을 잃었다.

구자영이라는 중국녀인은 강철숙을 땅속 움에 넣고 상처를 치료해주며 극진히 돌봐주었다.

부상당한 어깨의 상처는 화농되면서 독을 쓰기 시작했지만 다리의 총상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 때 밖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왜놈들이 산전막에 나타났다는것을 대뜸 짐작할수 있었다. 철숙은 싸창을 뽑아들고 격발기를 당긴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강철숙으로서는 왼손으로 움막문을 위장하느라 가려놓은 나무단을 제끼는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입술을 어찌도 깨물었는지 터갈라진 입귀에서 피까지 흘러내렸다.

간난신고로 겨우 움막문을 열어제낀 강철숙은 아연해서 굳어졌다. 왜놈 너덧놈이 산전막앞에서 구자영을 둘러싸고 왝왝 고아대고있었다.

《너 여기에 공비년을 숨겨뒀지? 대라, 어디 있어?》

놈들은 구자영을 차고 때리며 야수같이 헤덤볐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날치는 굶주린 승냥이무리를 련상케 했다.

자그마한 산전막안에서는 애기의 울음소리기 처량하게 울렸다.

놈들은 산전막에 불을 질렀다. 산전막이 점점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산전막안의 불길속에서 우는 애기를 구원하려고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구자영을 놈들은 구두발로 차고 때리더니 그의 옷을 벗기려고 날치였다. 강철숙은 더이상 참을수 없어 총을 꼬나들었다. 그 순간이였다. 구자영이 놈들에게 항거하며 달려들자 한놈이 그의 가슴을 총창으로 찔렀다.

《이놈들아!》

강철숙이 총탄을 날렸다. 구자영에게 총창을 박은 놈이 돼지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너부러졌다. 강철숙은 쏘고 또 쏘았다. 삭정이처럼 뼈만 앙상한 놈이 혼비백산하여 잡관목숲에서 딩굴며 산아래로 도망쳤다. 강철숙은 애기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오는 불타는 산전막으로 들어가 발버둥치는 애기를 안고 나왔다. 그리고는 쓰러진 구자영을 부둥켜안았다.

구자영은 애기를 피흐르는 가슴에 꼭 안더니 《쇼우, 쇼우》하고 부른 후 뭐라고 몇마디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구자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강철숙은 알아들을수 없었지만 그것은 자기 딸 쇼우를 돌봐달라는 간절한 유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강철숙은 애기를 안고 산속을 헤매였다. 어깨에 부상을 당한데다 놈들의 총창에 찔렸던 다리를 끌다싶이하며 산속을 헤맨다는것은 말할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광활한 밀림속에서 다시 만난다는 아무런 약속도 암호도 없었던 부대를 찾는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오직 우연에 기대를 걸수밖에 없었다.

구자영이 남기고간 젖먹이 쇼우는 산속에서 헤매는동안 고열에 시달리고있었다. 강철숙은 우선 쇼우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인가를 찾아 내려갔다. 그리하여 연길현 로두구탄광 뒤산의 움막에서 마음씨 고운 중국인로파를 만나게 되였다. 아들, 며느리가 다 항일련군에서 싸우다 희생된 로파는 홀로 살고있었다.

로파가 말린 산나물들을 가지고 로두구시가지에 나가 팔면서 유격대의 소식을 알려고 무진애를 썼으나 종시 유격대를 찾을길이 없었다. 더구나 부상당한 어깨의 상처가 심한 화농을 일으키면서 2년나마 고초를 겪었다. 마음씨 고운 의원을 만나 겨우 외팔이신세를 면하게 되였다. 게다가 구자영의 딸 쇼우에게 발목이 잡혀 움막을 떠날수 없게 되였다. 강철숙은 호적등본에 로파의 조카딸로 등록하고 살림을 펴나갔다.

나라가 해방되여 동북지방에 있던 조선사람들이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며 너도나도 보짐을 꾸릴 때 강철숙은 쇼우를 데리고 도문으로 가는 삯마차를 얻어탔다. 그러나 강철숙은 두만강을 건늘수 없었다.

끝까지 투쟁을 하지 못하고 대오에서 떨어진 몸, 더구나 조국이 해방되고보니 해방조국의 귀중한 재보로 될 력사기록들을 끝까지 보존하지 못한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강철숙은 피눈물을 흘리며 두만강기슭을 떠나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때로부터 류수와 같은 세월은 20여년의 년륜을 새겼다. 강철숙의 생활에서는 인생의 한가닥 생명수와도 같았던 삶의 희열이 사라지고 눈가장자리에 맴돌던 미소마저 고뇌의 구름장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조국도 동지들도 다 잃은 불행아라는 곤혹의 장막이 강철숙의 심신을 지궂게도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아픔을 응당한것으로 감수했다.

정신적허탈감은 잠재했던 병마의 근원으로 되였다. 하여 토질병이며 갖가지 합병들은 강철숙을 생사기로에서 시달리게 했다. 그러다나니 해방후 연변에서 활동하던 림춘추가 낸 광고를 그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나어린 쇼우는 글을 몰랐고.

마가을 세찬 바람속의 락엽처럼 말라가는 강철숙의 육체를 가까스로 지탱시켜준것은 어린 쇼우였다. 쇼우를 키워야 한다는 이 하나의 의무감이 죽음의 병마에서 시달리던 그를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게 하였다.

쇼우는 강철숙을 친어머니로 알고 성장했다. 강철숙 역시 자기의 여생을 쇼우를 위해 바치리라 마음을 굳히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문과 방송으로 자기의 희생경위를 다시 찾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격정에 눈물을 쏟으며 가슴아픈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렸다.

강철숙은 드디여 용단을 내려 곧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서게 될 쇼우에게 친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적《토벌대》로부터 항일유격대 녀대원을 구원하고 희생된 어머니의 딸로 국가의 우대를 받으며 살라는것을 이야기해주고는 엉엉 울며 따라나서는 쇼우를 뿌리치고 여기 로두구로 온것이였다. 인생의 마지막지탱점이라고 할가, 희망이라고 할가. 하나밖에 안남은 그것마저도 버리고 이곳으로 여생의 은둔처를 찾아온것이였다.

난 강철숙이가 아니다. 강철숙은 죽었다. 이 세상에 항일유격대원 강철숙은 없다, 없어!

엄혹한 겨울이 푸르른 대지를 폭설로 휩쓸어 백야를 펼치듯이 자기의 존재를 잡초를 짓뭉개듯 탕을 친 강철숙은 모든것을 체념하고 살았다. 자신의 정치적생명을 무덤속에 매몰한 강철숙, 허나 정신적안정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고 때없이 엄습하는 곤혹은 샘줄기마냥 끝없이 솟구쳐올랐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