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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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용차의 뒤좌석에 고개를 수굿하고 앉은 리석의 사색은 오직 하나의 생각에만 집착하고있었다. 그 사색의 집착점은 길이였다.
지금까지 리석은 생활에서 길을 두고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모대긴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수도의 밤거리를 거닐면서도, 현실체험을 위해 가파로운 초소의 길, 풍요한 황금가을의 논뚝길을 걸으면서도 자연이 펼친 절경의 세계에만 심취되였지 자욱자욱 옮기는 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다. 하지만 김태호과장과 함께 가는 이밤의 길은 지난 인생의 세계와는 너무도 달랐다. 하기에 승용차에 앉아있는것이 괴로왔고 지나온 나날을 더듬으며 끝없이 걷고싶은 밤길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김태호가 물병을 주며 마시라고 했어도 병을 쥔채 터갈라진 입술만 감빨던 리석은 은연중 눈길을 들어 차창밖을 살피였다. 승용차는 푸름푸름 밝아오는 새벽빛에 자태를 드러내며 확대되여 다가왔다가는 가뭇없이 멀어지는 산골짜기의 굽이진 기슭으로 달리고있었다. 숲이 무성한 푸른 계곡을 에돌던 승용차가 멎어선 곳은 어느 산골마을이였다.
혜산의 대기념비건설장으로 갈것이라고 생각했던 리석으로서는 뜻밖이였다.
김태호를 따라 승용차에서 내린 리석은 농촌리의 관리위원회 마당이라는것을 알아보고 어찌하여 지방의 농촌관리위원회로 오게 되였는지 종잡을수 없었다. 김태호가 저쪽에서 기다리고있던 농립모를 쓴 두사람과 뭐라고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리석에게로 데려왔다.
《바로 이 동무가 리석입니다.》
《이거 반갑수다.》
리만길이 농립모를 반쯤 들었다놓으며 푸접좋게 웃었다. 그옆에서 수더분한 농사군같아보이는 사람이 함께 웃음을 짓고 서있는데 김태호가 리석에게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인사하오, 삼복리 관리
리석은 면구스러움에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굽석 인사했다. 리만길이 리석의 잔등을 밀며 성큼성큼 걸었다.
관리위원회를 나선 일행은 영덕산기슭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양지바른 산기슭엔 아담한 기와집들이 어깨겯고 오붓이 자리잡고있는데 집집의 굴뚝에서 허연 연기가 피여오르고 마당가에선 닭들이 모이를 쫓고있었다. 어느 집마당에선가 염소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목가적인 산촌의 향수를 풍기며 울려왔다.
여느때같으면 한폭의 조선화와도 같은 산촌의 이 이채로운 정경에 젖어있으련만 지금의 리석이로서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앞서걷는 김태호와
리만길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으며 산등성이를 오르고 리석의 등뒤에서 리당
리석은 자기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오리무중의 착잡한 생각에 집착되여있었다. 등성이로 오르는 오솔길옆의 왼쪽골짜기에는 다락밭이 펼쳐져있었는데 시꺼멓게 거름독이 오른 강냉이잎사귀들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숲속에서 꿩들이 나래를 펼치며 솟구쳐올랐다.
리석이 이슬을 머금은 잡관목들을 헤치며 등성이로 오르는데 오래간만에 톺아보는 산길은 여간 베차지 않아 달리기선수처럼 헉헉하는 가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리석은 저쪽릉선의 큰 소나무옆에 웬 사람들이 서있는것을 얼핏 스쳐보았다. 앞서 오르는 김태호와 리만길이 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있었다.
리석은 너럭바위옆으로 오르다가 그만 지치여 덩굴속에 넘어졌다. 무릎이 얼얼해왔다. 뒤따르던 리당
빙그레 웃는 사나이는 뜻밖에도 주대성이였다. 리석은 마치 환각이나 착각이 아닌가싶어 눈을 껌벅이며 주대성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주대성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채 리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구.》
더욱 놀라운 일은 등판우에 올라섰을 때였다.
낯모를 청년들이 선망어린 눈길로 리석을 지켜보고있었다. 차성희와 이틀전 외무성 과장으로 복직된 차성준이였다. 그들의 뒤쪽에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주현희도 서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가? 리석은 꿈을 꾸는듯싶었다.
김태호가 리석의 팔을 끌더니 새로 꾸린듯 검붉은 흙으로 정교하게 봉분하고 잔디까지 떠입힌 묘소로 안내했다.
《
리석은 아버지의 묘소라는 소리에 너무도 놀라와 굳어졌다.
심장은 금시 터질듯 세차게 박동했다.
지금껏
아버지의 묘비를 보면서 그는 항일유격대의 정치공작원이였던 아버지가
《
리만길은 리석에게 자기때문에 렬사인 아버지의 묘를 늦게야 찾게 되였다고 진심으로 사죄하면서 이제부터는 항일선렬들의 피가 스며있는 삼복리의 력사를 두고 청년들을 교양하겠노라 몇번이고 다짐했다.
아버지의 묘비를 보는 리석의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다. 비석에는 《묘주 리석》이라는 자기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김태호가 리석의 곁으로 다가섰다.
《리석동무,
《흑-》
리석은 터지는 오열에 손으로 입을 싸쥐며 어깨를 떨었다.
리석의 어깨를 꽉 잡는 김태호의 음성도 저으기 갈려있었다.
《
리석은 갈라졌던 주현희와 자기사이에 인생의 참된 동지적사랑을 다시 꽃피워주신
주현희가 묘앞의 대리석판에 꽃묶음을 놓고 술병을 리석이앞에 내밀었다. 리석은 떨리는 손으로 잔에 술을 부었다. 그 술잔에 리석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방울이 두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
혁명가인 아버지처럼 살지 못했다는 뼈저린 자책에 흐느끼며 리석은 묘지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
리석의 절규에 김태호도 리만길도 눈굽을 훔치였다. 흐르는 세월의 년륜속에 자식들마저 잊고 살아온 한 혁명가, 하지만 그 혁명가를 잊지
못하시여 수십년세월이 흐른 오늘 그의 유골을 찾아 그앞에 자식을 내세워주신
리석은 밤새워오면서 길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였지만 그 무엇이라고 찍을수 없었던 인생길에 대한 철리를 아버지의 묘앞에서 찾았다.
아버지가 걸었던 길,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온 밤길, 이 땅에 태를 묻고 살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길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이어져야 하는가.
리석의 두볼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현희의 눈가에도 뜨거운것이 맺히는데 아름다운 아침노을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