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3

(2)

 

박세호의 검은 수염이 쫑깃 치솟아올랐다.

《여봐라. 전령수는 저 왜놈들이 더 다가오지 못하게 신호를 보내라.》

《알았소이다.》

전령수는 《뚜뚜-》나발을 불어대고 뒤이어 자그마한 수기를 획획 소리가 나게 힘차게 가로세로 흔들어보였다.

그러나 놈들의 전마선은 그냥 다가왔다. 놈들이 웃는 얼굴이 보여왔다. 왜놈 하나가 전마선 배머리에 서서 송아지를 가리켜보이며 소리치는데 조선말 통사인듯 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송아지고기를 대접하자고 하오이다.》

박세호는 왜놈들이 놀아나는 꼴을 지겹게 노려보면서 엄하게 지시하였다.

《군사들은 저놈들이 섬에 오르면 모조리 억류하되 왜놈우두머리 한놈과 통사를 나한테 끌어오거라.》

군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비껴들고 달려나가 배에서 내리는 왜놈들을 둘러쌌다. 그리고 왜놈우두머리와 통사를 끌어왔다.

하얀 모시천으로 지은 기모노를 입고 넓은 띠로 허리를 둘러서 터진 앞자락을 가리우고 이마의 머리털을 쑥 밀어버리고 정수리에 오이꼭지같은 상투를 틀어올린 왜인선장이 마침내 박세호앞에 와서 읍례를 하였다.

《선장 스즈끼, 권관님께 문안드리나이다. 여기에 우리의 증빙문서와 화물명세가 있소이다.》

스즈끼의 얼굴에는 점잖고 유순해보이는 웃음이 떠돌았으나 눈에는 비웃음같은 그 무엇이 알릴듯말듯 어려있었다. 바람이 건들 불어와 스즈끼의 기모노자락을 가볍게 날리면서 그의 시꺼멓게 털이 돋은 정갱이를 드러냈다.

박세호는 스즈끼가 내민 신표를 보지도 않고 그자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으음, 너희들이 청하지도 않은 선심을 쓰는게 까닭이 있을게다. 우리가 지키고있는 이 섬의 군사수와 방비상태를 알아내자는것이겠다. 어림없다. 간특한 놈들.) 박세호의 가슴속에선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당신들은 접근하지 말라는 우리의 신호를 받고도 비법적으로 우리 섬에 올랐소. 이것은 불법침입행위이므로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억류하겠소. 어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스즈끼는 당황하였지만 웃는 낮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는지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옳소이다. 권관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하지만 선의를 안고온 손님을 문전박대하면 안되오이다. 우리는 늘 이 섬앞을 지나다니는데 우리로서는 한번도 인사를 못해 미안한 노릇이라 이 섬의 수고많은 군사들을 위해 약소하게나마 무엇을 좀 준비해가지고 내렸소이다. 저 송아지도 끌고오지 않았소이까. 날씨도 좋고 백사장의 경치도 좋은데 마침 점심때라… 예… 귀국의 훌륭한 백화주도 많이 사가지고가는지라 술과 송아지고기로…》

아첨기가 내돋은 스즈끼의 이 말은 하얀 모시기모노자락에 가리워져있는 털부숭이정갱이처럼 검은 속심을 더더욱 드러내였다. 술과 고기로 우리 군사들을 녹여내여 앞으로도 이 섬에 자주 드나들수 있도록 어찌해보자는것이다.

《안되오. 저 송아지도 끌어가시오.》

박세호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하, 저 송아지로 말한다면 이웃이 서로 우의를 두텁게 하고 화기롭게 사귀려는 뜻에서 권관님이랑 대접하려고 동래시장에서 사사로이 사온것이니다. 우리의 성의를 참작해서 노염을 푸시오이다.

소고기전골은 우리 일본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데 애송아지전골은 천하제일맛이오이다. 자, 어서 가십시다.》

《필요없소. 선장은 본관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시오.》

그런데 이때 일이 벌어졌다. 송아지를 끌고오던 왜놈 한놈과 갑동이라는 우리 군사 하나가 서로 송아지고삐를 잡아당기며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였다. 어찌나 세차게 소리치는지 송아지가 놀라 갈팡질팡하였다.

《이 송아지는 우리 집 송아지다. 내가 며칠전에 휴가갔다가 내 손으로 놋쇠방울을 사다가 달아주었다. 자 보아라. 이 소방울을… 네놈이 이 송아지를 훔쳤구나. 이 죽일놈의 도적놈아.》

갑동이가 분연히 웨치면서 소고삐를 잡아당기였다.

