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1
(3)
조헌의 부친은 새 며느리의 지참금이 사람을 살려낸 사연을 알고는 수염을 기분좋게 쓸어내리면서 환히 웃었다.
《우리 집에 복덩이가 흘러들었고나. 그 마음을 천금에 비기랴, 만금에 비기랴.》 하고 새 며느리를 칭찬해마지 않았다.
지향은 지참금없이 빈몸으로 시집문턱을 넘어서면서 시부모님들이 어떻게 생각할가 하고 못내 불안하였지만 오히려 장하게 여겨주고 기뻐하시니 너무나 고마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이 집이야말로 사람을 천금보다 귀중히 여기는 집이로구나, 내 이 집 가풍을 따라배우리라 다짐하였다.
그는 시부모님들을 무한히 공경하고 따랐다. 근면하고 부지런한 시부모님들을 잠시라도 쉬우게 하려고 해종일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밤에는 베틀에 올라 무명을 짰다. 그렇게 해서 어느 부자집량반 못지 않게 옷갓을 깨끗이 하여 남편을 내세우고 남편이 학문을 닦는데 지장이 되지 않게 밭이랑을 밟지 않도록 아글타글 애썼다. 또 청렴강직하고 대바른 남편의 성품이 세월의 비바람에 풍화되는 바위처럼 금이 가고 시속의 때가 묻지 않도록 안해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는 남편이 벼슬에 오른 뒤에도 남편을 턱대고 마님행세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을원을 지낼적에도 그리고 도사의 벼슬을 할 때에도 부임지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서 고을원의 살림을 펴거나 도사의 집을 잡으면 뢰물보따리가 부엌뒤문으로 들락날락할것이기때문이였다. 뢰물에
맛들이면 백성들을 잃고
조헌이 보은현원으로 부임한지 두어달이 지나간 어느해 봄이였다.
이 봄에도 신씨는 아직 어린 완기와 해동이, 삼녀를 데리고 밭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난데없는 쌀 세섬이 사랑방토담에 쌓여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기름기가 도는 하얀 상등옥백미였다.
사랑방 할멈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것처럼 신씨에게 하는 말인즉 조금전에 웬 사람이 달구지에 이 쌀섬들을 싣고와서 묻기를 《이 집이 보은고을 사또님의 댁이 옳은가?》 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니 자기는 보은고을 호방이 시켜서 왔다 하고는 이 쌀을 부리워놓고 갔다는것이였다.
《할머니도 참, 이건 뢰물쌀섬인데 받으시다니…》
《쇤네도 그런것같아서 이 집에선 안받는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쌀섬을…》
근 보름이 지나서 그 쌀섬이 신씨의 편지와 함께 보은현관가에 고스란히 돌아왔다. 쌀의 내막을 알게 된 조헌은 다음날 조회를 열고 인원점고를 여느날보다 엄격히 하였다. 륙방아전들은 물론이요 하인들까지 동헌뜨락에 다 불러냈다.
조헌은 관복을 엄히 갖추고 동헌마루에 나와서고 뒤따라 책방이 문방구를 들고나와 앉은뱅이 서탁에 앉았다. 이것은 조헌이 세워놓은 기률이였다. 그날 조회에서 고을원이 무엇을 지시하였고 무엇이 론의되였는가를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가 앞으로 그에 근거하여 실천여부를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려는것이였다.
조헌은 직품에 따라 반렬을 짓고 서있는 아전들을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먼저 빙그레 웃었다.
《이 봄에 굶주리는 집들이 많아서 밭갈이와 씨뿌리기를 못하는 백성들이 많다. 본관이 근심걱정으로 밥이 달지 않고 잠이 달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백성들을 일으켜세울 구제미를 바친 사람이 있다. 참으로 착하고 어진 사람이요. 그 사람은 바로 우리 관가 호방 공익배요.》
륙방아전들과 군사들이 일시에 공익배를 바라보며 술렁이였다.
백성들의 조세와 가렴잡세를 악착스럽게 받아내는 공익배가 갑자기 선행을 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호방 공익배는 백성들의 구제미를 바친적 없는데 사또님이 칭찬을 하는지라 도대체 무슨 감투끈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문득 번개처럼 뇌리를 치는 생각에 당황하였다. 아하, 옥천고을에 있는 사또의 향가에 보냈던 쌀 석섬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아니다. 그럴수야 없지. 아무도 모르게 그것도 멀고먼 곳에서 보내온 쌀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공가는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억지라도 구제미를 바친척 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봐라. 호방이 구제미로 바친 쌀 석섬을 이리로 날라오도록 하라. 모두에게 공익배호방의 착한 마음씨를 실지로 보여주어야 하겠다.》
눈깜짝할 사이에 쌀섬들이 반렬앞에 옮겨졌다. 노르스름한 벼짚을 추어서 촘촘히 엮은 섬에 쌀을 배부르게 넣어서 쌍십자로 묶여져있는것이 보기에도 여간만 희한스럽지 않았다. 공익배는 자기가 옥천에 보냈던 쌀섬이 틀림없음을 보고 아니, 저게 어떻게 되돌아와 구제미가 되였나, 어이쿠, 아깝구나 아까와- 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륙방아전들과 관속들은 《히야-》 하고 탄성을 지르면서 너도나도 쌀섬을 헤치고 백미를 한웅큼씩 집어서 살펴보았다.
《옥백미래도 상등옥백미로구만. 이 쌀은 어전에 올려도 부끄럽지 않겠소그려!》
《구제미치고는 너무 과하군. 이 쌀 한섬을 팔면 보리쌀 열섬은 넉넉히 살수 있겠는데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아지겠소.》
《그러기 말일세. 공익배호방이 과연 장하우.》
공익배는 자기를 추어주는 소리에 귀를 막고싶었다.
이게 무슨 창피람. 일은 개판이 됐구나. 그전에 고을원에게 이와 꼭같이 《례물》을 보낸적있었는데 그때는 그 덕에 고을공유지가 내 땅으로 흘러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은 알알이 백옥같은 쌀이 무지렁이들의 배속에 공짜로 들어가게 되였구나. 이런 랑패가 어디 또 있으랴.
공익배는 얼굴을 수수지짐짝처럼 붉히였다.
조헌은 호방이 당황하여 안절부절하는것을 모른체하고 한수 더 떴다.
《모두 듣거라. 너희들이 호방의 선행을 익히 보았거늘 각자가 성의를 다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구제미를 바치면 얼마나 좋겠느냐. 바치는 수량에 따라 공을 매겨서 감영에 올려보내면 감사가 기특히 여겨 조정에 주달할것이로되 임금까지 아시게 되여 은혜를 베풀지 누가 알겠느냐. 책방은 호방의 선행을 여러장 크게 써서 고을의 각곳에 공시하라. 그러면 량반부자, 선비들이 호방을 따라나설 사람이 왜 없겠느냐.》
이리하여 구제미 백여섬이 관가에 들어와 굶주리는 백성들의 가호마다에 골고루 나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