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2
(2)
윤선각은 약속대로 임금께 글을 올리였다. 임금이 《누가 알지 못하고있는 자기의 과오를 스스로 드러내놓은것은 쉽지 않은것이다. 기특하다.》라는 어지를 내리고 윤선각에게 품계까지 한등급 올려주었었다.
윤선각은 조헌이가 고마와 감지덕지하였다. 조헌의 말대로 화가 복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세살적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윤선각이 2~3년도 못되여 뢰물질로 리조판서 리산해와 김공량에게 잘 보여 홍문관 응교(정4품)로 벼슬이 껑충 오르고 그다음엔 승정원의 동부승지(정3품)로 올랐다가 반년사이에 좌승지로, 그다음엔 예문관 부제학으로 또 다음엔 임금의 특별지시로 상주목사로 임명되였다. 그는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처럼 벼슬이라는 나무를 어찌나 잘 오르는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래우면서 오늘은 충청도관찰사로 한개 도의 제왕이 되여 위풍당당히 내려오고있는것이다.
그는 조헌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자기보다 나이는 한살 아래지만 한때는 늘 그의 충고를 받으면서 고맙다고 제입으로 말해왔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매우 시끄러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조헌은 시문에서나 유교성리학에서나 자기보다 월등하고 강직한 성품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살수 없는 윤선각이였다. 사람이 세상에 한번 났다가 부귀영화도 누리고 권력도 떨쳐보아야 할게 아니냐. 지금은 누구나 다 그것을 바라고있는데 조헌이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홀로 엇서보았대야 무엇을 얻었는가. 벼슬을 잃고 귀양살이만 하지 않았느냐. 대대로 가난을 벗지 못하고 제손으로 밭을 갈아먹는 백면선비의 처지밖에 차례진것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나이와 벼슬이 도토리 키재보기로 엇비슷하여 너나들이로 지내왔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처지가 하늘과 땅차이로 뒤번져졌다. 조헌은 일개 선비요, 윤선각 자기는 한개 도의 관찰사이다. 그는 조헌을 관권으로 다룰수 있고 위엄으로 누를수 있게 되였다.
가을바람은 행차앞에서 나가는 충청도관찰사의 령기를 펄펄 날리게 불어오고 금빛같은 해빛은 가마안으로 새여들어와 계집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무릎에 감돌았다.
윤선각은 감영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도내의 고을들을 다 돌아보면서 가려고 하였다. 겉으로는 도내형편을 알기 위해서라지만 자기가 다스려야 할 고을과 백성들과 량반선비들 그리고 부자들에게 위엄을 보여주어야 하였기때문이다.
행차는 충청도의 첫 어귀에 있는 진천고을로 향하였다. 행길좌우에 논벌이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삭이 패다가 말라죽은 벼포기들이 드문드문 보일뿐이고 전수이 풀판이 되고말았다. 밭들은 범이 새끼쳐도 모를 지경이였다.
《여봐라, 어찌 논벌에 일하는 백성들이 보이지 않느냐?》
윤선각이 눈을 지릅뜨고 밖을 내다보면서 개 벼룩 씹듯이 수염을 곤두세웠다.
《예이, 진천고을원이 관찰사께서 새로 부임되여 내려온다기에 어제는 백성들에게 길닦기를 시켰고 오늘은 사또님을 영접하느라고 길가에 늘여세우고 기다리고있소이다.》
신임관찰사를 마중하여 도의 경계까지 나와서 길안내를 하는 관리 하나가 이같이 아뢰였다.
《무엇이라고? 올해농사를 이꼴로 만들어놓고 무엇을 보여줄것이 있다고 본관을 기다린단 말이냐?》
《사또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오만 너무 노여워하지 마옵소서. 오늘에 못한 일은 래일에 곱절로 하면 되지만 사또님의 위엄을 구경하고 영접하는 경사는 오늘 하루뿐이 아니옵나이까?》
《그래도 그렇지… 이후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히 단속하거라.》
윤선각은 길안내관리의 말이 과히 싫지 않은듯이 말꼬리가 부드러워졌다.
행차가 령기들을 펄펄 날리며 줄줄이 이어나갔다. 저멀리 진천고을 관가지붕이 보여오고 이내 줄을 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무리가 뚜렷이 안겨왔다.
이날 저녁 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양을 잡고 닭을 잡아 요란한 술상을 펼쳐놓은 동헌마루에 높이 앉은 윤선각은 꽃같은 기생들이 저마다 부어주는 술을 받아 마시였다.
휘넓은 관가마당 각곳에 초롱불들을 보름달같이 내걸어서 대낮같이 밝히고 풍악소리 넘치게 춤판을 벌리였다. 하늘에 삼태성이 기울고 새벽닭이 울었다.
《뉘집의 수닭인지 얄밉기도 하오이다.》
기생 하나가 윤선각에게 술을 부어올리며 호호 웃었다.
《응?! 수닭은 왜?》
《관찰사께서 즐기시는 이 자리를 파할 때가 되였다고 꼬끼요 하오니 괘씸하지 않사오리까?》
《듣고보니 그도 그렇군. 여봐라, 뉘집 수닭인지 얼른 잡아오너라. 암(암닭)은 수(수닭)를 좋아하니 향란에게 튀해서 주리라.》
윤선각은 그 기생을 담쑥 안아 무릎에 앉히면서 《그래 좋지?》하고 웃으니 좌중이 《와하하…》 좋아라 너도나도 손벽을 치며 박장대소하였다. …
윤선각은 이렇게 한고을에서 사흘낮, 사흘밤을 지내고 다음 고을로 떠나군 하였는데 내가 언제 술놀이를 한적이 있었는가 하듯이 수염을 뻑 내리쓸고 엄하게 신칙하군 하였다.
《지금 나라형편이 여의치 못하다. 백성들을 잘 다스려 미납된 조세와 군포를 받아들이고 성곽을 보수할것은 보수하되 새로 쌓을것은 쌓으면서 나라의 방비를 든든히 해야 하리로다.
백성들을 엄히 다룰수록 좋다. 그 리치는 불과 물을 보아도 잘알수 있다. 사람들은 불이 무서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불에 타죽는 사람이 적다. 하되 물은 순하여 무섭지 않아서 가까이 하다가 빠져죽는 사람이 많다. 백성들을 살리자면 불과 같이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이 고을 관장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있다. 여기로 오면서 보니 본관을 영접하느라고 고을백성들을 모아왔다는것이 고작 백여보밖에 늘여서지 못하였다. 고을원과 륙방관속, 고을군사들은 백성들을 휘여잡지 못하고있다. 모두 형장아래 반주검이 되여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래일부터 백성들이 가을농사일도 부지런히 하면서 성쌓기에도 가호마다 장정 한사람씩 내보내도록 하라.》
윤선각은 진천고을을 이어 음성, 충주, 증평, 괴산, 보은고을을 거쳐 돌다가 옥천고을을 앞두고서는 망설이였다. 옥천에서도 지나온 고을에서처럼 주안상을 펼쳐놓고 기생들의 가무속에 파묻혀있을수 없기때문이였다. 거기에는 조헌이가 있었다. 그가 자기의 행적을 알면 가만둘리가 없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