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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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준은 외국문출판사에 나가 《인민들속에서》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의 외국문번역원고들을 교열하여 인쇄공장에 넘기느라 밤을 새고 아침을 맞이했다.

새로 독립한 나라 수반들과 식민지민족해방운동지도자들이 사회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는 조선으로 앞을 다투어 찾아오고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께 혁명과 건설에 대한 령도방법과 유격전에 대해서 가르쳐주실것을 청원드리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의 지향과 요구를 알고 그에 맞게 투쟁전략과 방도를 세워 혁명투쟁을 해오셨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와 《인민들속에서》라는 책을 출판하고있는데 그 책을 보면 많은것을 알게 될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접견석상들에 참가하였던 허담은 그들이 요구하는 《인민들속에서》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번역출판하는 전투를 조직하고 외무성에서 외국어에 능한 전문가들을 어종별로 골라서 출판사에 파견하였는데 여러 나라 말을 소유하고있는 차성준이 중추적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출판사의 번역원들과 외무성에서 동원된 전문가들로 외국문출판사는 요즘 전례없는 전투를 벌리고있었다. 한편 허담은 우리 나라를 방문한 외국대표단의 지방참관을 동행하느라고 떠났다.

허담이 떠난지 이틀째되는 이 아침 온밤을 새고 깜빡 잠들었던 차성준은 전화종소리에 쪽잠에서 깨여났다.

명부국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과장동무요? 외무성에서 동원된 성원들을 다 데리고 들어와야겠소.》

차성준은 긴급과제가 떨어진줄 알고 긴장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외무성은 쓸데없이 출판사일에 삐치지 말고 자기 일이나 잘하라는 지시요.》

《쓸데없이 삐치다니요?》

《국제부의 지시요. 부장동지가 직접 나와계시오.》

《알았습니다. 내 곧 가겠습니다.》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차성준은 영문을 몰라 쳐다보는 번역성원들에게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내 들어갔다 나오겠는데 번역전투를 중단없이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차성준은 외무성에 나온 박용국을 만났다. 박용국은 감색쏘파에 몸을 깊숙이 잠그고 탁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차성준에게 내밀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출판사에 나가 회상기들을 번역하느라고 수고가 많았겠구만. 이번 일은 허담부상의 착상인가?》

《그렇습니다. 수령님의 교시를 받고서…》

박용국은 손을 내저었다.

《아, 됐소. 수령님께서 외무성에서 하라고 하시지야 않았지. 할일이 많은 외무성이 언제 출판사일에 삐칠새가 있나? 그만했으면 됐소. 돌아와서 자기 일들이나 하오.》

《현재 우리 나라에 와있는 대표단들이 돌아갈 때 보내줄것과 아프리카나라들에서 요청하는 회상기들을 다 보장하자면 번역력량과 시간이 딸립니다. 이미전부터 계획적으로 했어야 하는것인데…》

《그만하오.》

만만하게 보고 접어들었던 차성준의 입에서 당돌한 반박이 따라서자 박용국의 눈가에 순간적인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봉선화》나 부르던 주제에 누구를 믿고 감히?…

워낙 허담이 수령님께 보고드려 차성준을 자기 직무로 다시 회복시켰을 때부터 박용국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자기앞에서 당돌하게 맞서고있지 않는가.

박용국은 속이 불끈거렸지만 애써 자제하며 앞차대에 널려있는 문서들을 간종그리였다.

《당지도부의 지시도 안중에 없구만. 암만 봐도 동무는 안되겠소. 가보오.》

그쯤 으름장을 놓으면 굽어들줄 알았는데 차성준은 조용히 돌아서 나가버렸다.

박용국은 몸둘바를 몰라하는 명부국장을 찌글써하게 건너다보며 한마디 했다.

《외무성이 지금 누구 판이 돼가고있나? 주의하는게 좋겠소. 박금철비서동지한테 보고할수 있게 자료를 묶소. 특히 허담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묶으란 말이요.》

떠나는 승용차에 오르던 빅용국은 허리를 굽석거리며 바래주는 명부국장에게 물었다.

