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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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지겹게도 내린 봄장마로 연길강엔 황토색물결이 사품치며 범람했다. 연길현 로두구의 탄광마을로부터 조금 떨어진 연길강기슭의 자그마한 독립가옥의 창가에서는 밤깊도록 불이 꺼질줄 몰랐다. 심양의 번화가를 떠나 여기 산골마을로 이사온 50대의 녀인이 락수소리를 벗삼아 열려진 창가에서 떠날줄 모르고있었다. 때이른 서리가 귀밑에 흘러내린 녀인의 입에서는 돌덩이같은 한숨이 그칠새없이 터져나왔다.

이 녀인이 바로 김정일동지께서 그 희생경위를 찾고찾으시는 작식대의 강철숙이였다.

김정일동지의 가르치심에 따라 허담은 주쏘 우리 나라 대사관에 쏘련의 국가문헌고를 통한 조사사업을 하도록 상세한 지시를 보내는 한편 베이징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과 심양주재 총령사관에 련계하여 중국 동북지방은 물론 관내의 방송과 신문으로 강철숙이라는 항일유격대의 녀대원에 대해서 알고있는 사람이 있으면 본사에 알려달라는 광고를 내도록 했다. 광고에는 강철숙의 이름과 함께 구체적인 경력, 인물 특징, 부상당한 상처자리, 국제당련락원들과 함께 떠나면서 주력부대와 헤여진 장소 등이 상세히 언급되여있었다.

조국이 해방된지 스무해도 지난 오늘 자기의 생사여부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된 강철숙은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눈물속에 밤을 새고 새날을 맞군 하였다.

광고가 반복될수록 강철숙은 인총이 많은 심양에서 더이상 살기가 괴로왔다. 쫓기듯 여기 로두구의 산골마을로 피신해왔는데 로두구로 와야 할 리유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초조감이 로두구를 련상시킨것은 거의 반사적이라 할가? 어찌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선택같았지만 그것을 느낄새도, 선택의 옳고그름을 생각해볼새도 없이 무작정 떠나왔던것이다.

로두구…

고달픈 인생의 자욱우에 행복의 봄싹이 돋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연길현 8도구 소동구의 황무지에 미련을 가지고 정착하여 주인없는 황무지로 여겼던 거기에 곡식을 심어먹을만하게 되자 불현듯 땅임자가 나타나 자기의 피땀이 스민 땅을 굽신거리며 소작붙여야 했던 나라없는 백성의 후손이 강철숙의 남편이였다.

어릴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빚대신에 지주집머슴살이로 끌려들어갔던 남편은 야학방에서 글을 깨치고 혁명의 대하에 몸을 잠그게 되였다. 낫놓고 기윽자도 몰랐던 강철숙은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남편의 모습속에서 자신을 비춰보았다.

하나는 어려서부터 머슴으로 자란 부모없는 고아, 다른 하나는 이름석자도 없이 부엌녀라 불리우며 온갖 치욕을 다 들쓰던 그들이 물 한그릇 떠놓고 성례랍시고 치르던 날 남편은 말했다.

《할수 없지 않소, 아버지가 빚을 다 못갚고 죽었으니…》

그 남편의 입에서, 머슴살이 10년이 넘도록 남한테 지청구 한마디 할줄 몰랐던 남편의 입에서 어느날 돌연히 《우린 지주놈한테 속아 살았소.》라는 말이 튀여나오자 강철숙도 같이 맞받아 소리쳤다.

《우리가 사람이였나요? 짐승이였지!》

강철숙은 그때부터 인간으로 다시 태여났다. 부엌녀로부터 침략자와 략탈자들에 대한 분노로 가슴을 태우는 강인한 녀성으로 성장했던것이다. 남편이 희생된 후 유격대에 입대하여 총을 잡았다.

로두구로 다시 온 그날 강철숙은 로두구탄광 페갱에서 있었던 사연들을 눈물속에 삼삼히 떠올렸다.

