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5
(3)
저녁노을이 하늘가에 붉게 타오르고 방금 조헌이 갈아엎은 밭이랑에도 어려들었다.
신씨는 남편의 상처자리를 보고 할말을 잊고있는 정암수에게 조용히 웃으며 말하였다.
《쇤네는 한발 먼저 들어가겠소이다. 이내 집에 들어오시오이다.》
조헌은 정암수와 함께 옥계천시내가로 갔다. 조헌은 밭을 가느라고, 정암수는 먼길을 오느라고 흘린 땀과 몸을 시원히 씻었다. 두 사람이 다 기분이 상쾌하여 껄껄 웃었다.
얼마후에 그들은 소박한 저녁상에 마주앉았다. 어느 사이에 신씨는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고 또 삼녀가 뜯어온 봄나물과 햇도라지, 냉이, 달래로 반찬을 정갈하게 무쳐서 상을 차리였다.
정암수는 호화스럽고 희한스러운 고려청자기술단지를 내놓았다.
《아니, 이게 웬 술이오이까?》
《소인이 가져온 술이오이다.》
정암수는 밝게 웃으며 술단지를 기울여 술잔이 넘치게 부었다.
《중봉선생, 귀한 몸 무병장수하기를 바라오이다.》 하고 두손으로 받쳐주는 술잔을 받은 조헌은 정암수에게도 잔이 넘치게 부어주었다.
《죽산선생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몇백리 먼길에 깨칠세라, 쏟칠세라 귀히 품고온 이 술, 이 정성이 이 몸에 흘러들어 인생의 먼길에 힘이 되리다. 하하하.》
그들은 다같이 잔을 비웠다.
조헌은 오래간만에 좋은 술을 마시니 얼굴이 이내 불깃불깃해져서 완기와 해동이, 삼녀를 불러들이였다.
《이분은 전라도에 사시는 정암수선생이시다. 이 아버지가 귀양살이를 할 때 나를 위해 임금님께 상소한분이시다. 너희들은 이분께 인사를 드려라.》
먼저 완기가 정암수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였다.
《어르신님에 대한 말씀을
다음은 해동이가 큰절을 올리고 머리를 수그린채 떠듬떠듬 목메인 소리를 하였다.
《방금
《응?!》
정암수는 의문이 어린 눈길로 조헌을 바라보았다.
《해동아, 그만해라.》
조헌이 해동이를 제지하면서 《죽산선생, 해동이가 부은 술은 어찌하시려오. 어서 드시오이다.》 하고 권하였다.
《예, 마시오리다. 헌데 해동의 말이 부모없다니 무슨 말인지…》
《죽산이 물으시니 할수없이 이야기해야 할가봅니다. 죽산선생도 우리 해동이를 알고계시오이다.》
《소생이 어찌 알리오?!》 정암수는 눈이 커졌다.
《우리 함께 덕유산유람길에 올랐다가 세 무덤앞에서 울고있는 할머니를 본적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는 유람길을 그만두고…》
《아, 그때를 어찌 잊을수 있으리까? 고을아전들이 범보다 무섭다고 하던 그 할머니가 지금도 생생하오이다.》
《그때 그 할머니의 손자가 초막안에서 굶주려 쓰러져있었지요?》
《예, 일여덟나는 총각애였소이다.》
《바로 그 손자애가 저 해동이였소이다. 허허허.》
《아니 그럼?!》
정암수는 꿈만같아서 어리둥절하여 해동이를 바라보았다. 허지만 꿈아닌 생시여서 《어디 보자, 이 사람.》 하고 그의 손을 잡아쥐고 《중봉선생이 너를 이렇게 헌헌장부로 키워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잡은 손을 놓지 못하였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본 불쌍한 할머니와 손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하늘땅차이처럼 서로 달랐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