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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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 한달간에 걸치는 중국동북지방출장길에서 돌아온 김태호는 요즘 피가 마르듯이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아동단원 금순이의 남동생을 찾으려고 중국동북지방과 쏘련의 원동지구, 총련에까지 의뢰하여 알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었다.
해당 기관을 통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한데 의하면 연길현 왕우구출신의 고아로서 나이가 30대인 남자는 기록영화촬영소 음악편성원 유상룡 한사람뿐이였다. 유상룡을 찾아가 만났을 때 그는 자기를 키워준 중국인 어머니한테서 왕우구에서 산다는 로인이 두살난 애기를 맡기고갔는데 그때 그 로인은 심한 부상을 입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김태호는 유상룡이 그리도 찾고찾던 금순이의 동생일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조사를 심화시키려던중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 문제가 제기되였다.
김태호는 맥이 풀리고말았다. 아동단원 금순이의 아버지가 왜놈들의 《토벌》때 희생되였다는 사실과 맞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엿장사가 변절자였든 아니였든간에 어쨌든 유상룡이 금순이의 동생은 아니다.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볼 목적으로 연길일대에 대한 출장길에 직접 나섰댔는데 1959년 답사시에 금순이 어머니가 어린 애기를 누구에게인가 맡기고 유격구사수전에 나갔었다고 자기에게 말해주었고 몇달전에 파견하였던 문동무에게도 그렇게 말했다는 로인은 그동안 사망하고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번 출장길에서 알아낸것이란 금순이의 아버지이름이 김택규이며 왕우구에서 구당서기를 했다는것뿐이였다. 《토벌》때 희생되였다고 하는데 희생경위도 부상당하여 적들에게 체포되여 학살당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투를 벌리다가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토벌》당시 희생된것은 사실이였다.
촌장인 금순이 어머니와 구당서기인 금순이 아버지는 다 산속으로 피신하는 대렬이 아니라 연길현인민혁명정부와 군중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남아서 적들을 견지하는 유격대원들속에 있었는데 그 대오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것이였다. 악에 바친 왜놈들은 부상당하여 쓰러진 사람들까지도 모두 찔러죽이고 시신들을 불태워버렸으므로 적들이 물러간 다음에 참혹하게 불탄 시신들을 합장할 때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유상룡의 아버지가 정말 변절자였는가를 해명하는 일도 난관에 부닥쳤다.
김태호가 유명혁을 찾아가 만나니 유명혁도 그동안 왕우구 엿장사를 두고 여러 갈래로 선을 놓아 알아본바에 의하면 변절자로 처형된것이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오직 당의 품에서 자란 상룡이가 그 죄를 두고 고통받게 할수는 없지 않소. 과장동무, 이 일은 그것으로 덮어두면 안될가? 난 상룡이를 내 아들로 삼았으면 하오. 그러면 이제라도…》
유명혁은 울컥 눈물이 솟아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태호는 단념하지 않고 무장투쟁초시기 동만에서 지하공작을 지도한 림춘추를 찾아갔으나 그런 사람을 모른다는 대답밖에 받지 못하였다.
사무실의자에 앉은채로 쪽잠을 자며 며칠동안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던 그는
하다면 끝내 없다는 보고를 올려야 하는가?
김태호는 마음속으로 《있다》와 《없다》를 두고 수십번도 더 자문자답했다.
종시 그는 만년필을 들었다. 그렇게 보고를 올리고난 다음부터
김태호는 갈증에 시달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그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어쩌다 전화종소리가 울리면 황급히 송수화기를
들군하였다. 그러나
낮이나 밤이나
송수화기를 들면 다정하면서도 열정이 확확 뿜겨오는 음성이 가슴에 젖줄기마냥 흘러들군 했었다. 그 정깊은 음성을 듣지 못한지 한주일이 넘자 김태호는 번민에 뜬눈으로 밤을 새고 동트는 새벽을 맞이했다. 엄습해오는 그 외로움과 고독감은 죽기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곤혹이였다.
