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 회)

제 4 장

1

 

깍지낀 두손을 무릎우에 포개놓고 벽에 기대여앉은 리석은 고뇌에 싸여 돌덩이같은 한숨을 쏟아내고있었다. 웃방천정의 갓도 쓰지 못한 전등이 발산하는 빛도 가시처럼 머리를 쑤셔대는것같아 신경질적으로 문옆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삽시에 방안이 먹물을 뿌린듯 어둠속에 묻혔다. 한결 마음이 안착되는듯싶었다. 그것은 한순간, 어둠속에서도 혜산에서 있었던 일들이 금시런듯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직무태만, 불순한 남녀관계로 인한 풍기문란

주대성이가 대기념비창작에서 제명된 후 잇달아 너무도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피고석》에 섰던 리석은 종시 대기념비건설에서 제명되여 오늘 평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곧추 형수네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창작단의 독신자합숙에서 생활하면서 명절날이나 일요일에는 형수에게 인사도 할겸 찾아가군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합숙으로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웃방미닫이문이 조심히 열리더니 어둡던 방안이 환해졌다. 리석은 눈을 뜨지 않고도 불을 켠 사람이 농업과학원(당시) 연구사인 형수라는것을 알았다. 리석의 형은 전쟁때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락동강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때부터 외동딸 순이를 데리고 홀로 살아오는 형수지만 마음속에 그늘이 생겨도 리석을 대할 때면 늘 봄날의 꽃처럼 밝은 얼굴이였다. 어찌보면 사색형의 연구사라기보다 푸접좋은 동네아주머니처럼 롱담도 곧잘했다. 하지만 오늘은 리석의 얼굴에서 그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얼음장을 가늠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조차 않고 리석이 좋아하는 매운탕을 끓이였다.

《삼촌, 연구소에 나갔다가 아침에 들어오겠어요, 아래방에 상을 차려놓았는데 국이 식기전에 어서 드세요.》

그는 뭔가 더 말할듯 주밋거리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형수가 나간 후 리석은 몰켰던 숨을 터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학생소년궁전 미술소조에 다니는 순이는 피곤에 몰렸는지 굳잠에 들어있었다. 발치아래로 차던진 포단을 들어 씌워주던 리석은 종이장에 그린 연필화를 집어들었다.

한 처녀의 초상이 그려져있는데 어디선가 본듯도 하고 아닌듯도 하다. 아니, 낯익은 눈길이다. 초상에 눈길을 박던 리석은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얼굴형태는 다소 달랐지만 미소를 띤 눈매만은 주현희였다.

학생소년궁전 미술지도교원인 주현희를 몹시도 따르는 순이가 자기의 재간을 삼촌에게 뽐내려고 모지름썼다는것이 알리였다. 여느때 같으면 조카의 기특한 재능에 웃음을 띄웠을 리석이지만 이밤엔 그 초상이 오히려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그 초상은 혜산역두에서 자기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던 현희의 모습을 재생시켜주고있었다.

리석은 연필화를 쥐고 창문쪽으로 다가가 현희를 그리며 혜산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상기하였다.

혜산역에서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헤여진 후 건설장으로 돌아온 리석은 현장지휘부천막에서 황유탁과 대결하였다.

《주대성동문 조각창작단에서 노란자위입니다. 조각가들이 그를 대기념비건설에서 제명시킨 문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황유탁은 리석의 속마음을 가늠하려는듯 실눈을 지으며 마치 심문하듯 따지고들었다.

