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6

(2)

 

(세월이 도적을 만들고 악덕관리들을 낳는고나.)하고 그는 다시 탄식하였다.

조헌은 수저를 들지 않은 음식상을 그대로 두고 일어났다.

《소인은 돌아가겠소이다. 수저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나무람마시오. 관장의 성의에 고맙기 그지없소이다. 하오나 소인이 이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내 어찌 먹으리오. 허허-》

조헌이 이렇게 말뒤끝을 웃음으로 맺었지만 구만석은 자기를 질책하는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구만석은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면 가만있지 않았을것이다. 허나 조헌은 자기의 옛 스승일뿐만 아니라 고을원을 지낸적이 있는 선배이고 불의에 대해서는 그 누구일지라도 대바르게 규탄배격하는 올곧고 강직한 사람이다.

구만석은 훈계가 많은 조헌이가 은근히 시끄러워졌다. 허나 어쩔수 없었다. 그는 게면쩍게 얼굴을 붉히였다.

《소인이 돌아가면서 또 한번 당부하오이다.》 조헌은 자기보다 10년이나 아래인 구만석이였지만 고을의 장관이여서 공식적인 례의를 지켜 반말을 쓰지 않았다.

《왜놈들이 가까운 년간에 반드시 변란을 일으킬 기미가 뚜렷하오니 부디 고을을 추켜세우도록 하옵시오. 백성들을 배고플세라, 추울세라 돌보아주는것이 첫째오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잘살게 되고 고을이 우뚝 솟아날것이오이다. 왜놈들이 달려든다면 그놈들을 죽탕치고 나라를 지켜낼것이오이다. 관장이야 향교시절에 인자무적의 뜻풀이를 누구보다도 잘해서 향시에 일등합격자로 뽑히지 않았소이까.》

그랬었다. 구만석은 향시에 시제로 나왔던 《인자무적》을 훌륭하게 뜻풀이하여 교수 조헌의 칭찬과 관찰사의 칭찬을 받고 기쁨을 금치 못하던 때가 어제일처럼 방불히 떠올랐다.

《인자무적》이란 다음과 같은 고사에 기초를 두었다.

아득한 옛날 고조선시기에 이 땅에는 여러 크고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백리국이란 작은 나라도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개 고을의 크기만하고 마을이 스물두셋이 될가말가하였다. 백성들도 그만큼 적으니 나라라고 할만한 형편이 못되였다. 군사수도 몇백명에 지나지 않고 국력이란 보잘것 없었다. 주변나라들은 백리국을 얕잡아보고 아무때나 침략해왔다. 오늘은 동쪽에 있는 동국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해치고 략탈하였고 래일은 서쪽에 있는 서국에서 침노하여 기름진 땅을 강탈하여 저희네 땅으로 만들고 그다음날에는 북쪽에 있는 북국이, 그다음엔 남쪽에 있는 남국이 덮쳐들어 왕자까지도 인질로 잡아갔다. 그리하여 백리국은 눈녹듯이 점차 작아지고 쇠락하여 50리국이 되나마나 하였다.

왕은 날마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보존하랴, 어떻게 하면 나라의 령토를 넓히랴 하고 머리를 썩이였다. 그런데 왕의 신하중에 현명한 신하 하나가 있었다.

《상감마마께서는 너무 걱정마시오이다. 나라를 금석같이 지키고 보존할뿐 아니라 부흥케 할 계책이 있사옵니다.》

《뭐라고?! 그 계책이 무엇인지 어서 아뢰여 과인의 근심을 덜어다오.》

임금이 너무 기뻐 룡상에서 벌떡 일어나 신하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상감마마께서 그 계책대로 꼭 하겠다고 언약하시겠다면 아뢰이겠나이다.》

《나라를 보존케 하고 부흥케 하는 계책보다 귀중한것 없다. 과인은 언약하노라.》

《그러면 계책을 아뢰겠나이다.

첫째로 상감마마의 집에 있는 보물과 궁궐에 있는 보물을 있는 그대로 팔아 백성들의 굶주림을 면케 하옵소서.

둘째로 백성들이 바치는 조세와 온갖 가렴잡세를 없애도록 하시는 덕을 베푸소서.

셋째로 관리들의 아부아첨과 뢰물행위들이 나타나면 즉석에서 목을 베옵소서.

넷째로 농사철에 성쌓기와 여러가지 부역을 없애고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 물산을 풍부히 내도록 하옵시오.