그렇게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을 때 김일이 찾는다는 련락이 왔다. 당력사연구소사업과 관련하여서는 웬만해서 찾은 일이 없는 김일이
급작스레 찾는것으로 보아 분명
그는 김일에게라도 자기의 마음속고충을 터놓을수 있게 된것이 은연중 다행스러웠다. 김일은
그런데 웬걸, 김일은 방으로 들어서며 인사하는 김태호를 한번 흘깃 쳐다보았을뿐 뚝해서 무슨 문건을 책상우에 내놓았다. 그것은 금순이의
혈육문제와 관련하여
김태호의 량볼이 경련을 일으키듯 가늘게 떨렸다. 그는 모두숨을 톺으며 침착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그동안 료해한 사람들중에 당시의 왕우구 애기는 더는 없습니다. 그래서
김일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손에 쥔 담배대만 매만지고있었다.
《1부수상동지,
김일은 여전히 끄떡않고 앉아있었다.
납덩이같은 침묵은 김태호에게 용광로의 화실앞에 선듯 비지땀을 뽑게 했다. 호된 욕설이라도 터치면 숨막힐듯한 가슴이 도리여 활짝 열릴것만 같았다.
이윽고 김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창문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김태호의 눈길은 김일의 푸릿한 검버섯이 돋은 관자노리가 알릴듯말듯 푸들푸들 떠는것을 보았다.
김일은 동통이 오는지 솥뚜껑같은 두손으로 허리를 꽉 누르며 가쁜숨을 톺더니 추억에 젖은 음성으로 뇌였다.
《빨찌산때
그것은 김태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현성습격전투때 성문을 여는 돌격조에 나섰던 그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벼락같이 습격소탕하고 번개같이 빠져나가야 하는 기습전이였다.
부대가 단숨에 백리길을 강행군하여 철수를 완료한 다음 후위대까지 도착하였을 때
한 전사의 시신을 찾아 정히 안장해주기 위해 적들이 이미 까마귀떼처럼 덮인 그곳으로 되돌아가 벌린 그 격전…
《한 전사를 위해 떠나온 전장의 불비속으로 다시 뛰여드신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며칠전 금순이가 반일부대에 가서 연예공연을 하던 일들을 문의하시길래 당력사연구소에서 동생을 찾고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나에게 이 편지를 보내주시며 말씀하시였소.
김태호가 중국동북지방에까지 다시 찾아가며 애를 쓰더니 아마도 이젠 지친것같은데 금순이의 혈육을 찾는것은 단순히 한가정사가 아니라 혁명의
혈통과 넋을 잇는 중대사라고, 그래서 이제는
《?!…》
《걱정스럽소,
그분곁에
벼락치듯 하는 욕설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와하는 로투사의 말에서 김태호는
김태호는 내각청사의 계단을 허탈에 빠져 터벅터벅 내렸다. 피기없이 백랍처럼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내배여있었고 터갈라진 입새로 신음과도 같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그는 인생의 첫 대문을 열고 나섰던 어린시절을 추억했다. 하루의 생존을 위해 마소와도 같은 고역을 치르어야 했던 막바지인생, 고역에 고역이 겹쌓여 장딴지와 허벅다리가 남의 살처럼 느껴지고 살기가 죽기보다 힘들었던 시절. 그때의 자기는 사람이 아니였다. 짐승보다도 못한 인생이였다. 그렇다고 어디에 하소할 곳도 없었다. 천대와 멸시를 타고난 팔자로,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식민지노예가 바로 자기였다.
고요에 잠긴 수도의 거리로 김태호는 향방없는 걸음을 옮겼다.
《과장동무.》
너무도 귀에 익은 그 음성에 김태호는 그자리에 굳어졌다.
(
앞에는 당중앙위원회청사가 먼발치로 보였다. 하다면?…
《태호동무!》
재차 부르시는 소리에 그제야 김태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 사이엔지 자기옆에
멍해있던 그는
순간 울컥 울음이 북받쳤다.
