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5
(1)
윤선각은 어제밤에 관기들을 불러내서 가무를 벌려놓고 술놀이에 파묻혀있다가 자정이 넘어서 잠든것이 해가 한발이나 올라온 뒤에야 깨여났다.
《아이참, 지금은 중낮이 다 되였는데 인제야 일어나시니 사또님은 분별이 없으셔요. 호호호.》
지난밤에 잠자리를 함께 한 애란이라는 기생이 차다반을 들고 들어오며 눈을 곱게 흘기였다.
바로 이때 선화당섬돌아래서 《아뢰오. 옥천관가에서 긴급장계가 올라왔소이다.》 하는 통인의 웨침이 쨋쨋이 들려왔다.
《어서 정사를 보셔요.》
애란이는 방긋이 웃어보이며 살며시 자리를 피하였다.
애란이가 나가자 윤선각은 제꺽 낯빛을 근엄히 고치고서 선화당 안방미닫이를 주르르 열어제끼였다. 선화당섬돌아래 하회를 기다리고있던 통인이 황공스럽게 절을 꾸벅하였다.
《무엇이라구?》
위엄이 뚝뚝 떨어지는 감사의 물음에 통인은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옥천관가의 긴급장계오이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긴급장계라드냐?》
《소인은 잘 모르오이다.》
윤선각은 옥천의 장계라면 조헌이 또 상소를 올린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 장계라는것이 어디에 있느냐?》
《예, 여기에 있사옵니다.》
통인이 장계문이 들어있는 굵은 참대통을 두손으로 받들어올렸다.
윤선각이 장계문을 펼쳐드는데 어느 사이 왔는지 비장 하교남이 윤선각의 어깨너머로 목을 왁새목처럼 길게 빼들고 넘겨다보았다.
장계문에는 며칠전에 조헌을 모살하려던 왜놈자객놈을 붙잡은 사실과 그놈이 자백한 공술내용이 적혀있었다. 자객놈이 자필한 자백서도 첨부하였다. 장계문과 자백서를 받아본 윤선각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였다. 그는 당황하여 이럴지 저럴지 몰라하였다. 하교남이도 낯색이 흙빛으로 되였다.
왜놈들이 벌써 조선에 덤벼들 차비를 다해놓고 각 도에 보낼 왜장들을 임명해놓았다고? 충청도를 분담맡은 왜장이 충청도의 민심을 돌려놓으려고 간자들을 들여보냈다고? 굶주린 백성들이 성쌓기에 시달려서 원성이 높은 이때 교활한 왜놈들에게 쉽게 넘어갈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이 시각 그의 가슴을 찌르는것은 여지껏 조헌이 임금께 올린 상소와 또 자기에게 제기하여온 모든것이 어느것 하나 그른것없이 맞아떨어지는것이였다. 민심은 하늘이 준 기회보다 낫고 지형지물보다 낫다는 말을 부디 잊지 말라고 한것이 옛 고사가 아니라 현실로 눈앞에 다가선것이다.
윤선각이 더욱 수치스럽게 생각되는것은 왜놈들이 충청도의 주인인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런 벼슬도 없는 조헌을 두려워하는것이다. 그를 모살하려고 한 그자체가 이를 말해주는것이다. 그런즉 자기는 있으나마나한 허수아비로 여기는것이다.
이 장계를 임금께 그대로 올리면 자기의 무능이 야밤에 불을 보듯이 환하게 드러나고 임금은 자기를 왜적앞에 세워놓은 진짜 허수아비처럼 여길것이다.
이 장계문이 가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짜가 아니라도 가짜로 만들수는 없겠는가.
윤선각의 속심을 재빨리 눈치챈 비장 하교남이 한마디 하였다.
《옥천고을원이라는게 자객놈의 공술서를 이따위로 받아냈으니 한심하오이다. 왜놈자객이 물에 빠져 제스스로 죽었는지 아니면 그놈을 압송해오던 고을군사들이 죽여버렸는지 알수 없소이다. 옥천원과 고을군사들을 불러다가 따져보면 어떨는지…》에 하고 윤선각을 꼬드기였다.
이리하여 옥천원 구만석이 자객놈을 압송해갔던 군사 다섯을 데리고 감영에 올라왔다.
윤선각은 구만석을 첫마디부터 추상같이 꾸짖었다.
《공은 왜놈자객이란자를 어떻게 압송하라고 했기에 그자가 강물에 뛰여들어 죽었다고 하느냐?》
《죄송하오이다. 자객놈이 감쪽같이 기회를 타서 강물에 뛰여들줄을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소이까?》
《그놈이 살려주기를 바라서 이실직고하였겠는데 제스스로 죽었다니 말이 되지 않소. 그놈을 압송하던 군사들이 죽이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알수 없소.》
《아니올시다. 그들이 하등에 그놈을 죽일 리유가 없소이다. 그러나 혹시 해서 그들을 형틀에 올리고 형장을 쳤는데 뼈가 꺾어져도 그놈이 제스스로 죽었다고 하오이다.》
《믿을수 없다, 그놈이 썼다는 공술서인지 자백서인지도 믿을바가 못된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 8도에 쳐들어올 적장들을 다 임명해놓았다고? 우리 나라 각 도의 장수들을 미리 모살할 자객들을 들여보냈다고? 조선백성들의 민심을 돌려낼 간자들을 들여보냈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가짜공술을 받아내서 좋을것이 무엇인가? 이거야말로 민심을 소란시키고 임금을 걱정시키는 일이 아니냐.》
윤선각은 이렇게 사태를 꺼꾸로 뒤집어내치며 고아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놓을수 없는 사실이였다.
《가짜공술이 아니오이다. 소관이 직접 병방아전들과 군사들과 함께 받아낸 공술인데 틀림이 없사오이다. 또 그놈이 지니고있던 비수와 비상은 사람을 해치기 위한 증거가 아니옵니까?》
구만석은 은근히 반발심이 솟아올라 언짢게 대답하였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자객이란놈을 산채로 잡아와야 할것이 아니냐? 여봐라, 자객을 압송하였던 군사들을 당장 형틀에 올려라.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비장 하교남이 기다렸듯이 윤선각의 말을 받아내려서 감영의 형리들이 옥천군사 다섯을 형틀에 올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