상감마마께서 이 네가지 계책을 실행하면 죽을 병에 걸렸던 사람이 약을 먹고살아나듯이 나라가 솟구쳐오르리다.》

임금이 신하의 말뜻을 알았다.

《그 계책은 임금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위해주는 인덕을 베풀라는 말이 아니요?》

《예, 바로 그것이옵나이다. 은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덕〉은 그 마음을 실지행동으로 나타내는것이나이다.》

《과시 옳은 말이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인심은 인덕을 따라 흐르나이다. 물이 바다로 모이듯이 인덕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모여드나이다.》

왕은 환히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힘이오이다. 힘만 있으면 땅을 갈아 곡식이 쏟아지게 하고 금, 은, 쇠를 캐내여 재물을 마련하고 백성들을 풍족히 먹이고 입힐수 있으니 인덕을 크게 베풀수 있사오이다. 인덕을 베풀면 베풀수록 멀리서, 가까이에서 온 나라 백성들이 전하를 향해 달려올것이나이다. 그러면 백성, 땅, 재물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더 크게 인덕을 베풀수 있는 밑천이 되옵나이다. 이렇게 자꾸만 인덕을 베풀면 나라는 얼마든지 커지나이다. 이것을 문자로 〈덕, 인, 지, 재, 용〉이라고 하오이다.》

임금이 기쁨을 금치 못해하는데 신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인덕이 백성을 낳고 백성이 땅을 낳고 땅이 재물을 낳고 재물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데 이것이 곧 인덕이오이다. 이것이 나라밖으로 지경을 넘어 이웃나라까지 소문나고 이웃의 백성들과 선비들, 군사들이, 관리들이 모두 전하의 인덕지붕아래로 강물처럼 흘러오게 되오이다. 그것을 누가 막을수 있겠소이까, 아무도 막지 못하옵니다.

이것이 인자무적이오이다. 군사도 전쟁도 마찬가지인즉 인덕나라 군사는 자연히 하나가 적 백을 깨치고 천을 깨쳐서 결국 전하의 군사는 무적입니다.》

임금은 신하를 나라의 최고벼슬에 등용하고 신하의 계책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했더니 몇해안팎에 나라의 인구가 늘어나고 땅이 커지기 시작하고 나중엔 백리국이 천리국으로 넓어지고 만리국으로 되였다. …

구만석은 《인자무적》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중에서도 이 고사를 제일로 여겼었다. 조헌이도 향교에서 이 고사를 풀이해줄 때 다른 이야기보다 더 열정적으로 들려주었었다. 백리국임금이 영특한 신하의 계책을 받아들여 인덕을 베풀어 인구가 점차 늘고 땅이 넓어지기 시작하였다는 대목에 가서는 그의 얼굴이 이른아침에 타오르는 노을처럼 붉게 상기되고 마침내 천리국, 만리국으로 나라가 강대하여졌다는 이야기끝에 가서는 자기의 크나큰 소원이 이룩된듯이 얼굴빛이 환하게 빛났었다. 그때 조헌교수의 모습에 구만석은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조헌은 백리국이야기를 마친 끝에 《여러 선비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르면 백리국의 교훈을 참작하여 백성들을 사랑하고 인덕을 베풀기를 바란다.》 하고 당부하였었다.

구만석은 자기가 벼슬에 오르면 인덕을 베풀리라 속다짐을 굳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고을원이 되고보니 사람들을 쥐락펴락 부리는 권력맛이 달고 재물을 긁어모아 치부하는 맛이 달고 부귀영화맛이 달았다. 인자무적의 교훈은 어느사이 감감 잊어버렸다.

헌데 지금 조헌이 인자무적을 상기시키는것이다.

(허, 저 어르신은 옛 고사만 알았지 지금 세월은 모르시는가봐, 그러니 한생 가난을 벗지 못하고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는거야. 관찰사 리성중이 저 령감보다 훨씬 못하지만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 학문으로 보나 재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조헌이 월등한데 귀양까지 갔다오고 백면서생으로 남아 시골에 묻혀있으니 《인자무적》을 론한들 무슨 보람을 얻었는가.)

구만석은 조헌을 측은히 바래주었다. 조헌은 그의 내심을 읽는듯이 구만석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관장은 〈인자무적 〉을 뼈에 깊이 새기고 인덕을 베푸시도록 하오.》 하고는 결연히 삼문밖을 나왔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