《명동무가 부국장사업을 한지 몇년 됐더라?》

《3년 6개월입니다.》

《한자리에 4년씩이나 앉아있었는가? 국제부에도 명동무와 같이 쟁쟁한 일군이 있어야겠는데…

좌우간 알겠소.》

발동이 걸린 차안에서 창유리를 내리운 박용국은 명부국장에게 원칙적인 몸가짐을 하라고 몇마디 훈시를 주었다.

이틀후 외국대표단의 지방참관을 동행하고 돌아온 허담이 외국문출판사에 나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였다. 거기에다 차성준의 이야기는 허담을 더욱 아연하게 했다.

수령님께서 발표하신 농촌테제번역출판도 같이 내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왜, 그것도 시비합데?》

《출판사창고에 지난 2년간 7개 어종으로 번역출판한것이 5만부나 쌓여있습니다.》

《뭐라구? 정말이요?》

《창고에 가면 볼수 있을것입니다. 매번 국제부에서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기다리라고 해서 대외보급을 못하고있답니다.》

치솟는 의분을 안고 성에 돌아온 허담은 명부국장을 불렀다.

《그래서?》

《사실 전 우에서 승인없이 출판사에 외사전문가들을 동원시킨 문제가 사건화됐다고 하면서 당장 철수시키라고 하기에…》

《그래서 눈뜬 소경처럼 맹종맹동했는가?!》

명부국장은 밑둥 잘린 나무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볼편이 파들파들 떨고있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용서? 다른 잘못엔 백천번 용서가 따를수 있소. 그러나 여기엔 동정두 타협두 관용두 있을수 없소! 가서 자신을 심각히 검토하오. 과연 자신을 용서할수 있겠는가를.》

명부국장이 허청걸음으로 방을 나간 후 허담은 격한 심정을 누를길 없어 해당 선전부서에 전화를 걸어 농촌테제의 외국문번역판들을 지체없이 대외보급망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그런데 한참후에 박용국이 전화를 걸어왔다.

《부상동무, 왜 그리 생각이 짧소? 큰 나라들에서도 내놓지 못한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서 자랑하면 그들이 좋아할것같소?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보류하오.》

허담은 격해서 맞받아 소리쳤다.

《세상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뭐가 이르단 말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사업은 미룰수 없소, 절대로!》

격해서 소리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허담은 용암처럼 부글거리는 분을 삭일길 없어 오락가락하다가 책상앞에 와서 멈춰섰다. 평시엔 과묵하여 잠자는 대양과도 같은 그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진 생활의 철칙이 있었다. 그것은 처자에게도 쉽게 터치지 않는 기쁨과 괴로움을 김정일동지에게만은 숨김없이 다 아뢰이는것이였다.

허담은 옷매무시를 바로한 후 송수화기를 두손으로 정히 들었다.

《일체 사업을 전페하고 긴급히 만나뵈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화기에서 그이의 심중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허담의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것을 느끼시였던것이다.

《지금 어디서 전화를 합니까?》

《사무실에서 합니다.》

《알았습니다. 곧 가겠으니 청사앞길에 나와있으시오.》

1967년 새해의 진군길에 오른 평양의 밤하늘에선 함박눈이 쉬임없이 내려쌓이고있었다. 흰옷으로 단장한 평양시가로 두줄기 승용차불빛이 빛나고있었다. 승용차는 천리마동상을 지나 창전거리로 달렸다.

허담은 차를 운전하시는 김정일동지의 침묵에 여느때없이 긴장되여있었다. 승용차는 보통문을 옆에 끼고 달리다가 모란봉경기장(당시)앞의 대도로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허담의 시야에 다시 시창앞으로 다가오는 천리마동상이 비껴들었다. 방금 지난 길로 다시 되돌아 차를 운전하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허담은 그이의 마음속 격노를 페부로 실감하고있었다. 승용차는 다시 보통문을 에돌았다.

허담은 자신이 그이께 너무도 큰 아픔을 드리지 않았는가 하여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그이께 꼭 알려드려야겠기에 깊은 밤이지만 외무성에서 발생한 사태를 보고드렸던것이다.

