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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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시각 주현희는 자기 인생에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리라는 꿈을 안고 학생소년궁전에서 대기념비건설장에 보내는 지원물자를 가지고 혜산역에 내렸다. 했건만 오늘 봄날의 그 꿈이 사나운 눈보라에 산산이 부서져 악몽같은 비분을 품고 혜산역을 떠나게 되였다. 그는 오빠로부터 합평회에서 리석의 우유부단한 처사를 듣고 압록강가에서 그를 만났었다.
백두밀림에서 몰아온 사나운 바람에 검은구름장들이 떼장처럼 몰켜드는 저녁녘이였다.
《현희선생,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소.》
리석의 아량있는 인사를 들으며 돌아서는 주현희의 눈빛은 예상외로 쌀쌀했다.
《오빠한테서 합평회에서 론의된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생각에도 쇠스랑이며 도끼와 낫을 든 군상들을 대기념비에 형상하라는건 납득이 가지 않는데 리석동지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그 문제에선 대성동무와 같은 견해요.》
《그런데 왜 합평회에선 침묵을 지켰어요?》
《현희선생도 창작가인데 내가 왜 침묵을 지켰는지 리해가 안되오? 그리고 이 대기념비가 창작가들의 개인작품이요? 아니, 이건 우에서 결심한 방향에 따라 집행해야 할 문제요.》
《전
점점 날을 세워 찌르는 주현희의 항변에 지금껏 가까스로 지탱하던 리석의 자제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어성은 높지 않았으나 서리발이 쳤다.
《그러니 현희선생도 대성동무처럼 리석이란 인간이 주대도 없이 우왕좌왕했다는거요? 명심하오, 부국장의 말은 김도만부장의 지시요. 거기에 왈가왈부하는것은 상부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리석은 바로 이 말을 주대성에게 하려고 마음속에 품고있었었다. 그래서 일전에도 《모난 돌》 이야기도 했댔는데 역시 주현희도 다를바 없는 《모난 돌》이고보면 어쩌면 남매간이 이렇게도 신통한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소리를 권력이 두려워 자기 견해도 제대로 피력하지 못했다는것으로 리해해도 되겠어요?》
무섭게 날이 선 물음이였고 어찌보면 리석에 대한 완전한 경멸이였다. 그러나 그 말에는 경멸보다 더 강렬한 호소가 들어있었다.
불같은 사랑이 없으면 안타까운 타매도 없는 법이다. 자기가 진심을 바쳐 존경하고픈 사람, 처녀의 가슴속에 첫사랑의 봄싹이 움트게 한 련인, 더구나 실력가로, 열정가로 뭇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사나이이기에 처녀는 서리낀 눈길로 불같은 마음을 터쳤던것이다.
《일제놈들의 손에 희생된 동지의 아버지가 독립군이였어요, 쇠스랑을 들고 농조투쟁 했어요?
만약 그 아버지가 오늘의 합평회를 보았더라면 뭐라고 하실것같애요? 동지의 그런 맹종맹동을 용서할것같애요?》
주현희의 눈에 뜨거운것이 고이기 시작했다.
리석의 아버지 리철은 네형제중의 셋째였다. 두 형은 애기때 홍역에 걸려 약 한첩 못써보고 세상을 떠났고 누이동생은 지주집 부엌데기로 머슴살이를 하다가 장질부사에 걸려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목수일을 배워온 리철은 아버지까지 사망하자 떠살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런데 타고난 천성인지 손재간은 여간이
아니였다. 밥상이며 찬장, 옷장을 만드는데도 조개껍질까지 재간껏 박아 모두가 혀를 차게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배손》이라고 불렀다. 그
소문이 널리 퍼져 경찰놈들도 그를 불러들여서는 가구를 만들게 했다. 목수로 중국 동북에까지 나들던 리철은
그때부터
리석의 한일자로 다문 입과 뒤짐지고 버티고 선 자세는 처녀에게 사내로서의 위압감을 풍기려 했지만 주현희는 마음속에서 장작불처럼 이글거리는
분격을 또 터치였다. 도대체 백두산에 올라가 뭘 느끼고 뭘 체험했는가,
주현희는 터지는 오열을 삼키며 입을 싸쥐고 돌아섰다. …
…혜산역구내에는 줄대같은 비줄기가 태질하며 쏟아졌다.
현희는 오빠와 함께 역구내로 나왔다. 황유탁의 조치로 대기념비창작에서 제명되여 혜산을 떠나는 오빠의 아픔을 두고 그 어떤 위로도 할수 없는 안타까움이 여린 처녀의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
구내의 외등쪽으로 걸어오던 주현희는 주춤했다. 저쪽구내선 화물렬차방통옆에 우산을 쓴 리석이가 서있지 않는가.
동생 현희의 눈길을 따르던 주대성도 리석을 알아보았다.
