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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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선각은 옥천고을을 에돌아 영동고을로 행차머리를 돌리였다. 다만 옥천고을경계까지 마중나온 고을원에게 백성들을 성쌓기에 모두 불러내라고 엄하게 호령하였다. 그리고 조헌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있는가, 이마의 상처는 어떤가, 성쌓기에도 면제해주고 또 잡세도 받아들이지 말고 그러되 그의 일거일동을 잘 살피다가 또다시 상소할 기미가 있거든 즉시 감영에 알려라 하였다.
그는 자기가 관찰사로서 한개 도의 권력을 쥐고 휘둘러대여도 백성들속에서는 다 정당한것으로 될것이지만 조헌이앞에서는 그것이 비법불법으로 되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윤선각은 지난날에 고마왔던 조헌이를 다 잊어버리고 오늘에는 자기를 해칠수 있는 유일한 적수로 생각되였다.
선조왕은 조헌이 임금을 바른길로 돌려세우지 못하는 신하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고 하면서 죽으려고 주추돌에 자기 머리를 짓쪼았다고, 련 사흘째 의식을 잃고있는데 생사를 알길 없다는 말을 들었을때 크게 놀랐었다. 자기의 죽음으로 바른말을 올리였던 신하는 아직 없었다. 고려시기에 그리고 본왕조의 태조때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왕대에도 있어보지 못한 큰 사변이였다.
선조왕은 당황하였다. 만약 조헌이 소생하지 못하면 후일의 력사기록에 자기 임금의 명예를 심히 손상시키는 글을 남길것이였다.
아무때 아무 임금이 암둔하여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아낙네처럼, 혹은 밀과 보리를 갈라보지 못하는 숙맥처럼 어느것이 바른소리인지 아닌지 분별치 못하여 충신을 죽게 만들었다고 두고두고 전해질것이였다. 선조왕은 조헌이 죽지 않고 살아나기를 은근히 바랐다. 조헌이 귀양까지 갔다온 사람으로서 이번에 죽을 각오로 상소를 올린것을 보면 바로 진짜충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의 뇌리에는 문득 류성룡이가 떠올랐다. 류성룡은 왜나라에 사신을 보내자고 제의한 재상중의 한사람이다. 그때문에 조헌의 상소문에 규탄배격을 면치 못하였다. 그때 선조왕은 류성룡에게 《경은 금과 같고 옥과 같은 훌륭한 선비이다. 경의 마음과 뜻은 밝은 해에 물어볼수 있다는것을 내가 알고있는지가 오래다.》고 위로하여주었었다. 또 이보다 앞서 조헌의 병술(1586)년 상소에 리산해가 무자비하게 규탄되였을 때에도 《…나라일이 망쳐지지 않는것은 내가 경을 리조판서자리에 등용하였기때문이다. 모든 관리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데 누가 감히 헐뜯는단 말이냐. 저 미친놈의 말과 같은것은 어린애의 한번 웃음거리도 될수 없다.》고 리산해를 두둔해주었다.
선조왕은 리산해와 류성룡이 조헌이처럼 임금을 바른길로 돌려세우기 위해 죽음으로 상소를 낼수 있을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는 조헌을 미친놈, 간사한 도깨비라고 어지를 내린것이 어느정도 후회되기도 하였다.
조정의 간신들은 임금의 기분을 알아차리는데 귀신같아서 한동안 조헌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상소를 옳게 여겨왔던 안세희와 관리들은 왜적을 방비하기 위해 조헌이 제기한 대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글을 올리였다.
남쪽 변방의 요해지에 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성을 금성탕지로 만들며 군사에 밝은 무장들을 시급히 임명파견하자고 제기하였다.
경인(1590)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조정의 론의가 계속되였다. 마침내 그 제의가 수락되여 호서, 호남, 령남의 요해지에 성을 쌓을데 대한 교지가 떨어지고 문무를 겸비한 관리들을 중요한 고을의 원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이른바 하삼도에 각기 방어사를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리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리억기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송상현을 동래부사로 임명하였다.
윤선각은 임금의 큰 신임을 받아서 충청도관찰사가 되여 내려온것이다. 그는 임금의 높은 신임을 발판으로 더 큰 신임을 얻으려고 성쌓기공사에 백성들을 가혹하게 내몰았다.
어느날 조헌은 뜻밖에도 윤선각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 놀랍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였다.
놀라운것은 윤선각이 빨리도 높은 벼슬에 오른것이고 반가운것은 젊은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때문이다.
전 관찰사 리성중은 농번기철에도 백성들을 성쌓기에 내몰았었다. 조헌은 리성중에게 편지를 내여 농번기철에는 뒤로 미루었다가 농한기에 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가 파직되고 새 관찰사로 윤선각이 왔다.
새 관찰사는 전 관찰사처럼 농번기철에 백성들을 마소처럼 성쌓기에 내몰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초불을 밝히고 한때 가까이 지냈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서두에 인사례절을 간단히 쓰고 그다음 도내 백성들의 가련한 처지와 질곡을 그대로 썼다.
《…백성들은 지난 봄에도 여름에도 굶주린 배를 그러안고 성쌓기에 고생하였소이다. 이 가을에 다행히도 새 관찰사가 도입하였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이오이다. 오히려 더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성쌓기에 허덕이고있소이다. 새 관찰사도 전 관찰사처럼 백성들을 마소처럼 여기면서 돌보지
않을 작정입니까. 백성이 있고야 나라도 있고 조정도 있고 관찰사가 있는것이니 부디 민심을 잃지 말고 <인자무적>의 리치를 정사에 받아들여
안으로는 백성들의 부모가 되고 밖으로는 당장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는 왜적을 족쳐버리는 무적
우리 20대시절에 가까이 사귀였던 정의를 봐서라도 저의 허물없는 제의를 노여움으로 사지 말고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조헌은 이 편지를 고을원 구만석에게 주어 윤선각이 빨리 받아보도록 긴히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