《뭐야. 도적이라꼬? 누굴 어떻게 보꼬 도적이라꼬? 놋새방울을 단 송아지는 다 네 송아지야?》

왜놈이 서툰 조선말로 대들면서 송아지고삐를 잡아당기였다.

왜놈선원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모여들고 우리 군사들도 웬일이냐 하고 급히 달려갔다.

《도적이 아니라면 어째 우리 집 송아지가 너희네 배에 실려있었는가. 백주에 소도적질을 해?》

갑동이는 왜놈의 귀쌈을 후려치고 송아지고삐를 잡아당기였다. 그러자 왜놈이 가만있지 않고 갑동이를 맞받아치면서 고삐를 자기쪽으로 잡아당기였다. 이쪽저쪽에서 고삐를 잡아당길적마다 송아지목에 달려있는 놋쇠방울이 딸랑딸랑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였다.

《코노야로, 이 송아지는 우리 선장님께 똥래꼬울(동래고을) 호빵(호방)이 선물한꺼야. 쌍놈의 새끼, 알지도 몬하구…》

《이놈아, 송아지주인이 여기 있는데 거짓말도 푼수가 있지 생뚱같이… 이 도적놈아, 너 한번 죽어봐라.》

갑동이가 욱하여 왜놈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였다. 우리 군사 두엇이 뛰여들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갑동이, 잠간 참게. 저기 권관님이 이리로 오시네. 그분께 어찌된 일인지 순서있게 아뢰게.》

박세호와 왜놈선장 스즈끼가 왔다.

박세호는 갑동이에게 먼저 물었다. 갑동이는 량수거지를 하고 또박또박 거침없이 아뢰였다.

《이 송아지는 우리 집에서 윤두소로 받아다가 기르는 송아지이나이다. 권관님도 아시지만 소인이 모친부고를 받고 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소이까.》

《그랬었지.》

그때 박세호는 갑동이에게 진영의 둔전에서 농사지은 쌀과 콩을 부조로 주면서 그를 위로해주었었다.

《모친상사를 치르고 여기로 떠나오기 전날에 놋쇠방울을 사다가 이 송아지 목에 달아주었는데 어떻게 저것들의 손에 끌려왔겠소이까. 도적질을 하지 않은 이상에야.》

《그대가 방울을 사다달아주었는지 누가 그걸 보증하겠느냐?》

박세호가 따져물었다. 갑동이는 갑자기 당황하였다.

《그건… 소인의 안해와 아이들이… 그리구 옆집에 사는 덕쇠…》

《하하, 그건 말이 안돼. 제 집식구들은 보증인이 될수 없소. 하하하.》

스즈끼선장이 이때라고 갑동이를 비웃었다. 그는 갑동의 주장을 눌러버릴수 있는 조건이 서기때문에 기뻤다.

《이 사람의 말이 옳다. 어찌 흔한 놋쇠방울이 꼭 임자의 송아지에게만 있다더냐.》

박세호는 시비를 엄히 갈라 말하였다. 그는 갑동의 정직성을 굳게 믿었지만 법적인 증거를 세워야 하였다.

《그꺼 부라(그것 보라). 노란 깨는 다 짜기네 깨란다. 하하, 권관님 말씀 맞따.》

갑동이와 아귀다툼하던 왜놈이 승이 나서 쾌재를 올리면서 갑동이를 놀려댔다.

《권관님, 갑동의 송아지가 옳습니다. 갑동이가 소방울에 제 이름석자를 새겨서 달아주었다고 말한적이 있소이다. 소방울을 보면 알수 있소이다. 갑동이, 자네는 왜 그걸 말하지 않나?》

친구 하나가 이렇게 튕겨주어서야 갑동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걸 내가 미처… 권관님, 소방울에 소인의 이름이 새겨져있사오이다.》

《여봐라, 그 송아지 목에서 소방울을 떼여오너라.》

박세호는 낯빛을 엄히 하고 이편에도 저편에도 기울지 않게 호령하였다. 그는 소방울을 받아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최갑동》이라는 세 글자가 서툴게나마 또렷이 새겨져있었다. 그는 말없이 스즈끼에게 소방울을 넘겨주었다. 스즈끼는 소방울의 이름을 보고는 할 말이 없어서 빈 입만 쩝쩝 다시다가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 잡는다고 《이 송아지를 다른 놈이 훔쳐다 우리에게 팔았는지 알수 없으니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줄로 아옵니다.》하고 중얼거렸다.