몰켰던 숨을 터치며 주밋거리던 주대성은 리석에게로가 아니라 렬차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희는 오빠가 자기를 위해 역구내의 상봉을
마련한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리석에게로 걸음을 옮길 마음이 없었다. 두발이 얼어붙은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마음이 빗장을 지른듯
요지부동이였다.
(정녕 이것이 마지막인가.)
다행히도 리석이켠에서 먼저 주현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나이의 도량이 떠민 걸음이였던지. …
현희는 터져라 입술을 옥물었다.
이제 리석이와 마주서면 무슨 말을 하게 될가. 아무리 곱씹어야 압록강기슭에서 터친 그 웨침뿐이였다.
만나지 말자, 괴롭더라도 이 모든 고뇌를 이겨내자. 주현희는 서로가 상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상면은 백해무익이라고 생각했기에 분연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렬차칸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리석에게는 모욕으로 된다는것을 알면서도. …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역구내에 출발을 알리는 렬차의 기적소리가 울렸다. 리석에게는 그 기적소리가 더이상 회복할수 없는 최종판결의 서리찬 전률로 울려왔다.
현희가 렬차칸으로 들어서니 창밖으로 두사람을 주시하였는지 주대성이 무거운 한숨을 후- 내불었다.
《그래도 역에까지 나왔는데 그냥 외면하는것은 아무래도 너무한것같다.》
《내가 눈이 멀었어요. 그 사람은 주대없는 인간이예요.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어요.》
《그런건 아니다. 리석인 항상 생활에서 셋까지 세여보고 행동을 시작하는 형이다보니…》
《오빠, 이건 성격문제가 아니예요. 사상적으로 예리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어요. 전 그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져요. 성실하고 재능있고 인정많고… 하지만 보세요. 마음속의 심지가 굳지 못하니 직권에 쉽게 눌리웠고 결국은 주견없는 인간으로 되지 않았어요.》
주대성도 말문이 막히는지 서름서름한 눈길로 묵묵히 창밖만 응시했다. 주대성은 비록 대기념비건립전투장에서 떠나지만 평양에 올라가서도 기념비형성안을 위한 창작사업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현희의 마음은 이 시각
렬차의 차창가에 앉은 현희의 눈길이 강풍에 휘말려 세차게 차창을 두드리는 비줄기에 닿았다. 현희는 가슴이 터질듯 가빠오르는 심장의 박동을 늦잦히려 승강대로 나섰다. 그의 눈길은 비내리는 하늘가로 이어졌다. 검은구름장에 뒤덮인 하늘이 마치 자기 마음속에도 무겁게 밀려드는것만같았다. 하지만 현희의 마음은 그리움의 빛, 당중앙위원회의 불밝은 창가로 달리고있었다.
현희의 강인한 결별의 웨침이런듯 렬차는 마지막기적을 울리며 역구내를 떠났다. 현희의 눈길은 얼핏 역구내의 외등밑에 외로이 서있는 리석에게 닿았다. 리석이도 현희를 지켜보고있었다.
총각의 눈빛은 처녀의 온몸에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가슴이 떨리고 얇은 입술이 파들거렸다. 렬차가 움직이면서 현희의 눈가에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레루우로 서서히 움직이는 렬차바퀴와 더불어 새된 동음이 울렸다. 주현희의 시야에서 리석의 모습은 점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두사람이 지금껏 한돌기, 두돌기 쌓아올린 련정의 탑은 무너지는듯싶었다. 아니! 분명히 리성은 그렇게 선언하고있었지만 감성은 더더욱 달려가 부둥켜안고싶었다. 이제라도 뛰여내려 그 탑을 더 높이, 더 튼튼하게 쌓고싶었다. 이것이 녀자의 마음인가? 아니라고 도리머리를 저으면서도 달려가 얼굴을 비비고싶은! 그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함빡 쏟아놓고싶은.
잊으려고 할수록 더더욱 잊지 못할 이 마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잊을수도 있는것이 사랑이였단 말인가.
주현희는 입술을 깨여물며 강잉히 머리를 저었다. 리석은 황유탁이와 주현희라는 《밀물과 썰물》의 인력으로 생기는 압박감에 태질하면서도
(아니! 현희야, 동요하지 말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셋이 아니라 순간의 주저도 하지 말아야 해. 왜냐하면 우리는 혁명가의 아들딸들이기때문이야.)
그러나 지우면 지울수록 커지기만 하는 사랑의 미련을 현희는 놀랍게 감수했다. 지울래야 지울수 없는 내 사랑을 누구인가가 리해해주고 다시 이어줄것만같은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누구일가? 내 사랑을 구원해줄 그 은인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그렇다, 어쩌면 지금 마음속으로 결별을 선언하면서도 다시 만날 꿈을 꾸고있는 이 마음은 그분께서 계시기때문이 아닐가? 이 마음의 애달픈 사연을 그분께 아뢰이리라 결심하였기때문인것이다.
그분께서만은 나의 마음속에 고인 괴로움과 아픔을 알아주시고 리상의 언덕으로 손잡아 이끌어주실것이다. 미술전람회에
순간 현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처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