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1

(4)

 

조헌이 뢰물로 들어온 부정한 쌀을 옳은 쌀로 만들어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싹틔워준것은 안해 신씨의 편지였다.

신씨는 편지에 《이 쌀을 제가 받아들이면 어른의 정사를 흐리게 할것같아서 그대로 돌려보내오이다. 이 쌀을 본인당자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기보다는 다문 몇집이라도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미로 나누어주면 어떨지 어른께서 살펴서 하옵시오.》라고 썼었다.

조헌이 천성이 청렴하고 공정한데다가 안해의 내조가 있었기에 고을백성들이 《우리 사또님》이라고 부르며 따를수 있었다.

조헌에게 있어서 안해 신씨는 크나큰 힘이였다. 그가 귀양갈 때 《어른께서 너무 괴로와하지 마시오이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다가 그리되였으니 귀양살이를 달게 여기시오이다. 저도 함께 가도록 허락하시오이다. 저는 그저 어른만 모시면 한생 역경에 들어 죽는대도 행복하리라고 생각하오이다.》라고 하며 따라갔었다.

아, 이런 안해가 오늘은 중병으로 생사기로를 헤매고있다.

동네늙은이들이 조석으로 찾아와 병문안을 하였다. 그들이 좋다는 약은 다 구하여 가져왔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닭이 세홰째 우는 새벽녘이였다.

신씨는 따스히 손발을 주물러주고있는 남편에게 가냘픈 웃음을 고요히 지어보였다.

《어른께서 오늘도 밤을 지새우셨군요. 좀… 주무시오이다. 쇤네가 어른께… 시집오던 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진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생토록 이몸이… 어른의 지팽이가 되리라는 맹세였나이다. 어른께선 나라의 지팽이가 되시구

조헌은 안해의 손을 어루쓸어주며 눈물을 머금었다.

《참말, 그 말 참 잘하였소. 마음에 꼭 드는 말이구려. 내 그렇게 살테니 부인도 꺾어지지 않는 지팽이가 되여주오, 응?》

신씨는 남편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안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잠시후에 안해의 조갈든 입술사이로 실오리같은 가느다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완기랑 해동이랑 무술이 좀 늘었소이까?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그들이 한몫해야 할터인데

《퍽 늘었소. 걱정마우. 그애들은 자기 몫을 훌륭히 하게 될거요.》

조헌은 왜나라에 갔던 우리 나라 사신들이 돌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놈들의 침략기도가 더욱 뚜렷해진것을 알면 안해가 더 큰 근심걱정을 안을것이였다.

《야장간을 차려놓아야 할 때가 아니오이까?》

《그렇소. 그 준비를 착실히 하고있으니 념려마우.》

신씨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고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숨결이 잦아들었다. 조헌은 겁이 났다. 이마를 짚어보았다. 얼음같이 차거웠다. 삼녀가 사향을 꿀물에 타서 먹이였다. 안해는 용케 그것을 넘기였다. 그때문인지 조금 있다가 다시 정신이 맑아진듯 눈을 떴다.

《어른께서 형판님께 편지를 보내시와 김여물목사님을 용서하도록 건의하시면… 어떨는… 지요, 뛰여난 무술을 지닌… 장수감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하지 않을가… 보오… 이다.》

김여물이란 의주목사였다. 그가 옥에 갇히게 된것은 압록강을 건너오는 명나라사신일행의 짐을 부리워주던 의주관가의 관속 하나가 아차실수하여 넘어지면서 짐을 물에 반나마 적셔놓은것과 관련되였었다.

명나라 사신일행은 우리의 관속을 잡아가두고 형장을 쳤다.

김여물은 격분하여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 나라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두고 형장을 치리오. 본관은 의주목사로서 이를 허용할수 없소이다.》 하고 사신에게 항의하였다.

명나라사신은 할수없이 관속을 내놓았지만 한성에 올라가서 《의주목사 김여물은 큰 나라 사신을 모욕하고 나라와 나라사이를 버그러지게 하였으니 조선조정에서 이 사람에게 죄를 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것이다.》 하고 위협하였었다.

사대에 물젖은 조정에서는 큰일이나 난것처럼 형조판서로 하여금 김여물목사를 한성감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 일은 얼마전에 조헌에게 보내준 안세희의 문안편지에 알려온 소식이였다.

김여물은 젊은 시절에 임금을 호위하여 사냥터에 자주 따라다니였다.