박세호는 스즈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근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군사들과 왜인들은 본관의 말을 중히 들으라. 본관은 송아지주인이 누가인가가 뚜렷이 밝혀졌으니 송아지를 몰수하여 본인 최갑동에게 넘겨주노라. 스즈끼선장은 송아지를 동래고을 우시장에서 샀다 하고 송아지를 끌고온 왜인은 동래고을 호방이 선장에게 선물한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소리를 한다. 또 왜인들은 허가없이 우리 군사들을 대접한다고 하면서 우리 섬에 불법상륙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령내를 침범한것과 다름이 없노라. 이렇게 너희 왜인들이 이상하게 놀아대니 의심을 불러일으키는지라 본관은 왜인들의 몸을 수색한다는것을 선포하노라. 이에 조금이라도 불복하는자는 해당한 법조항을 살려서 용서치 않으리라. 자기 몸에 지니고있는 소지품은 그 어떤것이든 자기 발부리앞에 숨김없이 내놓도록 하라. 여봐라, 방수패장은 즉시 본관의 령을 집행하라.》

언중유골이라고 그의 말속에는 뼈대가 있고 굳센 힘이 있어서 왜인들은 꼼짝 못하였다.

《예잇-》

방수패장은 군사들을 이끌어 왜인들을 둘러싸고 한놈씩, 한놈씩 소지품을 내놓게 하고 몸수색을 하였다. 열두놈중에 일곱놈의 허리춤에서 비수를 찾아내였다. 그런데 얼룩얼룩한 기모노를 입은 왜놈 하나가 자기의 소지품을 꺼내는척 하면서 새끼손가락만큼 가느다랗고 짧은 그 무엇인가를 발밑에 가만히 떨구고 발로 밟았다. 모두 검열하고 검열받느라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 순간이였다. 그놈은 누가 자기의 행동을 보고있지나 않나 하고 곁눈질로 우리 군사들을 훔쳐보았다. 하더니 눈알이 딱 굳어졌다.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권관 박세호의 눈길과 부딪친것이다. 그는 당황하여 박세호에게 까닥 고개를 숙여보이고 눈길을 돌리며 시치미를 뗐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

별안간 박세호가 호령하였다.

우리 군사들도 왜인들도 일시에 박세호를 바라보았다. 박세호는 성큼성큼 모래우에 큰 발자국을 남기며 얼룩기모노를 입고있는 왜인앞으로 다가섰다.

그를 좌우에서 호위하는 군사들이 따라섰다.

《방수패장은 이 왜인이 무엇을 밟고있는지 찾아보아라.》

이내 손가락만한 참대토막 하나를 찾아냈다.

《이것밖에 없소이다.》

방수패장은 별치않은듯 젖은 모래가 달라붙은 참대토막을 내보였다.

《모래를 닦아내고 다시 보아라.》

얼른 모래를 닦아내고보니 노랗고 딴딴한것이 보통의원들이 가지고다니는 참대침통처럼 손때가 오른것이였다. 한쪽의 참대마디는 막혀있고 다른 한쪽엔 나무마개가 막혀있었다. 마개를 뽑았다. 그안에서 무엇인가 똘똘 말려있는 하얀것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참지였다. 거기에 동래성의 략도가 그려져있었다.

박세호는 그것을 스즈끼에게 보이고 참대통에 다시 넣어 품속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얼룩기모노를 가리키면서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저놈을 묶어라.》

이날 박세호는 범죄자를 첨사진영으로 압송하고 왜인들은 배와 함께 조정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억류한다고 통고하였다.

며칠후에 진상이 밝혀졌는데 송아지건은 고을호방이 왜놈선장에게 《선물》한 송아지라는것이 드러났다. 이 호방이라는자가 최갑동의 집에서 조세를 미납했다고 하여 권력을 등대고 강제로 빼앗은 송아지였다. 그것을 사사로이 왜놈선장에게 뢰물을 받고 선물한것이다.

그리고 동래성 략도건은 명실공히 간자행위로 판결되여 얼룩기모노는 의금부로 압송되였다. 호방은 곤장을 맞고 파직되여야 마땅한자인데 어찌된 일인지 무사하였다.

권관 박세호는 왜나라와의 화천, 선린관계를 흐리게 하고 그들에게 침략구실을 주는 행위를 하였다고 권관의 보잘것없는 벼슬마저도 조정의 지시로 삭탈당하였다.

박세호는 언제 가면 나라가 나라구실을 하겠느냐 하고 길게 탄식하면서 두어달 두문불출하다가 단연코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 불가에 들어섰다. 그리고 법명을 령규라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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