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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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호수와도 같이 끝없는 고요를 불러오는 밤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던 잊을수 없는 사연들에 회억의 나래를 펴주는듯싶었다.
리석은 한적한 밤이면 삼복리의 영덕산등성이에 있는 아버지묘소를 눈앞에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군 하였다. 밤하늘에서는 별무리들을 포근히 감싸며 은하수가 흐르고있었다.
리석은 창작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아버지의 묘지에도 이밤 별빛이 빛나리라고 생각하였다. 리석의 가슴은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것이
정의이고 진리인가를 식별하지 못하고 직권에 눌리워 우왕좌왕한
인기척소리에 리석은 괴로운 심경에서 깨여났다.
주대성이 파란색보꾸레미를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건 우리 현희가 뜬 내의인데 맞겠는지 모르겠구만.》
주대성이 보자기에서 내의를 꺼내여 리석이앞에 내밀었다. 리석은 눈이 부시도록 흰 그 내의를 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골몰했다. 언뜻 눈앞에 부드럽고 섬약한 처녀의 손이 뜨개바늘을 기계처럼 놀리는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이어 애정의 열이 전류처럼 리석의 심장에 흘러들며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대성동무, 내가 정말 가련한 인간이지?》
《됐소, 다 지나간 일인데.》
《
리석은 서랍을 뒤지더니 그속에서 소묘한 녀자의 조각상이 그려진 종이장들을 꺼내여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그속에는 한장의 사진도 있었다. 덩실한 기와집이였다. 통 영문을 알길 없어 소묘지며 사진을 보던 주대성이가 돌아섰다.
《이건 무슨 집이요? 또 이 소묘한 녀자의 조각은?》
리석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집은…》
소묘한 종이장들과 사진을 와락 거머쥐고 밖으로 나온 리석은 거기에 성냥을 그어 불을 달았다.
어둠속에서 리석은 그 불길을 보며 생각했다.
대기념비건설장의 어둠을 밀어내며 타오르던 우등불들!
저 우등불은 보천보에 솟구치던 그 불길을 잇는 1960년대의 신념의 불길이다. 바로 저 불길에
이 불길을 보며 리석은 가식없는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을 터치였다.
《대성이, 성의는 고맙지만 난 현희동무가 뜬 그 내의를 받지 못하겠네. 나에겐 그 정을 받을 명분이 없네.》
한동안 자기 생각에 골똘하던 주대성이 혼자소리하듯 흔연히 뇌였다.
《사랑이란 생나무꺾듯 할수야 없지. 하지만 우리 현희가 그 내의를 뜰 때 무엇을 보았을가. 어제날과 전혀 다른 리석의 모습을 본게 아닐가?》
리석은 심리의 미묘한 세계도 샅샅이 훑어보는듯한 끈질긴 눈길로 주대성을 일별했다. 그 눈빛엔 많은 물음이 실려있었다.
《난 믿었네. 또 확신했어. 항일혁명렬사 리철동지의 모습을 그리며 뜨개바늘로 한오리한오리 참된 사랑을 엮었다구.》
《?!》
《동무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주신분, 바로
리석의 눈굽은 불시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관자노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가늘게 떨렸다.
《자넨 믿나, 내가 한생을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리라고?》
《나보다도 우리 현희가 더 믿고있지.》
《현희가?》
《그래. 자네가 그걸 증명하고있지 않나, 이 불길로!》
두사람은 약속이라도 하듯 침묵속에 손을 굳게 잡았다.
두 인간의 순결한 신념, 뜨거운 정을 이어주는 순간이였다.
리석은 이름할길 없는 감개에 젖어 백두의 하늘가 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진주보석처럼 빛나는 별빛에서 풍겨오는듯한 싱싱한 향취는 리석의 가슴에 새삶의 은은하면서도 격동적인 열정의 선률을 안겨주는듯싶었다.
리석은 혁명가의 아들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