《조각가들이요, 아니면 동무요?》

《저의 생각이자 조각가들의

《둘러치지 마오. 주대성이 문젤 내가 결심한 일인줄 아는가? 김도만부장이 전화로 내린 지시야! 동문 처남, 매부하며 주대성일 싸고돌지 말고 의화리사적건물에 세울 조각을 빨리 완성하오. 그게 대기념비 못지 않게 중요한 사업이야.》

《그 혁명가가 누굽니까?》

《그건 왜 또 물어? 내 말했댔지. 이 일은 극비에 붙여야 한다구?》

《왜 사적건물이라고 하면서 극비에 붙여야 합니까?》

《엉? 동문 지금 어따대구 입방아질이야!》

《우린 천리마동상창작때도 구체적인 형상방안에 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고 창작했습니다. 의화리사적건물도 수령님께서 교시가 계신 대상입니까?》

《뭐요?》

수령님의 교시를 받지 못하고서는 못하겠습니다.》

《뭐? 못하겠다? 당신 모가지가 몇개야, 엉?》

리석은 주대성이를 기념비제작단에서 내보낸 문제로 황유탁과 정면충돌한것과 의화리의 반신상창작을 거부했기때문에 자신이 작두날에 올랐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불현듯 현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감정에 잠기겠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잘코사니! 맹종맹동하더니 종당에 차례진것이 어떤것인가?

주현희가 쓴웃음을 짓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 쓴것같았다.

(아니, 아니야. 난 그가 생각하고있는것처럼 그렇게까지 속물은 아니야!)

그는 이제라도 현희를 찾아가서 혜산에서 있은 황유탁과의 대결을 이야기하고싶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수 있다는 생각에 맥없이 머리를 저었다.

가쁜숨을 톺던 리석은 불현듯 창가에서 돌아섰다.

자기도 모를 충동이 마음속에서 용암처럼 끓어번졌다.

예술영화촬영소로 찾아가자. 혹시 김정일동지께서 촬영소에 계시면 만나뵈올수 있지 않을가. 불시에 확 솟구쳤던 불길이 금시 가느스름한 초불로 가물거리더니 졸지에 가뭇없이 꺼져버렸다.

아니, 무슨 체면에…

리석은 그처럼 크나큰 믿음을 주셨던 김정일동지앞에 너무도 죄스러움이 커서 맥없이 오금을 꺾고 주저앉았다.

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리석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열었다.

순간 아연해서 굳어졌다. 당력사연구소 과장 김태호가 서있지 않는가.

…리석이 김태호를 따라간 곳은 인민군협주단청사였다. 객석출입문으로 들어서니 불그레한 조명속에 백두밀림을 형상한 무대환등이 한눈에 확 안겨왔다. 인민군협주단의 합창단배우들이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백두의 밀림에서 밝아온 이 아침

우리는 수령의 노래 자랑으로 부르네

암전된 객석중심의 탁에서 불빛이 빛나고있었다. 탁상등빛이였다.

그 불빛에 눈길을 모으던 리석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후두둑 뛰기 시작했다.

협주단일군들에게 가르치심을 주시는 김정일동지의 영상을 알아보았기때문이였다. 그제서야 리석은 김정일동지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이 여기로 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김태호는 김정일동지께서 계시는 탁의 뒤에 서있었다.

합창대의 시연회가 끝나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김태호를 돌아보시며 뭔가 말씀하시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리석은 타들어오는 입술을 감빨며 고개를 숙인채 속이 한줌만해서 출입문가에 서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외등이 희미한 빛을 뿌리는 극장옆의 정원길로 나서시였다.

리석은 옥죄여드는 마음으로 김정일동지의 뒤를 조심히 따랐다.

《학생소년궁전의 현희선생은 평양에 올라오는 길로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리석동문 집구석에서 뭘했소? 고민꾸레미를 안고 씨름질했소?》

《제가 그만 자포자기에 빠져

《자포자기? 동문 하루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조각칼을 쥔 부르죠아사회의 창작가입니까? 주대성동문 평양에 올라와서도 대기념비형성안창작에 밤을 새우고있소. 그런데 동문 어쩌면 혜산을 그리도 쉽게 떠났습니까?》

리석은 김도만부장이 직접 지시한 문제라기에 혜산을 떠났다고 떠듬거리였다.

《동문 지금 이 시각도 속으로 이렇게 말하겠지. 우에서 지시 요, 〈결론이요 하며 내리먹이는데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 그 〈지시〉요, 〈결론이요 하며 강권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뒤모습을 봤습니까?》

그이께서는 그 사람들의 앞모습과 뒤모습을 가려보지 못할 때에는 제정신을 잃고 맹종맹동하게 된다고 하시였다.

