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 회)
제 4 장
11
이른아침 쑤다에브는 낚시대를 들고 바다가에 나갔다.
그동안 보천보와 백두산답사를 마치고 삼복리에 가서 차성희까지 만나보고 온 쑤다에브는 력사적인 당대표자회에서 하신
그는 낮이나 밤이나 방에서
두달전 우리 당보에 실린 론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를 읽으며 자기나라 혁명이 걸어온 길과 조선혁명이 걸어온 길을 대비하여 분석해보면서
혁명위업에서 주체에 대하여 뼈저리게 절감한 그였다.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지금 낚시대는 드리웠어도 머리속에는 몰로또브의 말이 맴돌고있었다.
《문제는 령도의 대가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나의 두눈도 함께 가지고가서 잘 보고 오기를 바랍니다.》
두달이 넘게 있은 조선체류일정이 끝나가고있는 지금 그는 림춘추에게 어떻게 말하면
보천보에서 만난 로인이 10년전 10대의 학생으로서
흰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다가의 바위우에 올라앉은 쑤다에브는 저 멀리 수평선을 이름할길 없는 착잡한 심정에 싸여 응시했다. 갈매기들이 나래를 퍼덕이며 원을 지어 날아예는 모습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한폭의 명화를 방불케 했다.
문득 쑤다에브는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해안가에서도 흔히 보아왔던 갈매기들인데 왜 조선에서의 감정은 류다른것일가 하고 스스로 자문하였다. 자연이 인류에게 선사한 4계절의 천변만화―그것에 대한 인간의 감수는 제도에 따라 각이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부지중 뇌리를 쳤다. 사회주의붉은기가 변색을 모르고 휘날리던 그 나날 자기 나라의 장미계곡은 절경의 극치와도 같이 아름답고 소중하였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 절경에 대한 애착은 해빛을 잃은 그림자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다. 드넓은 그 대지에 슴배인 붉은피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희석되여가고있기때문이였다.
혁명에 피를 바친 사람만이 그 피의 귀중함을 안다. 피를 흘려보지 못한 후대들에게서 그 피의 소중함은 시간의 흐름속에 사라질 망각이 아닌가. 이것은 인류력사의 부인할수 없는 법칙이라고 쑤다에브는 괴롭게 자인했었다. 하다면 어찌하여 이 나라에서는 인류력사의 법칙이 산산이 부서지고있는것이냐.
끝없이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져 너럭바위에 조각처럼 굳어져있는데 수수한 검은색 닫긴깃양복차림의
《낚시에 취미가 있는듯싶은데 한번 해보시오.》
《아, 내가 조선말을 하는게 놀라운게구만. 내 동양사람들과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 역시 손바닥과 손등처럼 다르지만 젊은이와 다를바없는 조선사람 쑤다에브요.》
그 말을 잠시 음미해보시던
《그렇습니까? 그러니 선생님은…》
쑤다에브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선생은 무슨 선생이겠소. 그저 덧없이 나이만 먹었을뿐이요.》
《나는 선생님의 그 백발과 가슴에 빛나는 적기훈장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순간 쑤다에브는 오랜만에 잔주름이 서린 입가녁으로 웃음을 떠올렸다.