…페갱안은 석수가 줄줄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매복한 적들과 불의에 조우한 소부대는 격렬한 전투를 벌리다가 두 조로 갈라졌다. 기본대오는 문건배낭을 진 국제당련락원 한명을 엄호하며 산속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부상당한 다른 한명의 련락원과 문건배낭을 멘 강철숙을 엄호하며 반대쪽으로 피신하다가 이곳 페갱입구를 발견하고 이 안으로 은페하였다. 추격하는 적들의 대부분이 산속으로 몰려갔는데 얼마후 그곳에서는 총소리가 차츰 잦아들다가 요란한 폭음이 울리고는 잠잠해졌다. 페갱안의 대원들은 눈물을 머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자폭으로 결딴냈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일행은 강철숙과 명아바이, 차동무 그리고 국제당련락원까지 네명이였는데 모두 부상을 입었다. 한쪽어깨에 탄알이 스치고지나가 그중 경상인 강철숙이 림춘추가 이전에 부상당한 자기를 치료해주던것을 기억에 되살려보며 어설픈 처치를 해주었으나 워낙 출혈이 심했던 국제당련락원은 숨을 거두고말았다.

련락원의 희생으로 국제당에 갈수가 없게 된 그들은 사령관동지께서 보내시는 문건부터 소각하였다. 나머지 자료들은 다시 부대로 가져가 사령부 비서처에 보관해야 했다. 명아바이와 차동무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걸을수가 없었기때문에 그들이 페갱을 빠져나가기 전에 적들의 수색대가 닥쳐들었다.

앞에서 기여나가던 차동무가 적들과 맞다들리자 일행을 구원하기 위해 입구의 동발기둥 하나를 붙안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갱입구가 무너졌으나 다 막히지는 않았다. 리명수에서 떼몰이군으로 사자밥을 지고 고역에 시달리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명아바이가 예비탄갑들과 수류탄 한알을 강철숙의 손에 쥐여주고 나머지 수류탄들을 묶었다.

《철숙동무, 아무래두 안되겠소. 내가 저놈들과 피값을 청산하고 갱입구를 폭파해버리겠소. 나머지 동발목 하나만 꺾어지면 무너져내릴거요. 철숙동문 이 갱안에서 나갈 구멍을 찾아보오.》

《아바이, 저도 함께 싸우다 죽겠어요.》

강철숙이 비장한 결심을 품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앉는데 명아바이가 짙은 눈섭을 곤두세우며 엄하게 질책했다.

《정신있소? 우리한텐 문건배낭이 있단 말이요. 함부로 죽을 권리가 없소. 사령부에 꼭 다시 가닿아야 하오. 사령부 비서처문건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 지금까지 보존해왔는지 동무가 더 잘 알지 않소.》

강철숙이 《흑-》하며 고개를 떨구자 명아바이가 마디굵은 거쿨진 손으로 철숙의 부상당한 어깨를 어루만졌다.

《철숙이, 최악의 순간엔 림동지의 지시를 잊지 마오. 적들의 손에 넘어가면 안되오. 알겠지?》

밖에서 적들이 미친개 짖어대듯 왝왝했다.

《투항하라! 공비들도 투항하면 다 살려준다! 정말이다!》

터갈라진 두툼한 입술을 옥물던 명아바이는 밖을 향하여 기여나갔다. 총성 몇방이 몰방으로 터지고 이어 폭음소리와 함께 입구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바이!…》

강철숙은 목메여 부르며 어깨를 떨었다.

차동무와 명아바이가 자폭한 뒤 강철숙은 굴안에서 나갈 곳을 찾아 헤맸으나 페갱안엔 다른 통로가 없었다. 강철숙은 부상당한 오른쪽어깨에 붕대를 다시 동여맨 후 배낭을 멨다. 그리고는 싸창을 뽑아들고 한치 또 한치 기여나갔다. 무너져내린 굴입구에 사람이 겨우 빠질 구멍은 있었다. 귀를 강구었으나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철숙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굴밖으로 기여나갔다. 그의 눈에 띄운것은 사그라져가는 불무지였다. 불무지주변에는 왜놈들이 없었다. 강철숙은 놈들이 철수했다고 생각하고 비청거리며 일어났다.

이때 《꼼짝말아!》하는 소리와 함께 총창들이 철숙의 앞에 나타났다. 서슬푸른 총창이 그의 오른쪽다리를 찌르는 순간 철숙은 방아쇠를 당겼다. 련거퍼 세방을 갈겨 적들을 쓸어눕혔는데 앞에서 또 적들이 나타났다. 총창에 찔리운 다리로 굴안으로 비집고들어갈수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이였다.

강철숙은 배낭을 벗어 아구리를 풀고 사위여가는 불무지에 쏟았다. 그리고는 그것들이 다 탈 때까지 적들이 다가들지 못하게 쏘고 또 쏘았다. 그러다가 눈앞에 퍼런 번개불이 번뜩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혼미한 의식속에서 련발하는 총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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