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회)
제 3 장
10
근 두달동안 평안북도와 자강도에 대한
무대의 배경막에서도 백두의 흰눈이 소리없이 내리고있었다. 그 흰눈이 싣고온 은은한 선률이 극장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배경막의 흰눈과 대조를 이루려는듯 검은색의상을 입은 연주가들이 바이올린의 선을 활로 긋는다.
《혁명전통의 폭을 상하좌우로 넓히라》, 《흰 대리석으로 기발형태만 세우라》, 지어 주대성을 대기념비창작에서 제명시킨 문제, 주현희와 리석의 충돌이 가져온 사랑의 결렬…
관현악의 선률을 들으시는
추억의 걸음으로 흰눈이 내리는 가림천기슭을 거니시는
《…저는 어린시절부터 유화 〈보천보의 홰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장차 미술가가 될 꿈을 키웠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미술교원이 되였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보천보는 충천하는 불길을 배경으로
한손에는 군모를 쥐시고 주먹을 높이 들고 연설하시는
주현희의 편지를 가방에 넣으시는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어서…》
리면상이 엉거주춤하며 일어서려는것을
《선생님에게서 추억에 남을 사랑은 무엇이였습니까?》
이것은 전혀 뜻밖의 질문이였다. 더우기 극장에서 관현악의 시연회를 보신 후에 사랑문제를 화제에 올리시니 사람들속에서 곧은배기라는 평판을 받는 리면상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총각때는 처녀에 대한 사랑, 가정을 이룬 후에는 안해에 대한 사랑, 아들딸이 생긴 후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 옳습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아니, 옳습니다.》
《아닙니다. 리면상선생님이 제일 사랑하신건 눈입니다. 그것도 백두의 흰눈!》
사실 리면상은 한생을 창작밖에 모르는 작곡가였다. 그에게서 첫째가는 사랑은 노래였다. 하나의 선률을 찾기 위하여 때로는 때식마저 건늬며 피아노앞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을 맞군 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가요 《눈이 내린다》에는 례사롭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저녁이였다. 창밖으로 내리는 흰눈을 바라보며 퇴근시간이 퍼그나 지나도록 사색에 잠겼던 리면상은 뜻밖에도
그러나 정작 음악가를 마주하시니 심중에 가득 쌓였던 이야기를 다 할수 없으시였다. 혈전의 만단추억을 펼쳐놓으시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던가…
빨찌산이야기로 잠 못드는것만같은 불밝은 창가들, 이 나라 빨찌산들의 념원이 꽃핀 락원의 거리에 밤깊도록 내리고내리는 눈송이, 눈송이…
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온 가정이 걱정하며 창작실에 알아보았다. 퇴근한지 오랜데 집에 가지 않았다니 창작실에서도 소동이 일었다. 혹시 퇴근길에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는가 하여 가족들은 리면상과 안면이 있는 시인들이며 작곡가들의 집까지 찾아다니였다.
바로 그때 리면상은 모란봉에 올라가있었다. 심장의 벽을 두드리는 곡상을 무르익히기 위한 음악가의 발걸음은 대동강반을 거쳐 모란봉으로 이어졌던것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숫눈길을 걸으며 리면상은 백두의 흰눈을 그려보았다. 주머니에는 오선지와 연필이 없었다. 리면상은 손가락으로 수북이 쌓인 눈우에 악보를 찍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나온것이 가요 《눈이 내린다》였다.
《백두의 흰눈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명곡을 오선지에 담을수 없습니다. 이것은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창작가의 불타는 심장이 낳은 귀중한 창조물입니다.》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아니, 난 오늘 이 연주를 들으며 사랑에 대하여 많은걸 느끼고 배웠습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형상한것이 마음에 듭니까? 선생님의 고심어린 탐구가 가꾼 열매인데 어디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잘합니다.》
《아니,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사실 지금껏 이 노래는 독창곡과 독주곡으로 형상되였습니다. 그런데 관현악으로 형상하니 작곡가인 저도 제가 작곡한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감상하는 심정입니다. 제가 지은 노래가 옳은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선생님은 참 마음이 후한 〈시험관〉이군요.》
《지휘자동무, 다시 들어봅시다.》
《알겠습니다.》
극장안엔 다시 《눈이 내린다》의 선률이 울리기 시작했다.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시고 눈을 감으신채 계시던
《지휘자동무, 세번째소절에서 화음이 왜 불안정합니까?》
《세번째소절에서 말입니까?》
《듣지 못한게구만.》
《〈눈이 내린다〉의 연주는 흰눈세계의 철학적심오성으로 일관되여야 합니다. 그 철학적심오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동무들은 그저 순결무구한 흰눈만 눈앞에 그려보지 말고 그 흰눈의 바다우에 날리는 붉은기, 우리 항일혁명선렬들이 추켜들고나가던 붉은기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뚜렷한 대조속에 작품이 안고있는 사상주제가 관통됩니다.》
리면상이며 지휘자 그리고 극장의 일군들이
《작곡가선생이 방금
《선생님, 연주가들이 선생님을 찾아와 눈에 대한 철학을 물어본 일이 있습니까?》
《연주가들과는 창작얘기를 나누지 못했고 지휘자동무하고만 형상문제를 가지고 론의해봤댔습니다.》
《내가 왜
가요 〈눈이 내린다〉에는 항일의 혈전만리, 그 자욱자욱에 새겨진 불멸의 력사가 담겨져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연주가들은 눈도 마음도 백두밀림의 흰눈이 아니라 악보에 가있습니다. 그러니 활로 바이올린선을 긋는것도 기계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연주는 심장의 강렬한 웨침으로 울려야 사람들의 심금을 틀어잡을수 있습니다.》
《무대도 백두밀림이 되여야 관중을 백두의 세계에 심취시킬수 있습니다.》
《제가 형상지도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지휘자가 두손을 만지작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말에
《가요 〈눈이 내린다〉는 확실히 명곡입니다. 그런데 창작된지 한해가 지나도록 응당한 빛을 보지 못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노래를 관현악으로 형상하도록 했는지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백두의 정신은 조선의 신념이고 넋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노래의 형상을 중시하는겁니다.》
작곡가도 지휘자도 그리고 연주가들도 새로운 음악세계가 태동하고있는
《건축에서 설계가 아무리 잘되였다 해도 시공이 잘못되면 훌륭한 집을 지을수 없듯이 곡이 아무리 좋아도 형상을 잘못하면 작곡가의 고심어린 탑이 순간에 허물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은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빠져 교향곡1번이요, 2번이요, 바이올린쏘나타요 하면서 외국의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 인민의 기호와 구미에도 맞지 않는 기악곡을 형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는 음악예술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내용! 이것은
혁명과 건설을 오직
그래서 나는 교향곡도 〈눈이 내린다〉와 같은 우리의 명곡을 우리 식으로 형상하면 인민대중에게 커다란 사상정신적량식을 주는 진실로 고상한 예술로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