조헌이 호조좌랑을 할 때 김여물은 병조의 훈련원(군사훈련과 군사학연구 등을 담당한 부서)의 당하관벼슬에 있었다.

어느해인가 달리는 말에서 떨어져 그가 허리를 몹시 상한적이 있었었다.

그때 조헌이 부항과 침으로 그의 허리를 씻은듯이 완쾌시켜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조헌이와 각근히 지내게 되여 이따금 조헌의 집에 놀러와 신씨가 차려주는 음식상에 마주앉군 하였다.

형조판서 리증은 조헌이 사헌부감찰(정6품)로 있을 때 사헌부지평 (정5품)벼슬에 있었는데 부서에서 무엇을 론의할 때면 두사람의 의견이 언제나 일치하여 자연히 가까이 지내였다.

조헌에게는 김여물과 리증이 젊은 시절에 자기보다 한등급 높았지만 인간적으로는 지우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신씨가 형조판서 리증에게 김여물의 죄를 용서하도록 편지를 보내면 어쩔가 하였던것이다.

《부인, 내가 그 생각을 못하였소. 내 곧 형판(형조판서)어른께 편지를 쓰겠소.》

조헌이 이렇게 안해와 약속하면서 사향꿀물을 입에 넣어주었다.

안해는 약보다도 남편의 지극한 정성이 온몸에 흘러들어 눈물을 지으며 솔곳이 잠들었다. 조헌은 잠든 안해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부인, 내 먼저 임금님께 상소를 올리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구려.)

그러자 근심어린 안해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들려왔다.

(상소를 다시 올리면 어른께서 또다시 귀양가오리다. 제가 함께 가지 못하니 외로운 몸으로 어찌 마천령을 넘으리오. 자중자숙하옵시오.)

(임금님을 돌려세울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마천령을 넘으리다.)

그는 또 이렇게 안해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붓을 들었다.

《…신은 영영 입을 다물고 시골에 묻혀 생을 마칠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듣자니 왜놈들이 저희 나라에 갔던 우리 사신을 모욕하고 우리 나라를 위협공갈하였다고 하기에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붓을 들었사옵니다.

왜놈들이 기회를 타서 졸지에 달려드는 날에는 변경의 방어가 허술한데다가 우리가 꼭 차지해야 할 곳에는 아직도 훌륭한 책략을 세워 지켜갈 장수가 없는줄 아옵니다. 간신들이 일을 그르쳐서 나라가 위험에 처해있는 이때에 전하에게 미치는 화가 박두한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고… 부득불 눈물을 뿌리면서 말하지 않을수 없사옵나이다.

오늘의 사태는 흥망과 성패가 순간에 달려있는것만큼 참으로 편안치 못한 때이옵니다. 나라방비를 지체없이 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부모처럼 돌봐주시여 기울어진 민심을 수습해야 하오리다. 나라이자 백성이고 백성이자 나라의 힘이고 억척같은 성새이옵니다.》

조헌의 조급하고 분통한 마음이 줄줄이 쏟아져내리는듯 글발이 거세차게 종이우에 일어났다. 교활한 도요또미의 언사는 극히 어리석고도 오만무례하므로 반드시 실패한다고, 우리 백성들과 군사들에게 왜적을 칠데 대한 의리로 불러일으켜 적의 등줄기를 꺾어야 한다고,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굶주리고 지친 군사들이 적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서 한강과 대동강사이에선 적의 발굽에 짓밟히는 화를 입게 된다고 글자마다 글줄마다 불을 토하는듯 하였다.

《왜들이 이달에 쯔시마에 군사를 밀어넣고도 우아래가 쉬쉬하면서 크게 거사하려는 기미를 감추고있으니 그들이 속에 품은 야심이 얼마나 혹독한것이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의 사신에게 공급물자를 푸짐하게 마련해가지고 성의껏 대접하고있사옵나이다.》

조헌은 잠시 붓을 멈추었다. 치솟는 격분으로 붓을 든 손이 후두두 떨려났다.

왜놈군사들이 우리 나라와 제일 가까운 쯔시마에 밀려든 사실을 조정에서는 모른단 말인가, 이달초에 왜놈들에게 랍치되여 쯔시마에 끌려갔던 가덕도의 우리 군사 하나가 열흘만에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와서 제가 직접 보고 온것을 경상관찰사에게 급급히 알렸는데 어찌하여 조정에서는 왜의 사신들에게 공급물자를 푸짐하게 성의껏 대접만 하고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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