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4
(2)
아이들중에 어느 큰 아이 하나가 기겁해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다른 아이들도 큰 애를 따라 절을 하는데 다섯살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글만 읽고있었다.
목깃이 둥글고 가슴부위에 구름무늬 흉배가 있는 례복에 은고리 띠를 두르고 옥관자가 달린 관모를 쓴 대감은 엎드려 글을 읽고있는 쬐꼬마한 총각애한테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얘야, 너는 왜 행차구경을 아니하고 글만 읽느냐? 다른 애들은 다 구경을 하는데…》
총각애는 머리우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올려다보고 놀란듯 벌떡 일어났다.
《우리 아부님은 글을 읽을 때 헛눈을 팔지 말라고 하셨소이다.》
눈매가 영특하게 빛나고 대답이 보석같이 반짝반짝 빛나서 대감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너는 무슨 글을 읽느냐?》
《천자문을 읽소이다.》
《내앞에서 보지 않고 외울수 있느냐?》
《예.》
총각애는 오돌차게 대답하고 《하늘천, 땅 지. 가물 현, 누를 황, 집 우…》를 얼음판에 박밀듯이 천자문을 외워바쳤다.
《잘 외웠다. 글은 읽을줄만 알고 쓸줄 모르면 절름발이공부지, 이자 외운 글을 쓸것같으냐? 가만, 여기에 무슨 글이 씌여있고나. 이 땅바닥 글은 누가 썼느냐?》
《제가 썼소이다.》
《그래?! 그럼 그걸 지우고 다시 써보아라.》
총각애는 《알았소이다.》 하고 쬐꼬마한 손바닥으로 글자들을 쓸어지우고 향교훈장앞에 시험을 치듯이 한자한자 소리내여 외우며 《농사천하지대본》 일곱자를 글획이 분명하게 써보이였다.
《허, 장하고나. 그런데 너는 왜 이런 글을 썼느냐?》
《우리
대감은 그 소리에 허허 웃고 대감을 따라온 사람들도 즐겁게 웃었다.
《그참, 속에 학자님이 들어앉았구만, 하하하.》
《될성한 나무는 떡잎때부터 안다구 이 애가 자라면 크게 되겠네. 허, 그참…》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어린 신동이를 장히 기특해하였다.
대감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총각애의 손을 잡아쥐였다.
《너는 뉘집 아들이고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살이고 집은 어디냐?》
《저의
어린 조헌이 손들어 가리켜보이는데 참말 영특스럽기 그지없었다.
《음, 알겠노라. 내 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렸다가 가겠노라. 너는 일후에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서 나라의 동량지재로 자라나거라. 알겠느냐?》
《예, 알겠사옵나이다.》
《동량지재가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구 하는 소리냐?》
《천자문에 다 있는 글자들인데 어이 모르오리까. 마루 동, 들보 량, 갈 지, 재주 재, 마루나 들보로 될만한 재주라는 소리인데 나라를 떠받들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옵나이다.》
어이쿠나, 이 애가 범상치 않는 애로구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입을 하 벌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려온 동자가 아닌가 하듯이 신기하여 바라보았다.
대감과 총각애가 나누고있는 이야기를 듣고있던 쪼무래기들은 《야-》하고 손벽까지 짜락짜락 쳤다. 마치 대감님을 놀래우는 대답을 저희들이 한듯이 기뻤던것이다.
《허허, 옥천땅에 너와 같은 애가 태여날줄은 몰랐구나! 내 이따금 네가 자라는것을 지켜보겠다.》
대감은 총각애의 머리를 쓸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호서, 호남을 순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조헌의 집에 들려 조헌의 아버지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조헌이 남다르게 학문을 열심히 쌓으면서 자라나 헌걸차고 씩씩한 젊은이모습으로 번져가기 시작하자 고을의 딸가진 량반집들에서 너도나도 매파를 보내였다.
이런 나날에 가슴을 조이며 잠 못드는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가 바로 자기
지향이는 정승대감의 행차를 어린 조헌이 글공부로 멈춰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남몰래 열심히 글을 읽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헌의 글을 따라앞서려고 직심스럽게 공부하였다. 조헌이 밭머리에 책을 펴놓고 김을 매면서 공부하는것을 살그머니 가보고는 자기도 그와 같이 밭머리에 책을 펴놓고 김을 매면서 공부하였다.
그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조헌을 마음속으로 따랐다. 좀더 자라서는 이성이 눈떠서 서로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조헌이 학문을 닦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 사랑은 누가 학문을 더 많이, 더 깊게 깨치는가 하는 내기를 하도록 가슴에 불을 달아주었다. 바로 이럴즈음에 이웃고을의 량반부자집에서 조헌의 집에 중매군을 또다시 보냈다.
만약 조헌이 중매군의 말대로 하였다면 부귀를 누릴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향이를 사랑하였다. 지향이는 조헌이가 고마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들은 가정을 이룬 후에도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면서 한생을 화목하게 살아왔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랑과 행복, 청렴결백, 이것이 그 어떤 재부보다 더 귀중한 재부였다. …
갈아엎은 밭을 내려다보면서 까치 한쌍이 또 깍깍 우짖었다.
《우리 집에 손님이 또 오려는것같소이다. 손님이 오면 나란히 앉아있는 우릴 보고 웃겠소이다. 어서 일어나시오이다.》
신씨가 웃으며 일어났다. 조헌이도 껄껄 웃으며 다시 보탑을 잡았다. 하루해가 저물어갈 때 아닌게아니라 반가운 손님이 밭으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