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 회)
제 3 장
8
(2)
…승용차는 만경대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기 시작했다.
쑤다에브와 함께 승용차의 뒤좌석에 앉은 림춘추는 푸른 숲이 물결치는 산발들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그는 엊그제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서 새로 발굴하여 형상한 항일무장투쟁시기의 혁명가요들을
《흥미있습니다. 쑤다에브가 〈뽐뻬이의 마지막날〉을 거들었다는데 어떻습니까, 림춘추동지의 생각엔?》
림춘추는 단마디로 평가했다.
《염세적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처지가 그렇게 되니 타락한것같습니다. 술을 안마시던 사람이 엉망이 되도록 술을 마시는걸 봐두.》
《그래요?…》
림춘추는 쓰겁다는듯 빈입을 다시며 마디굵은 손가락을 깍지끼였다.
쑤다에브는 혁명의 선대
《쑤다에브의 부인은 벌가리아에 있던 조선인 전재고아학원에서 음악교원을 하면서 우리 학생들에게서 〈
림춘추는 머리를 기웃했다.
《조선의 래일을 두고도 기연가미연가하는것같아 솔직히 실망을 느꼈댔는데 어제밤에는 우리 당보에 실린 론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를 읽고 몹시 흥분된것 같더군요. 헌데 집필도 바쁜데 쑤다에브는 외무성에 맡기고 난 집필실로 내려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이제는 데리고 좀 다니십시오. 만경대혁명학원을 보여주는것이 좋겠습니다. 사상과 전통의 피줄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제 눈으로 확인하게 말입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
그리하여 림춘추는 지금 쑤다에브를 데리고 만경대혁명학원으로 가고있었다.
풍치수려한 만경봉에서 줄기를 뻗은 푸른 산줄기들이 어깨겯고 둘러선 명당자리에 우뚝 솟은 만경대혁명학원은 쑤다에브의 넋을 별세계의 신비경으로 이끌고있음이 분명했다. 림춘추는 그의 흥분된 눈빛을 보고도 내심의 파동을 쉬이 가늠할수 있었다.
항일의 령장모습으로 건립된
또한
쑤다에브는 문득 미국으로 망명한 자기의 아들 안드레이를 눈앞에 그려보았다. 만약 안드레이가 조선에서 태여났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아버지, 어머니를 버린 불효자식이 되였겠는가? 선렬들이 피로써 지킨 조국을 배반하였겠는가?!
쑤다에브는 만경대혁명학원 음악소조실에도 들렸다. 원아들은 희망과 열정에 넘쳐 혁명가요를 연주하고있었다. 그들의 세련된 연주기교도 쑤다에브에게는 찬탄의 감개를 터쳐올렸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부르는 아동단가요들의 구절구절은 백발로병의 심장에 제2차 세계대전의 준엄한 나날들을 추억케 했다. 쑤다에브는 음악소조실에서 원아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인할아버지가 조선말을 하는것이 신기했던지 원아들은 쑤다에브를 둘러싸고 웃으며 꾸밈없는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원아는 항일무장투쟁에서 희생된 렬사의 손자였고 어떤 소녀는 조국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영웅의 딸이였다. 그들은 너도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일의 아동단,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소년빨찌산들처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아버지
이름할길 없는 격정에 싸여 만경대혁명학원청사의 계단을 내리는 쑤다에브를 일별하며 림춘추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만약 안드레이가 2차 세계대전참전자인 아버지의 넋을 이었다면 미국으로 망명했겠습니까? 안드레이만이 아닌 벌가리아의 새세대들이 전세대의 뒤를 이어 떨쳐나선다면 쑤다에브선생이 그토록 사랑하는 붉은기가 변색되겠습니까?》
쑤다에브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가슴이 쭝해졌던 쑤다에브는 리해가 간다는듯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을 떠난 승용차는 대동강 푸른 물결이 춤추듯 기슭으로 흘러드는 청류벽밑에서 멎어섰다. 갈매기들이 흰 나래를 퍼덕이는 강기슭에서는 낚시애호가들이 겨끔내기로 고기들을 낚아올리고있었다. 림춘추는 운전사에게 점심시간이여서 야외식사를 마련하라고 이른 후 쑤다에브와 함께 청류벽밑으로 산책하였다.
운전사가 달려와 어죽이 끓었다고 귀띔해서야 림춘추는 쑤다에브의 손목을 잡아끌고 청류벽밑의 샘가로 내려왔다. 선들선들 싱그러운 산바람이 흥취를 돋구며 기분좋게 볼을 스쳤다. 림춘추는 쑤다에브로 하여 더는 속썩을 일이 없게 되였다는 안도감으로 남비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맛을 보며 소리쳤다.
《히야, 어죽맛이 별맛이구만. 쑤다에브선생, 어서 앉으시오. 아마 이 맛엔 벙어리도 한곡조 터칠겝니다.》
허나 쑤다에브는 청류벽기슭을 오락가락 거닐며 곤혹스러운 세계에서 태질하던
《아, 어죽은 식으면 제맛이 안납니다. 어서 오시오. 처녀가 때를 놓쳐 홀아비한테 시집가는 격이 되지 말구요.》
《저야 때를 놓친 인생인데 단맛, 쓴맛을 가릴 형편이 됐습니까?》
림춘추는 쑤다에브의 마음이 어죽남비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는 생각으로 우정 에둘러 모르쇠를 했다.
《허, 조선의 만경대혁명학원을 돌아보고와서까지 구름낀 소리를 하면 되겠습니까?》
《내 그럼 하나 물을테니 외교없이 진실을 말해주겠습니까? 조선빨찌산의 로투사답게.》
림춘추는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외국대사경력도 가지고있지만 선생이 말하는 그런 외교는 할줄 모릅니다. 하긴 벌가리아에서도 그래서 추방되였지요.》
쑤다에브는 림춘추앞에 있는 나무등걸에 앉으며 심중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나라에서 추방된 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까?》
림춘추는 쑤다에브의 이 질문에서 뽐뻬이의 불찌가
《난 조국에 와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 누구한테서 말입니까?》
《우리에겐 우리의 미래를 확신케 하는 친근한 젊은 동지가 한분 계시는데 백두산에서
《그래요?!》
쑤다에브는 자기가 제일 알려고 하는 문제의 한귀퉁이가 열리는것을 느끼며 바투 나앉았다.
《
《지금 지방의 별장에서 자서전적소설을 쓰는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림춘추는 허허 웃음을 지었다.
《자서전적소설이라니요? 몰로또브의 운명과 같은 비극의 참화가 내 조국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펜을 들었지요.》
쑤다에브의 가쁜 숨소리에서 지금 그가 삭일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들고있다는것이 알렸다.
《참, 내 자랑을 좀 해야겠구만요. 난 우리 항일빨찌산 문필가랍니다. 빨찌산의 청년투사들 이야기를 엮은 소설을 쓰고있는데 1, 2부는 벌써 몇해전에 나왔습니다. 이번에 선생에게 기념으로 드리지요. 년말쯤에는 3부가 나올것입니다. 그때 외무성동무들에게 부탁해서 선생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장은 몇해전에 썼던 항일무장투쟁회상기의 증보판을 냈는데 이제 숙소에 돌아가면 보여드리지요.》
쑤다에브는 말없이 숟가락을 어죽남비에 힘있게 들이박으며 련거퍼 몇숟가락을 떠서 후후 불어 꿀떡꿀떡 삼키다가 허- 하고 입으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림춘추를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허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