《
《타시오.》
안개흐르는 만수대언덕은 깊은 고요에 잠겼다. 방긋이 열린 구름문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새여나오는것으로 보아 두시간은 실히 지나야 동이 틀것이다.
림춘추를 만나고 오신
그런데 집집의 창문들엔 벌써 불이 꺼지고 안식의 정적이 깃들었다.
온밤을 유상룡의 아빠트뒤마당에서 보내신
지금껏 어데 가서 실컷 울지도 못했을 고아, 혈혈단신의 슬픔과 괴로움의 응어리를 안고 모대겨온 인생의 전반생. 하기에
《허, 난 얘길 하자고 찾았는데 계속 울기만 하니 어쩐다?… 이거 나두 같이 울어야겠구만?》
《내가 왜 동무를 찾아온것 같습니까?》
《저, 아버지문제때문에…》
《허, 난 해솟는 아침인데 동문 해지는 저녁이구만.》
《내가 동무를 만나러 온건 아버지때문이 아니요. 하지만 말이 났으니 얘기합시다. 동무야 두살때부터 동냥젖으로 살아오지 않았소. 그러니 아버지얼굴도 몰라, 그 무슨 덕도 입은것이 없는데 설사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동무가 책임진다는게 말이 되는가.》
《난 동무의 문건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소. 전쟁으로 온 나라가 재더미가 된 속에서도
자, 이젠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내 동무의 자서전을 보니 어려서부터 음악에 취미가 있었다는데 중국인 녀인네 집에서 살 때 누가 음악을 배워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풀피리를 불군했습니다.》
《풀피리?》
《예,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풀피리를 부는 저를 보고 늘 〈챠우다〉라고 불렀습니다. 중국말로 풀피리라는 소리인데 머슴살이를 할 때 지주놈은 밤에도 제가 양우리곁에서 풀피리를 불면 이게 풍각쟁이씨종자가 아닌가고 욕설하며 매를 안기군 했습니다.》
《음, 그랬구만. 내 욕심같아서는 동무와 오늘 우리 나라 노래랑 세계명곡들을 들으며 음악담도 나누고싶은데 건설장에서 수고한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그새 마음고생이 오죽했겠소? 그러니 오늘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쉬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촬영소에 나가 음악편성사업을 계속하시오. 그동안 촬영소동무들이 기록영화 〈평양〉을 다시 구성했소.
전번에 영화를 보면서 마감장면에 동무가 넣은 항일아동단가요 〈어데까지 왔니〉가 아주 좋았는데 동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였다지? 알아보니 항일혁명가요발굴에 적지 않게 기여했더구만. 그 노래들을 어디서 다 배웠소?》
유상룡은 머뭇거리다가 말씀드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풀피리를 불다나니 딱히 누구한테서 배웠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사실 〈어데까지 왔니〉도 저는 그 노래의 가사를 조국에 나와서야 알았고 또 항일혁명가요라는것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항일혁명가요들을 발굴하는 사업이 진행될 때 제가 어려서부터 풀피리로 불던 곡들중에 항일혁명가요들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섰던것입니다. 그것으로 평가를 받군 했지만 실지 제가 기여한것이라고는 별로 없습니다.》
《혹시 동무가 아주 어릴 때 말이요, 친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을 때라든가 아니면 누나의 등에 업혀있을 때 불러주군 한것이 풀피리와 함께 기억을 깨치며 살아난것은 아닐가?》
《글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친혈육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저를 키워준 중국인 어머니도 저의 친혈육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림종을 앞두고 엉엉 우는 저의 손을 꼭 쥐고 네 아버지가 살아있다, 왕우구에서 엿장사를 하면서 두해전에 돈을 보내왔으니 기다리느라면 찾아올것이다, 죽지 말고 꼭 살아서 아버지를 만나라 하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상룡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야기를 들으시는
따스한 손으로 자기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가슴이 그대로 녹아내리는듯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유상룡을 꼭 그러안으시고 등을 쓸어주시던
《그래, 찾자구, 동무의 친혈육을. 내 꼭 찾아주지, 찾아주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