《아, 이 적기훈장을 알아보는구만! 허나 조선빨찌산투사들처럼 그렇게 존경할만한 공은 못세웠소. 좌우간 반갑소, 친구!》
쑤다에브는 이렇게 말하다가 금시 정색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 이거 내 실수한것같다?…》
《왜 말입니까?》
《실례했소, 친구라고 불러서. …》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난 선생님을 선배로, 동지로 부르고싶은데요.》
《인간이 세상에 태여나 후대들의 추억속에 산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참되게 산 인생은 국적을 막론하고 후대들의 존경을 받지요.》
쑤다에브는 온넋과 육신을 깡그리 빨아들이는 거대한 자기마당속에 들어선것같은 격정에 자기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바위에서 일어나
《나는 자기 조국을 위해 히틀러도당과 피흘려싸운 사람이요, 헌데 그 피가… 거 뭐랄가? 점점 물이 된다고 할가? 내가 사는 나라에선…
그런데 조선에선
뜻밖에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그건 좀 섭섭하구만. 이 나라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도 다 들었는데… 난 그분한테 매혹되였소.》
그리고는 큰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어보겠소? 저기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인 조선항일투사의 별장인데 그 로혁명가도
《하하하… 저기는 별장이 아니라 우리 인민들이 항일투사들을 존경하여 마련해드린 료양소입니다. 요즘 림춘추동지가 글을 쓰러 와계시는건 사실입니다.》
《선생님은 방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선생님들의 세대가 흘린 피에 대하여 이야기하셨는데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고귀한 희생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희생으로 선생님세대의 임무는 끝난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간악한 원쑤들로부터 조국을 지킨 희생도 귀중하지만 그 피의 력사를 후대들의 심장에 새겨주고 그들이 선렬들의 피자욱을 지키도록 하는것은 히틀러도당과의 격전보다 더 어렵고 준엄한 투쟁입니다.》
바다기슭으로는 잔파도들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하지만 쑤다에브의 심장속에선 잔파도가 아닌 세찬 격랑이 솟구치고있었다.
《지금 수정주의자들은 선대
쑤다에브의 심장이 쩡―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젊은인 뉘시오?》
《저야 선생님의 친구가 아닙니까? 그저 혁명선배들을
쑤다에브는 높뛰는 심장의 박동을 가까스로 눅잦히며
(참 마음이 끌리는 젊은이로군, 순결하고 청신한.)
머리속에서 몰로또브의 말이 또다시 울렸다.
《우리 나이, 우리 처지에서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자기가 걸어온 길과 해놓은 일들이 후대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미래.
당신은 그것을 찾아 머나먼 동방행을 하려고 합니다. 옳습니까?》
(그래, 확실히 조선에는 그 미래가 있어, 그 미래가―)
점도록 낚시대를 드리우고앉아 시색에 잠겼다가 림춘추의 방으로 들어가니 림춘추가 기다리고있었던듯 반갑게 맞이했다.
《쑤다에브선생, 조선속담이 그른데 없지요? 요즘 새벽에 일찌기 일어나서 첫문을 열군 하니 큰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쑤다에브는 얼떠름해서 희색이 어린 림춘추를 마주보았다.
《무슨 복 말입니까?》
림춘추는 의아해졌다.
《방금 우리의 영명하신
《뭐라구요? 그분이
쑤다에브는 한동안 굳어졌다가 졸지에 오금을 꺾고 재빛쏘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림춘추는
쑤다에브는 눈귀로 슴배여올라오는 눈물을 훔치며 양복안주머니에서 종이장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압니까? 우리 아들녀석이 미국무성과 짝짝꿍하여 나에게 보낸 담보서입니다. 이 쑤다에브가 망명하면 미국시민권을 주겠다는… 나는 이 담보서를 받고 네거리에 서있다가 조선으로 왔습니다.》
쑤다에브는 미국무성이 보낸 담보서를 구겨서 재털이에 놓더니 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달았다. 담보서가 불길에 타더니 재가 되였다.
《림선생 아니, 림동지, 고맙습니다.
내 평생토록 조선을 잊지 않겠습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싱그러운 바다바람이 쑤다에브의 백발을 날리며 불어왔다. 쑤다에브는 격정에 넘쳐 자기의 진심을 토로했다.
《난 조선에 와서 사회주의위업의 영원성을 확신했습니다. 그
조선동지들이 부럽습니다. 당신들은
다음날 쑤다에브는 귀국의 길에 올랐다. 비행장에서 그는 림춘추의 손을 꼭 잡았다.
《사회주의조선은 내 마음속의 조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