《우리 나라 속담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지? 그것이 생김새를 닮은데서 나온 말이라고만 생각하오? 난 그래도 리석동무가 항일혁명투사의 아들로서, 그 계승자로서 구실을 하길 늘 마음속으로 바랬소. 헌데 육체에 흐르는 피는 유전됐겠지만 사상과 정신은 아버지와 전혀 다르지 않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걸음을 옮기시다가 전나무가지를 쥐시고 깊은 사색에 잠기시여 말씀을 이으시였다.

《의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생물학적유전의 피를 두고 그 형에 따라 인간을 론하는 때가 많소. 하지만 우리는 생물학적유전의 피가 아니라 백두의 넋을 이은 주체형의 피로 끓어야 하오. 백두의 혈통만을 이어야 한단 말이요.》

《!

리석, 그의 피형은 B형이였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도 B형일것이라고 추측해왔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생물학적피형에 따르는 특기와 성격까지도 의학과 심리학의 상식을 론하며 추리해보았지만 넋의 유전에 대해서는 들어본적이 없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난 리석동무를 두고 나도 창작가라는 립장에 서서 생각을 많이 해보았소. 작품은 그것을 창작한 창작가의 얼굴이라고 하지 않소. 그것은 창작가의 사상과 신념의 창조물이기때문이요.》

리석은 자책과 격정이 엇갈려 고패치는 강렬한 심리적흥분에 손에 땀을 쥐고 그이의 가르치심을 가슴을 조이며 자자구구 새기고있었다.

《동무가 왜 개별적인간들이 당의 사상과 배치되는 잡소릴 줴치는것도 식별하지 못하고 함구무언했는가. 주대성동무나 주현희동무보다 지식의 탑이 낮아서요? 아니요. 인생의 자대가 없었기때문이요. 모든 문제의 옳고그름을 판별하는 유일한 자대는 오직 수령님의 교시요. 동무가 그 자대를 쥐고 분석하고 판단했다면 나라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다 희생된 견결한 혁명가의 아들답게 혁명전통의 순결성을 옹호고수하는 길에서 한치의 탈선도 모르는 맹수가 되였을것이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며 마치 자신에게 하시듯 추억에 젖어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세계를 알기보다 자신을 알기가 더 힘든 법이지.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는 자기를 모르고 살다가 모르고 죽는 인간입니다. 또 자기를 알면서도 자기를 변명하며 사는 인간들은 더 가련한 속물이고. 재판정에 선 피고에게는 변호가 있지만 자기 스스로의 검토에서는 변호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믿는것, 이것이 힘입니다. 난 자신을 믿구 혁명을 합니다. 자기 힘을 믿으면 이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습니다.》

사나운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치며 금시라도 리석을 떠밀어 어디론가 던질듯싶었다.

《대기념비창작, 그것은 순수 재능의 산물이 아닙니다. 사상의 창조물, 신념의 열매입니다. 심장이 멎으면 육체가 죽지만 신념이 썩으면 인간의 넋에 곰팡이가 낍니다. 주현희동문 혁명가의 딸답게 살려고 애쓰는 선생인데 동문 그 녀성의 진정도 가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순결하고 깨끗한 한 처녀의 사랑마저 받을 자격을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리석은 자기 인생은 이미 쏟은 물이여서 그 어떤 용서도 동정도 바랄수 없다는 위축감에 아무 말씀도 올릴수 없었다. 오직 자신에 대한 저주와 혐오뿐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김태호과장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인생의 새 출발을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떠나라고, 그곳에 가서 자신의 지난날을 심각히 검토하고 총화하라고 이르시고는 자리를 뜨시였다.

(지난날을 심각히 검토하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하라는 곳, 그곳은 과연 어디인가?)

리석은 그이를 우러르며 흥분과 격정에 싸여 못박힌듯 굳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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