다치면 터질듯 팽팽한 공기가 흐르는 승용차안은 납덩이같은 침묵속에 잠겨버렸다. 한 로정을 세바퀴나 반복하여 달리신 그이께서는 마침내 모란봉기슭에서 승용차를 급정거하시였다.

차에서 내리신 김정일동지께서는 흰주단을 펼친듯한 모란봉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을밀대며 칠성문의 고색짙은 지붕도 흰옷으로 단장했고 전나무, 소나무의 가지들도 수북이 쌓인 흰눈으로 눈부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 가장 즐기시는 계절은 겨울이였다. 겨울의 설경은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선률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밤의 설경은 자신의 괴로우신 마음을 더 무겁게만 하고있었다. 눈송이가 아니라 철덩어리들이 가슴속에 쌓이는것만 같으시였다.

쏴- 모란봉의 눈덮인 숲도 그이의 분노를 받아안고 드세게 설레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격노가 몰아온 숨가쁨에 흰눈이 수북이 쌓인 너럭바위우에 올라서시여 평양시가를 부감하시였다.

《령토가 크다고 하여 위대한 나라로 되는가, 당원이 많다고 하여 위대한 당으로 되는가, 인구가 많다고 하여 위대한 인민이 되는가. 아닙니다, 수령이 위대하면 나라도 위대하고 당도 위대하며 인민도 위대한것입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인도네시아에 가셨던 그 나날들을 깊은 감회속에 추억하시였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목격하였지만 수카르노를 보시오. 그는 세계적으로도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의 주의주장이 센 지도자로 공인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새로 육종한 아름답고 진귀한 꽃에 수령님의 존함을 모셔 김일성화로 이름지어 수령님께 올리면서 뭐라고 했댔습니까.

김일성수상님의 권위에 비하면 조선의 땅덩어리가 작은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김일성수상님은 세계를 움직이시니 세계를 가지고있는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눈을 한웅큼 손에 쥐신 그이께서는 낮으나 격하신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슬기롭고 용맹한 인민이였습니다. 그런 우리 인민이 일제의 식민지노예로 자기 말과 이름까지 빼앗긴것은 위대한 그 힘을 향도할수 있는 수령을 모시지 못했기때문이였습니다. 인민의 힘은 무궁했으나 뭉치지 못했고 뭉칠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의 슬기와 힘을 모으신분, 인민의 의지를 한몸에 체현하시고 혁명의 유일중심으로 되신분은 우리 수령님이시였습니다. 하기에 수령님의 혁명활동초기에 벌써 새세대 혁명가들은 수령님을 구심점으로 굳게 뭉치였고 한별의 노래를 부르며 유일중심의 전통을 마련하였습니다.

유일중심!

나의 심장속에 이 말이 신념으로 자리잡힌것은 소년시절부터였습니다. 난 한생을 유일중심을 신념으로 간직하고 유일항로로 달릴것입니다. 천만산악이 앞을 막는다 해도 무자비하게 짓부시며!》

김정일동지로부터 《유일항로》에 이어 《유일중심》이란 말씀을 다시 받아안는 허담의 심장은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하늘의 구름바다처럼 설레였다.

눈내리는 모란봉의 숫눈길우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새기시며 최승대쪽으로 오르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혼자말씀처럼 나직이 뇌이시였다.

《이해의 눈은 왜 그런지 참 무겁구만.》

겨울을 그리도 즐기시며 설경에 대한 애착이 그 누구보다 류다르신 김정일동지. 그러나 이밤에 그이의 마음속에 내리여 쌓이는 눈은 왜 이다지도 무거운가. 준엄하고 엄혹한 또 한해의 시련이 그이앞에 쌓여가고있기때문은 아닌지.

허담은 사색의 심연을 헤치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눈내리는 겨울이 아닌 태동하는 새봄의 훈향을 가슴뜨겁게 받아안았다.

허담의 마음속에서는 용암의 분출과도 같은 열정의 웨침이 터져올랐다.

 

내 보았노라 위대한 인간을

내 반했노라 위인의 모습에

내 따르리라 운명의 태양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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