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5
(1)
며칠전에 공주에 사는 제자들인 김질, 김약이 찾아와 하루 묵으면서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멀리 전라도에서 정암수라는 선비가 하늘소를 타고 수백리 옥천땅의 조헌을 찾아왔다. 그가 쓰고있는 검은 갓양태에 길먼지가 오르고 흰 도포자락이 땀에 얼룩져서 먼길의 수고로움이 얼마나 고된것인가를 잘 알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정암수는 그런것은 다 잊고 조헌을 만나는 기쁨에 어쩔줄 몰랐다.
《이게 몇해만이시오. 중봉선생이 전라도도사를 지낼 때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오이다. 하하하.》
《십년이 지난것같소그려. 세월이 물흐르듯 한다더니 그보다 화살처럼 빠르기도 하오이다. 하하하.》
두사람의 귀밑머리엔 다같이 흰서리가 섞여들고 미간에는 내천자 주름이, 입가에는 여덟팔자 주름살이 굵게 이랑을 지었다.
그들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나누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였다.
《중봉선생이 귀양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까지 상소를 다시 올리고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떠하오이까, 이마의 상처는?》
《허물자리가 좀 남았소이다. 죽산(정암수의 호)이랑 여러 선비들이 소인을 귀양보낸것은 잘못되였다고 임금께 고하여 소인이 이렇게 살아돌아왔소이다. 어떤 권력있는 관리들은 소인의 상소내용이 허위라고 하면서 사형죄에 해당시키자고 하는 때에 이 사람과 죽음을 함께 할 각오를 가지고 소인을 편들어준 은혜는 내 죽어도 잊지 못하리오이다. 자, 이 중봉이 무릎꿇고 절을 하리다.》
그는 머리수건을 벗고 크게 허물진 이마를 땅바닥에 닿게 절을 하였다. 그의 볼을 타고 감사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암수는 《아니, 이러지 마시오이다. 이러시면 안되오이다.》 하고 조헌의 팔을 잡아일으키는데 어느 사이에 신씨가 조헌이 옆에 나란히 엎드리였다.
《고맙소이다. 죽산선생께서 큰 의리를 떨쳐주시와… 선생님을 뵙는 이날의 기쁨이 있게 되였소이다.》
신씨의 얼굴에도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암수는 더욱 당황하여 《부인님까지 이러시면 이 사람이 송구해서 난감하오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의로운 장거를 단행한 중봉선생에게 소인이 응당 먼저 큰절을 드려야 하옵는데… 자, 이 죽산의 절을 받아주시오이다.》 하고는 갓을 벗고 도포자락을 좌우로 헤치면서 무릎을 꿇고 맞절을 하였다.
그러자 조헌과 신씨가 황망히 일어나 그를 일으켜세우려고 하였지만 정암수는 절을 하고야 일어났다.
《가만, 이마의 상처자리가 깊은데 좀 봅시다.》
정암수는 조헌이 벗었던 수건을 다시 쓰려는것을 제지하고 가까이 마주서서 보고는 깜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아니, 이렇게 모질게… 이렇게 하고도 살아났소이까.》
큰 왕밤알만한 상처자리는 아물기는 하였지만 뼈가 부스러져서 움푹 패여져있는데 맥박이 뛰는데 따라 눈에 띄게 오르내리였다. 의원이 부스러진 이마뼈를 집어내고 봉합했던것이다.
정암수는 조헌의 두손을 꽉 잡고 《중봉선생-》하고 목이 꽉 메여 아무 소리도 더하지 못하였다. 그 어떤 말로도 조헌의 충절을 표현할수 없었기때문이다.
조헌이 정암수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전라도도사를 지내던 어느해 여름에 있은 일이다. 그때 전라도관찰사는 송강 정철이였다. 그는 대바르고 청렴결백하였을뿐 아니라 학문이 깊고 시문에 능하여 누구도 따를수 없는 시재였다. 또 사람이 너그럽고 롱을 즐기며 대범하여 인망이 높았다. 흠이라고 할수 있는것은 술을 지나치게 하여 실수하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처음에 조헌은 송강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왔을 때 그가 소인(남을 헐뜯고 고발하여 자기 리욕을 채우는 사람)이라는 여론이 돌아서 도사의 벼슬을 내놓고가려고 하였다.
송강이 웃으며 그를 만났다.
《공이 내가 흉측하고 바르지 못한 소인이므로 벼슬을 그만두고가겠다고 하는데 나를 믿지 못하겠는가?》
《그렇소이다.》
《공과 나는 지난날 서로 사귀지 못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흉측하고 바르지 못하다는것을 아는가. 가지 말고 나와 같이 일하면서 내가 진짜 소인인가를 보라. 그런 다음 떠나가도 늦지 않을것이다.》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의 기분을 심히 거슬리우는 조헌에게 가겠으면 어서 가라고 호령할수도 있었지만 송강은 오히려 너그럽게 받아들이였다.
이리하여 조헌은 송강과 함께 일을 시작하였었다. …
조헌은 그를 보좌하는 도사로서 이따금 귀에 싫은 소리를 하군 하였다. 정철이 정사를 보는중에 결함이 엿보이면 즉시에 충고하였고 그릇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다.
정철은 조헌이보다 나이상으로 여덟살이나 우였지만 조헌을 늘 어렵게 대하였다. 그는 조헌의 충고를 다 받아들였지만 술에 대한 충고는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하였다.
조헌은 이해 여름에 도내 각 고을을 순행하는 정철을 따라나섰다. 그러던중에 강진고을에 들리였다. 고을원은 정철과 조헌의 일행을 위해 《청조루》라는 다락에서 큰 연회를 차리였다. 여기에 정철과 먼 친척벌이 되는 선비 정암수도 참석하였다. 《청조루》란 즐거운 파도소리를 듣는 다락이라는 뜻이다.
《오늘 제공들이 상하피탈하고 누구나 술을 마음껏 들면서 즐겨보세.》
정철은 술을 보면 벌써 기분이 둥실 뜨는지라 술잔을 높이 드니 사람들도 기쁘게 술잔들을 일시에 들어올리였다. 그러나 조헌만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정암수는 저 도사가 왜 저럴가 하였으나 초면이여서 권하지 못하였다. 정철은 조헌을 보고 량심상가책이 갔지만 즐거운 웃음을 함뿍 담고 한마디하였다.
《아 이 사람, 자네도 오늘은 한잔 들게.》
조헌은 자기 상관의 권고에 례절을 차려서 《예.》하고 대답하였을뿐이지 끝내 술을 들지 않았다.
《허허, 자네는 만장의 흥취를 깨려나. 기어이 벌주를 마셔야 하리로다.》
정철은 곱게 생긴 계집에게 눈을 끔쩍해서 새 잔에 술을 가득 붓게 하였다. 조헌은 웃사람이 시켜서 붓는 술이라 받기는 하였지만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있기만 하였다.
《자네가 들어야 나도 들겠네.》
정철이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헌이 그때에야 환히 웃었다.
《관찰사어른이 술잔을 내려놓으시니 참 잘하였소이다. 고을원이 백성들의 피와 기름을 짜내여 음식을 삼고 그것으로 관찰사어른에게 아첨하고 도의 관찰사되는분이 백성들을 살리는데는 마음을 쓰지 않고 술을 마시는데만 정신을 쏠린다면 어이 정사가 잘되리까. 제발 술과 가까이하지 마시기를 바라나이다.》
정철은 아래사람들앞에서 창피를 당하였지만 조헌의 말이 다 옳은 말이여서 너그럽게 허허 웃고 그 연회를 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